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리그 여자부의 IBK기업은행 알토스가 지난 22일 한국도로공사 하이패스와의 홈경기에서 세트스코어 3-0 승리를 거두며 최하위에서 탈출했다. 작년 11월 23일 최하위로 추락한 후 약 3개월 만에 만들어낸 꼴찌 탈출이라 기쁨은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한 편으로는 분위기 반전에 성공한 상태에서 시즌 종료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아쉽게 느껴질 법도 하다.

기업은행의 탈꼴찌는 올림픽 최종예선을 치른 후 종아리 부상으로 9경기에 결장했던 에이스 김희진의 복귀전에서 나왔다. 김희진은 작년 12월 14일 GS칼텍스 KIXX전 이후 약 70일 만에 치른 복귀전에서 서브득점 1개와 블로킹 1개를 포함해 14득점을 올리며 어도라 어나이(18득점), 표승주(13득점)와 함께 기업은행의 공격을 이끌었다. 실로 오랜만에 기업은행의 '삼각편대'가 제대로 돌아간 셈이다.

이날 기업은행은 김수지와 변지수가 중앙을 지키고 김희진이 아포짓 스파이커(오른쪽 공격수)로 출전했다. 오른쪽 공격수는 김희진이 대표팀에서 주전으로 활약하는 포지션이자 김희진이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위치이기도 하다.

하지만 김희진은 그동안 '팀 사정'을 이유로 센터 출전을 강요받았고 이번 시즌 기업은행은 하위권을 전전했다. 만약 김희진이 오른쪽에서 풀타임으로 활약했다면 이번 시즌 기업은행의 운명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소속팀에선 센터-대표팀에선 라이트
 
 김희진은 대표팀 유니폼을 입으면 센터가 아닌 주전 라이트로 활약한다.

김희진은 대표팀 유니폼을 입으면 센터가 아닌 주전 라이트로 활약한다. ⓒ 국제배구연맹

 
물론 '문데렐라' 문정원(도로공사) 같은 독특한 케이스도 있지만 흔히 배구 경기에서 아포짓 스파이커는 서브리시브를 면제 받는 포지션이다. 그만큼 공격에 전념해 더 많은 득점을 올려야 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V리그 여자부를 대표하는 '기록제조기'이자 공격에 관련된 거의 모든 기록을 가지고 있는 '꽃사슴' 황연주(현대건설 힐스테이트)가 아포짓 스파이커를 대표하는 선수라고 할 수 있다.

중앙여고 시절부터 여자배구의 미래를 이끌 유망주로 주목받았던 김희진은 2010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신생구단 기업은행의 지명을 받았다. 하지만 당시 기업은행을 이끌었던 이정철 감독이 김희진에게 맡긴 포지션은 오른쪽 공격수가 아닌 중앙 공격수였다. 기업은행의 오른쪽에는 알레시아 리귤릭이라는 공격력이 좋은 외국인 선수가 있었기 때문에 신장(185cm)이 좋은 김희진에게 중앙을 지키게 하면서 팀 전력을 극대화한 것이다.

바로 그 때부터 김희진의 외로운 이중생활(?)이 시작됐다. 루키 시즌을 보낸 김희진은 대표팀에 선발돼 런던 올림픽에 출전했는데 런던 올림픽에서 김형실 감독은 김희진을 센터가 아닌 아포짓 스파이커로 활용했다. 양효진(현대건설)과 정대영(도로공사)이 버틴 센터 포지션보다는 177cm의 황연주가 지키는 오른쪽의 신장이 상대적으로 낮았기 때문에 유망주 김희진으로 하여금 높이를 강화해 준 것이다.

고교 시절 '천재소녀'로 불리던 배유나(도로공사)가 센터로 자리 잡은 것처럼 멀티 포지션을 소화하던 선수도 연차가 쌓이면 한 포지션에 정착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김희진은 소속팀과 대표팀을 오가며 센터와 라이트의 '두 집 살림'을 완벽하게 소화했다. 센터로 활약한 소속팀에서는 3번의 우승과 함께 기업은행을 6연속 챔프전으로 이끌었고 라이트로 활약한 대표팀에서도 런던올림픽 4강, 리우올림픽 8강, 인천아시안게임 금메달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사실 김희진은 센터보다는 라이트 포지션에 애착이 강했고 실제로 기업은행이 외국인 선수로 리시브가 가능한 윙스파이커 메디슨 리쉘을 지명했던 2016년에는 김희진이 라이트로 나설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이정철 감독은 센터진의 무게감이 약해지는 선택 대신 파이팅이 좋은 신예 김미연(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을 오른쪽에 배치하는 안전한 결정을 내렸다.

프로 입단 후 한 번도 '풀타임 라이트'로 뛴 적 없는 김희진
 
 김희진이 풀타임 라이트로 활약할 때 기업은행이 어떤 성적이 나올지 확인해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김희진이 풀타임 라이트로 활약할 때 기업은행이 어떤 성적이 나올지 확인해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 한국배구연맹

 
여자부 초유의 6연속 챔프전 진출이라는 대기록을 세운 기업은행은 지난 시즌 4위로 떨어지며 7년 만에 봄 배구 진출에 실패했고 이정철 감독은 이에 책임을 지고 일선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기업은행은 이정철 감독의 후임으로 프로구단에서 한 번도 감독을 맡은 경험이 없는 강릉여고의 김우재 감독을 선임했다. 기업은행으로서는 제법 큰 모험이었던 셈이다.

마침 김희진은 스테파노 라바리니 감독이 이끄는 대표팀에서 오른쪽 공격수로 좋은 활약을 이어가고 있었고 김우재 감독도 시즌 초반 김희진에게 오른쪽을 맡겼다. 김희진은 작년 10월 20일 KGC인삼공사와의 개막전에서 서브득점 4개, 후위공격6개, 블로킹3개를 기록하며 프로 데뷔 두 번째 트리플크라운을 작성했다. 사실상 데뷔 첫 오른쪽 공격수로의 시작을 화려하게 자축한 것이다.

하지만 기업은행은 개막전 승리 후 내리 4연패를 당하며 부진에 빠졌고 김우재 감독은 김희진을 다시 센터로 회귀시켰다. 강력한 후위공격을 할 수 있는 국가대표 주전 라이트가 후위로 내려가면서 리베로와 교체돼 경기의 절반만 뛰는 신세로 전락한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김희진은 올림픽 예선을 치르면서 종아리 통증이 악화됐고 후반기 9경기를 결장하고 말았다.

공교롭게도 기업은행은 김희진을 다시 오른쪽으로 돌린 22일 도로공사전에서 3-0 승리를 따내면서 탈꼴찌에 성공했다. 물론 도로공사가 최근 6연패를 당하며 팀 분위기가 떨어져 있는 상황이었지만 기업은행이 4라운드까지 도로공사를 상대로 단 1승도 거두지 못했던 것을 감안하면 오른쪽 김희진의 경쾌한 움직임이 셧아웃 승리의 주 요인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물론 어나이의 수비부담을 덜어주고 서브리시브를 강화하려면 김희진을 센터로 두고 백목화가 선발 출전하는 것이 더 옳은 선택일지 모른다. 풀타임 소화 경험이 턱없이 부족한 변지수와 김현지의 센터 포지션 소화 여부도 걱정이다. 하지만 박정아가 떠난 이후 지난 세 시즌 동안 기업은행에 필요했던 것은 김희진의 '높이'가 아닌 폭발적인 '공격력'이었다. 배구팬들은 V리그에서 풀타임으로 활약하는 '오른쪽 공격수 김희진'을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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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배구 도드람 2019-2020 V리그 IBK기업은행 알토스 김희진 아포짓 스파이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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