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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름상 메달
 오름상 메달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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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근기자의 전화
 
이달 초순 오마이뉴스 상근 기자로부터 반가운 전화를 받았다. 사연인 즉, 2월 22일은 <오마이뉴스> 창립 20주년 기념일인데, 내가 오름상 수상 대상자로 시민기자 명예의 전당에 오르게 됐다는 것이다. 그와 함께 행정 절차로 주소, 주민등록번호, 계좌번호 등을 문자로 보내 달라고 했다.
 
뜻밖의 일로 얼떨떨해 하자 등록기사가 1000개가 넘으면 명예의 전당 오름상을 준다고  설명했다. 전화를 끊은 뒤 송고기사 수를 조회해 보자 이미 1000회를 넘겼다.
 
오마이뉴스에 내 첫 기사가 게재된 것은 2002년 7월 8일이었다. 그날부터 2005년 11월 18일까지 3년 남짓 기간 587꼭지의 기사를 쓴 뒤 탈퇴를 했다. 소설 창작에 전념하고자 그랬던 것이다. 그런데 막상 탈퇴를 하자 국내외 애독자들이 많이 원망했다.
 
특히 해외동포 애독자는 내 기사로 그동안 고국과 고향 소식을 접하였는데 무척 아쉽다고 여러 차례 다시 기사를 써달라고 재촉했다. 그래서 그 이듬해인 2006년 5월 11일부터 슬그머니 다시 기사를 썼다. 그러니 통산 1589번째 기사를 쓴 셈이다.
 
1961년 5.16 쿠데타가 나던 해 나는 고1학생이었다. 그해 고향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뒤 상경하여 고교에 진학했다. 입학 한 달여 만에(당시는 4월 1일 개학했음) 5.16쿠데타로 집안이 풍비박산이 났다. 나는 학업을 더 이상 계속할 수 없어 휴학을 하고 날마다 어떻게 하면 멋있게(?) 흔적도 없이 죽을 수 있을까 골똘히 생각했다. 그러다가 죽어봐야 나만 억울하다는 생각이 번쩍 떠올라 신문배달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가회동에서 경향신문을 배달했다. 그해 연말에는 부수가 많은(곧 수입이 더 많은) 조선일보 계동배달원이 되었다. 이듬해인 1962년 1월 1일 새벽 신년호 신문을 배달한 뒤, 해맞이를 한다고 곧장 삼청공원으로 올라갔다. 곧 서울 동쪽 산위로 솟는 해를 바라보면서 두 손을 모아 소원을 빌었다.
 
교사, 작가, 기자의 꿈
 
그 첫째는 내가 복학을 하여 고교를 졸업한 뒤 국문과에 진학하여 후일 국어교사(가능한 모교)가 되게 해 달라고 빌었다. 그 둘째는 작가가 되게 해 달라고 빌었다. 그 셋째는 신문기자가 되게 해 달라고 빌었다. 당시 서울 북촌은 대부분 한옥으로 대문 틈으로 신문을 넣으면 집안에서 개들이 갑자기 뛰어나와 내 바짓가랑이를 물어 찢어놓곤 했다. 그때 나는 워커 발로 개 주둥이를 차면서 고함쳤다.
 
"개새끼! 사람 차별하지 마. 난 이 다음에 신문기자가 될 귀한 몸이야."
 
지금 생각해도 학교도 다니지 못한 신문배달소년의 야무진 세 가지 꿈이었다. 그해 3월 복학한 뒤 대학 국문과에 진학해 첫 번째 소원대로 모교(중동고) 교사가 되었다. 그 두 번째 소원은 좀처럼 이루어지지 않았다.
 
해마다 연말이면 신춘문예공모에 응모했으나 번번이 낙방이었다. 1987년 그해에는 중편과 단편을 썼다. 두 신문사에 응모했으나 연말까지 감감 무소식이었다. 그때의 낙심은 천 길 낭떠러지에서 추락하는 절망감이었다. 그 며칠 후 낯선 이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았다.
  
이균영 작가의 편지
 이균영 작가의 편지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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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도님.
계속 쓰신다면 文運(문운)이 따를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 새해되시길 빕니다.
87년 새해
李均永 드림.

 
이름이 다소 익어 더듬자 소설가요, 역사학자인 이균영 교수였다. 그해 그분은 신춘문예 심사위원이었던 바, 아마도 내 작품을 보고 무척 안쓰러워 격려 차 보낸 듯했다. 하지만 처음 나는 몹시 화가 났다. 누구 약 올리는 거냐고. 다시 곰곰 생각하니까 매우 고마운 분으로 나에게 아편 한 줌을 준 것이다. 그래서 그분에게 정중히 감사의 답장을 보냈다. 그 뒤 그분은 젊은 나이에 요절하여 끝내 만나지는 못했다.
 
'그래, 나는 소설보다는 수필을 쓸 거야.'
 
그렇게 마음을 고쳐먹고 이듬해 <비어 있는 자리>라는 산문집을 펴냈다. 그러자 대학 친구들도, 출판사에서도 소설을 쓰라고 부추겼다. 그래서 장편소설로 그것도 두 권짜리 <사람은 누군가를 그리면 산다>라는 대작을 써서 쉰이 된 나이에 문단 말석에 얼굴을 내밀었다.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5층 사진자료실에서 검색 수집작업을 하는 기자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5층 사진자료실에서 검색 수집작업을 하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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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인연
 
내 작품을 읽은 한 법조인이 작가는 모름지기 민족혼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면서 1999년 여름방학 때 중국대륙 항일유적지 답사를 주선해 주었다. 여비는 물론이고 안내자로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이상룡 선생 후손 이항증 선생과 무장투쟁론자 김동삼 선생 후손 김중생 선생까지 동행하게 했다.
 
그때 하얼빈 동북열사기념관에서 고향 출신 동북항일연군 허형식 장군을 알게 되었다. 그 순간 태평양을 처음 발견한 탐험가처럼 내 심장은 마구 뛰었다.

'내 고향 구미에 이런 항일명장이 있었다니....'

귀국 후 <민족반역이 죄가 되지 않는 나라>라는 항일유적답사기를 쓰면서 같은 구내 이화여자대학교 중앙도서관을 샅샅이 뒤졌다.

그래서 허형식 장군을 연구한 당시 성균관대학교 연구교수 장세윤 박사를 알게 되었다. 또, 그분의 주선으로 허형식 장군을 국내신문에 처음으로 보도한 대한매일신문 특집부 차장 정운현 기자를 만났다.
 
이듬해 독립기념관지 7월호에 쓴 '영웅을 찾아서'라는 기고문을 본 당시 정운현 오마이뉴스 편집국장은 그 글을 '일본군 장교 박정희는 기념관 세우고, 항일군 총참모장 허형식은 생가 헐려'라는 제목으로 게재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오마이뉴스 시민기자가 되어 천만 뜻밖에도 나의 세 번째 꿈을 이루었다.
 
오마이뉴스 기자가 된 이후 나는 독자들의 성원으로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등 여러 나라를 답사 했고, 많은 자료도 수집해 왔다. 그와 동시에 현재까지 마흔 권 남짓 책도 펴냈다. 나는 기사 한 편 한 편을 쓸 때마다 프로야구 마무리 투수처럼 전심전력을 다해 썼다. 나는 기사를 쓴 뒤 평균 5~6차례 퇴고했고, 경우에 따라서는 10여 차례 가다듬었다.
 
지난 연말 통일부에 있는 한 제자(백태현 통일부 전 대변인)가 청하기에 기분 좋게 만나 즐겁게 점심 식사를 했다. 마침 그 밥집이 오마이뉴스 바로 옆 건물이라 식사 후 편집부에 들렀다. 지난해 연말로 [박도 기자의 NARA 앨범] 연재도 끝났기에 시민기자 명퇴를 상의하고자 갔던 것이다.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던 한 상근 기자에게 내 뜻을 전하자 펄쩍 뛰었다.
 
"건강이 허용하는 한 계속 기사를 보내주십시오. 박 기자님이 다른 시민기자의 앞을 막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선임도 있고, 신참도 있어야 합니다. 시민기자는 오마이뉴스의 자산입니다."
 
이 기사를 쓰고 있는데 한 통일꾼 제자(진천규)의 전화가 왔다. 그는 이달 말에 북에 취재 갈 예정인데 '코로나19' 때문에 발이 묶여 있다고 푸념했다.
 
"대동강 옥류관에서 냉면을 먹은 다음, 나는 통일(또는 종전)기념 특종 기사를 쓰고, 자네는 사진을 찍은 뒤 오마이뉴스로 송고하세."
"예, 선생님! 부디 건강하세요. 민화협 김홍걸 의장과 함께 그날을 앞당기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 특종 기사를 쓰는 게 나의 마지막 꿈이다.

태그:#오름상,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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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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