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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개남 장군
 김개남 장군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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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개남이 처형된 이후 그의 가족과 동학도인들이 많았던 향리의 도강 김씨 문중은 쑥대밭이 되었다.

김개남장군의 부인 전주 이씨는 남편이 붙잡힌 이후 열한 살 된 아들 복술(福述)이를 데리고 구고현 두복리(현 임실군 청웅면 두복리)의 친정아버지가 뒷산 언덕에 파놓은 땅굴에서 수 년을 은신하며 살았다.

이들은 족보에서도 제적되어 변성명하고서야 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부인 전주 이씨는 아들 복술이가 일찍 죽고 그가 남긴 손자 환옥을 키우며 험한 세월을 아흔 살까지 살다가 남편 곁으로 갔다. 손자는 할머니에게서 김개남 할아버지의 얘기를 들으면서 자랐지만, 형편이 어려워 학교를 다닐 수 없었다. 손자 김환옥의 증언.
 
우금티 고개에 세워진 장승, 공주 우금티 동학농민전쟁 기념사업회에서는  이곳에서 매년 장승제를 지내오고 있다 우금티 고개에 세워진 장승, 공주 우금티 동학농민전쟁 기념사업회에서는  이곳에서 매년 장승제를 지내오고 있다
▲ 우금티 고개에 세워진 장승, 공주 우금티 동학농민전쟁 기념사업회에서는 이곳에서 매년 장승제를 지내오고 있다 우금티 고개에 세워진 장승, 공주 우금티 동학농민전쟁 기념사업회에서는 이곳에서 매년 장승제를 지내오고 있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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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가 피난할 적에 도강 김간디 박가로 성을 바꾸고 피난혔다고 혀. 그때 도강 김가라고 말하면 모다 잡아다 죽이는디. 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도 우리 할아버지보고 좋은 소리 한나 안혀. 이 골짜기서 논 마흔닷 마지기 지어가지고 사는디 십만 군사가 뭣이여. 십만 군사를 일주일 먹인게 마흔다섯 마지기 농사가 하나도 없드래.

그러다 군사가 떠나는디 금산면으로 말을 열몇 필 가지고 가서 쌀을 팔어 왔는디 내일 아침이면 조반 먹고 떠날 참이여. 내일 새벽부터 비가 퍼붓어. 그런게 할머니가 복이 없응게 영감 마흔셋에 죽고 "내가 종을 두셋이나 두었단다"고 말해. 편하면 느그 한아씨라 그러고 안 편하면 니 할아배라 그려. (주석 11)

 
수 많은 만장, "다시 피는 녹두꽃  그 역사의 희망" 수 많은 만장, "다시 피는 녹두꽃  그 역사의 희망"
▲ 수 많은 만장, "다시 피는 녹두꽃 그 역사의 희망" 수 많은 만장, "다시 피는 녹두꽃 그 역사의 희망"
ⓒ 변관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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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이던 1994년 '동학농민전쟁 백주년 기념사업 추진 위원회'는 동학농민군 후손들의 증언록 『다시 피는 녹두꽃』을 간행하였다. 김개남이 태어난 집 아래에 살고 있던 손자 환옥도 녹취의 대상이었다. 평생 농사를 지으며 살았고 본인의 말로 일자무식이라고 했다.

우리 큰할아버지(김개남의 큰형)가 우리 한아버지가 몸을 피했다고 여기서 자살했어. 묘가 뒤에 있어. 일전에 파갔어. 김개남 장군은 둘째지(사실은 셋째). 참말로 기가 맥히지. 여태까장 내가 그 소리 안 했어. 우리 큰한아씨가 동생이 그렇게 됐는데 내가 살아서 뭣하냐고 하면서 자살했어. 우리집도 참 우리 한아씨 때부텀 참 똑똑한 사람이 많았어. (주석 12)
 
묘비 '개남장(開南丈)'의 일부 혁명가 김개남에 대한 지금까지의 역사적 평가가 부족하고 잘못돼 있음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 묘비 "개남장(開南丈)"의 일부 혁명가 김개남에 대한 지금까지의 역사적 평가가 부족하고 잘못돼 있음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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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의 성과로 나타난 갑오경장으로 연좌죄를 없앤다고 했지만 허망한 말뿐이었다. 현실은 김개남과 동학혁명 지도자들의 후손을 대역죄인으로 취급하였다. 일제가 국권을 침탈하면서부터는 '불령선인'의 가족으로 낙인되고, 겨우 성씨를 바꿔 유리걸식의 생존이었다.

흔히 독립운동가는 3대가 망한다고 하지만 한말 민족운동가들의 경우 5~6대에 걸쳐 가난과 핍박이 이어졌다. 배우지 못하고 유산이 없어 딛고 올라갈 사다리가 없었다.

김개남의 집안은 부농이었다. 반상의 질서가 강고했던 시대였지만 지방의 부농은 나름대로 사회적 위치에 자리잡고 있었다. 지역의 관리들과 적절히 유착하면 기득권의 유지가 가능하였다. 김개남이 국가ㆍ사회적 모순에 눈 감고 안일한 삶을 택했다면 가족과 가문이 멸문에 가까운 화를 당하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재산도 유지됐을 터이다.

곤란이 막심하지. 마흔다섯 마지기 다 없어져. 기가 맥힌 얘기지. 어쩌다가 임실 가고 남원 가면, 김개남 장군이라고 안혀. 김개남 어쩌고 저쩌고 허지. 내가 김개남 손잔디. 참 쓰잘 떼 없는 소리, 내가 김개남 손자여, 속으로 그러지. 내가 무식헌게 뭔 말을 안혀.

그런데 지금 핵교 교수들도 그때 세상을 모르고, 세상에 국민핵교도 보내야 하고 뭣이라 허는디, 쓸데 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 그때 세상에 개남이 손이라고 하면 다 때려죽일라고 하는디. 정부에서 전봉준이, 김개남, 손화중 떠들고 있으니 내가 활발하게 돌아다니지, 그때 세상에는 우리 식구가 밥만 어떻게 먹지, 어떻게 핵교를 댕겨, 허망한 소리지. (주석 13)


주석
11> 『다시 퍼는 녹두꽃』, 177쪽, 역사비평, 1994.
12> 앞의 책, 178쪽.
13> 앞의 책, 179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동학혁명과 김개남장군‘]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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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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