아수라장이 된 파티장에서 기택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의 눈은 많은 말을 담고 있다.

아수라장이 된 파티장에서 기택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의 눈은 많은 말을 담고 있다. ⓒ CJ엔터테인먼트

 
* 주의!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대학생 때 시나리오 쓰는 과목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날은 햇살이 좋아서 야외에서 수업을 하였는데 각자 구상해온 것을 발표하는 좀 자유로운 수업이었다. 여러 학생들 중에 한 남학생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어디까지인지, 어느 정도여야 친하다고 할 수 있는 건지 말하고 싶다'며 가령 친한 친구, 친하다고 생각한 친구가 돈을 빌려달라고 했을 때 우리는 10만 원을 빌려줄 수 있을까? 100만원도 가능한 사이일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화창한 날씨와는 다르게 나는 그의 말을 곱씹다 보니 뭔가 우울한 마음이 들었다.

영화 <기생충>에서는 냄새로 관계를 구분지었다. 박사장은 영화 내내 티를 내지 않다가 말미에 결국 코를 잡았다. 단지 코를 잡은 이유 때문이었을까. 계속해서 한 가지의 질문이 머리속에 맴돌았다. 

'기택은 왜 박사장을 찔렀을까?'

"부자는 냄새로 선을 지키는 안전장치를 삼다가 위태로워진다. …(중략)... 부자가 냄새전선으로 방어막을 친다는 것은 그들이 에너지를 잃었다는 증거다. 스스로 자기 동선을 좁히는 어리석음이다." -김동렬의 구조칼럼 '기생충 천만은 무리인가?' 중에서(2019. 06. 14.)

영화 내내 냄새로 기택 가족들과 선을 그었던 박사장. 영화 말미에 벌어진 파티장에서는 칼부림이 벌어지고 피를 흘리는 기택의 딸과 아들 아내. 그 사이에서 딸의 상처를 누르며 피를 막아주는 것밖에 할 수 없었던 기택. 딸 마저 "누르는 게 더 아프다"며 기택의 손길을 거두게 만든다.

기택은 아무리 둘러봐도 뭐부터 해야 할지 머리가 하얗다. 이 와중에도 코를 막으며 선을 긋는 박사장이 눈앞에 띈다. 박사장 반경 1미터 주위로 빙 둘러져있는 그와 기택 사이의 경계.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던 그와의 거리. 박사장의 가슴팍에 칼을 꽂았을 때 비로소 그 경계는 파괴되었다. 경계가 파괴되었을 때 박사장과 기택이 가장 가까웠던 순간이 되어버린 아이러니. 
 
 영화 '기생충'의 한 장면

영화 '기생충'의 한 장면 ⓒ CJ엔터테인먼트

 
기택은 순간 자신이 제일 미웠을지도 모르겠다. 굉장히 짧은 시간이지만 우리는 파노라마처럼 살아온 날들이 스쳐지나가기도 한다. 나름 열심히 살았지만 자식에게 "무계획이 제일 좋은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이자 바퀴벌레라는 소리를 듣는 남편이었던 기택. 그래도 좋은 게 좋은거지 라며 큰 어려움도 넘기며 살아왔는데 아수라장이 되어있는 잔디밭에 서 있고 보니 자신이 밉기도 하면서 억울하기도 하면서 만감이 교차했을 것이다. 

그런 그의 앞에 있던 박사장은 모든 걸 다 갖췄다. 박사장은 자신이 되고 싶지만 될 수 없었던 과거이자, 현재의 미운 자아가 투영된 대상이다. 정확하게 알 수 없는 적이기도 하다. 사실 박사장은 큰 잘못이 없다. 사회 시스템 속에서 합법적으로 자신의 능력대로 부를 쌓아 살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뭔가 잘못되었다. 그러나 그 뭔가가 무엇인가. 모호하다. 우리가 만들어 놓은 사회 시스템 안에서 아무 쓸모없는 기생충 같은 자신을, 그런 기생충을 양산하고 있는 모호한 적이자 숙주를 찌르는 대신 박사장을 희생하게 한 건 아닐까.
 
'박사장은 왜 냄새에 민감했을까?' 

사실 제일 먼저 냄새에 반응을 보인 건 기택과 충숙의 몸에서 비슷한 냄새가 난다고 제보(?)했던 박사장의 아들이었다. 느낀 대로 아들은 표현했고, 어른인 박사장은 체면상 면전이 아닌 뒤에서 말을 했다. 물론 어른들의 행동은 드러난다. 박사장의 부인은 기택이 운전할 때 차문을 열었고, 박사장은 코를 막았다. 파티장에서 유독 신이 났던 부류도 있었는데 사람 옆구리에 찔려있던 꼬치에 햄인지 고기인지를 뜯어 먹고 있던 강아지들. 사태파악 없이 본능에만 충실했던 개들과 코를 막은 채 차 키만 찾기에 급급한 박사장이 오버랩되었다고 말하는 건 박사장에게 너무한 처사일까. 

우리는 각자 무엇으로 선을 긋고 살고 있을까. 의도하지는 않지만 나도 모르게 긋고 있는 보이지 않는 선들, 없애야 하는 걸까, 없앨 수는 있을까? 너와 나 사이의 선은 없앴다가 생길수도 있고, 생겼다가 없앨 수도 있다. 처음부터 규정짓지는 말자. 다만 그 방향은 희망적인 쪽으로, 계획이 있는 쪽으로 해두자. 기우처럼 말이다. 

'마지막에 주인공들이 목표를 얻은 것은 에너지를 획득한 것이며 전망과 비전을 얻은 것이다. 에너지가 중요하다. 인생이 실패하는 것은 그대에게 목표가 없기 때문이다.' -김동렬의 구조칼럼 '기생충 천만은 무리인가?' 중에서(2019. 06. 14) 

수능을 여러 번 치르며 좋은 대학만 가면 새 인생을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기우는 좋은 대학을 갔다는 인생을 한 번 살아보았다. 그 삶도 녹록치 않았고, 밑바닥을 파악해버렸다. 한바탕 전쟁을 치르고는 세상을 다 깨우친 듯 하하하 웃으며 병원을 나왔다. 목표를 세운 기우는 어디선가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세상의 무수한 선과 마주치며, 웃어넘기며, 귀한 인연들을 만나 성장하고 있을 것이다. 그럴 거라고 믿는다.
 
기생충 박사장을 찌른 이유 봉준호 송강호 이선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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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세계사가 나의 삶에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일임을 깨닫고 몸으로 시대를 느끼고, 기억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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