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장> 스틸컷

영화 <이장> 스틸컷 ⓒ 인디스토리

 
이 영화를 남성이 만들었다니 믿을 수 없다. 여성 서사의 끝판왕, 가부장제의 종말, 모계사회의 출발, 가족의 의미를 되묻는다. 정승오 감독은 여성이란 이유만으로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의 정체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출발했다 말했다. 주변 가족을 오랫동안 관찰하면서 세밀한 캐릭터를 만들어 나갔다. 그래서일까. 자연스러운 배우들 연기와 촘촘한 서사, 현실적인 대사가 와닿는다.

영화 <이장>에 대한 영화제의 관심도 끝이 없다. 제20회 전주국제영화제 CGV아트하우스 창작지원상을 받으며 세계 유수영화제 초청은 물론 바르샤바국제영화제에서 한국 작품 최초로 신인감독경쟁대상 및 넷팩상을 동시에 수상했다. 영화제 수상작이 재미없다는 편견을 깬다. <기생충>만큼이나 작품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갖춘 웰메이드 영화다. 가장 한국적인 정서가 제일 세계적임을 느끼는 한편, 가부장제 모순은 비단 한국만의 특수성이 아님을 시사한다. 가족 안에서 성 역할이 정해져 있으며 차별받는 동시에 차별하게 되는 악순환이 영화의 모티브라 할 수 있다.

아버지 묘 이장 문제로 다시 뭉친 오남매

딸만 넷 그리고 막내아들. 아버지 묘 이장 문제로 오남매가 뭉치게 된다. 장녀 혜영(장리우)은 말썽쟁이 초등학생 아들 동민(강민중)과 동생들 마중 나간다. 먼저 역 앞에서 금옥(이선희)와 금희(공민정)을 만나고 혜연(윤금선아)까지 태운다. 하지만 문제는 유일한 아들 승락(곽민규)과 연락조차 되지 않는다는 것. 어쩔 수 없이 네 자매는 승락을 빼고 큰아버지 댁으로 떠난다.
 
 영화 <이장> 스틸컷

영화 <이장> 스틸컷 ⓒ 인디스토리

 
차 안으로 들어온 카메라는 이 집안의 서열이 그대로 보여준다. 무작위처럼 보이나 태어난 순서대로 앉아 있는 익숙한 풍경이다. 장녀 혜영의 리더십은 운전대에서 폭발한다. 차를 가진 자, 그러니까 운전수 마음대로라는 말을 실감하는 카리스마를 가졌다. 한정된 공간(차)에서 벌어지는 티격태격 말싸움은 재미와 감동, 분노를 유발한다.

그러는 사이 드디어 큰아버지 댁에 도착했다. 이제 짐 좀 풀고 쉬려고 하니 큰아버지 관택(유순웅)의 불호령이 떨어진다.

"아니, 장남도 없이 무슨 무덤을 파! 빨리 가서 장남 데리고 와!"
 
 영화 <이장> 스틸컷

영화 <이장> 스틸컷 ⓒ 인디스토리

 
그놈의 장남 장남 장남! 누나들은 장남 뒤치다꺼리에 지칠 대로 지쳤다. '장남이 밥 먹여주나, 장남이 무슨 벼슬이에요? 우리도 자식이야'를 부르짖고 싶은 속마음이 싹튼다. 이 타이밍에 마음의 소리를 입 밖으로 쏘아버리는 넷째 혜연은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하지만 발악도 잠시. 자매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장남 승락을 데려와야만 한다.

되돌아가는 차안. 정신없는 상황과 보상금 문제로 싸우며 각자의 사연이 하나둘씩 드러난다. 사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해도 자매들 모두가 말 못 할 사연을 품고 있다. 첫째는 아이에게 아빠의 부재를 설명해야 할 타이밍을 찾고 있으며 육아휴직 겸 퇴사 권고를 받은 싱글맘이다. 둘째는 결혼에 사랑은 없다며 돈이 최고라고 말하는 팔자 좋은 사모님 같지만 현실은 남편 불륜에도 침묵하는 헛똑똑이다.

셋째는 늘 장난기 가득해 보이지만 결혼을 앞두고 경제적인 어려움을 떠안은 예비신부다. 이장 보상금 500만 원에 가장 눈독 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넷째는 대학에서 불의에 항의하는 행동파로 아무도 대적하지 않는 큰아버지와 맞짱 뜨는 대범함을 보인다.
 
 영화 <이장> 스틸컷

영화 <이장> 스틸컷 ⓒ 인디스토리

 
마지막으로 이 집안의 귀한 아들 승락은 어릴 때부터 장남이자 유일한 아들도 온갖 대접받고 컸지만 꼬여버릴 대로 꼬여버린 인생이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가족의 희망이란 소리를 듣고 자란 탓에 중압감은 말도 못 한다. 그래서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냅다 잠적하기가 특기다. 어깨를 짓누르는 기대와 달리 사회의 높은 벽을 넘지 못해 좌절하고 있으며 여자 친구 윤화(송희준)와의 문제까지 불거진 트러블 메이커다.

이 가족은 가부장적 틀이 뿌리 깊게 박혀있는 전형적인 남성우월주의 집안이다. 그 표상은 고지식한 큰아버지다. 아들 낳지 못할 뻔(?) 한 엄마는 평생 시집살이에 등살이 휘었고, 죽어서도 남편 옆에 묻지 말고 화장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큰어머니 옥남(강선숙)을 봐도 그렇다. 무뚝뚝함은 예사, 말을 시켜도 쳐다보지도 않는 큰아버지는 "여자들이 뭘 안다고!"를 외치며 여자 말은 무시하기 일쑤다. 그런 큰아버지와 어떻게 같이 사나 모르겠다.

영화는 공감으로 똘똘 뭉쳤다. 네 자매의 억눌림과 유일한 남성이자 장남이 갖는 무게감이 교차된다. 딸들이 내뱉는 차별적 증언들은 여성이라면 한 번쯤 겪어 봤을 법한 공감으로 다가온다. 아들 귀한 집에서 딸이라는 이유로 부모나 친척으로부터 받는 차별을 경험했다면 영화 속 딸들의 고민과 맞닿을 것이다. 하지만 남성이라고 해서 마냥 편한구석만 있다고는 할 수 없다는 점도 이해된다. 누구든 입장 차이는 있다는 거다.

명절 때마다 거듭되는 가족 불화의 단골 문제가 바로 제사다. 제사는 죽은 사람을 기억하기 위한 형식이지만 누군가는 대접받고 누군가는 홀대받는다. 과연 제사는 누구를 위한 것일까란 질문이 자꾸만 떠오른다. 한 배에서 나왔지만 서로 달라 힘들었고, 가족이란 이름으로 상처도 많이 주고받았다. 그렇게 영화는 썩어빠진 뿌리(아버지)를 잘라 버리며 새로운 가족사를 쓰기로 선언한다.
 
 영화 <이장> 스틸컷

영화 <이장> 스틸컷 ⓒ 인디스토리

 
영화 <이장>은 아버지 묘 이장 때문에 오남매가 뭉치면서 시작되는 가족무비이자 로드무비다. 현실적인 상황과 공감 가는 대사, 배우들의 호연으로 높은 몰입감을 준다. 영화를 보고 있는 것뿐인데 마치 우리집 이야기 같은 솔직 담백함이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어느 가족의 형태지만 한국 사회의 축소판이기도 하다. 우리네 가족이 다 달라 보여도 비슷한 문제로 시끌벅적한 건 매한가지인가 보다. 그렇게 가족이 된다.
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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