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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 문화탐방을 하기 위해 추운 겨울 날씨에도 불구하고 전남 광주, 부산, 제주 등 전국에서 40여 명이 모였다.
▲ 길상사 7층 보탑 성북동 문화탐방을 하기 위해 추운 겨울 날씨에도 불구하고 전남 광주, 부산, 제주 등 전국에서 40여 명이 모였다.
ⓒ 박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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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12일 새벽, 몹시도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인 40여 명의 전국 국문학과 신구회장단의 성북동 문화탐방을 이끌며 해설하기 위해 길상사에 불러모았다. 그 며칠 전부터 논문 집필을 위해 밤샘 작업을 한 후 토요일 행사(1박 2일)에도 참석하고 다시 일요일에 자가용을 몰고 달려갔더니 몸에 무리가 왔는지 독감에 걸려 병원을 다니며 3주를 고생했다.

하지만 보람은 매우 컸다. 한국문화예술의 대들보인 장승업, 이태준, 김용준, 한용운, 박태원, 조지훈, 김광섭, 김환기, 최순우, 전형필(간송미술관), 박완서, 운보 김기창 화백 부부 등이 성북동과 그 주변인 돈암동, 보문동에 거주하면서 창작의 열정을 불태웠는데, 이들의 이야기를 풀어내었기 때문이다.

성북동 문화탐방 이야기는 박완서 선생의 보문동 집에서부터 출발한다. 앞으로 3~4년간 박완서의 노년문학을 연구(프로젝트)하고 저서까지 출간해야 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작가 박완서 선생과 많은 인연이 있다. 한국전쟁 당시 불타 없어졌을 것으로 작가도 알고 있었던, 숙명여고 학적부를 발굴해서 <중앙일보>를 통해 공개한 인연이 있다.

박완서의 딸인 수필가 호원숙은 자신의 팔할을 키운 집이 보문동 한옥이었다고 회상한 적이 있다.

"나의 살던 보문동 집은 유난히도 양지바른 집이었다. 1960년대 초반이었다. 초등학교 2학년 때에 충신동에서 보문동으로 이사를 왔다. 서울 사대문 안이었지만 20평도 안 되는 비좁은 한옥에서, 사대문 밖이지만 56평의 한옥은 대궐과 같았다. (...) 무거운 나무의 삐꺼덕 소리를 내며 대문을 들어서면 꽤 넓은 대문간이 있었고 대문간을 지나 마당에 들어서면 화강암의 댓돌을 딛고 마루로 올라갔다. 정남향의 마루는 여름에는 시원했고 겨울에는 더 깊이 볕이 들어 왔다."
 
보문동 한옥마을은 종적을 감추고, 새로 연립주택과 3층 빌라 등이 골목 가득히 들어서 있다.
▲ 박완서의 보문동 한옥집터 보문동 한옥마을은 종적을 감추고, 새로 연립주택과 3층 빌라 등이 골목 가득히 들어서 있다.
ⓒ 박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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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의 보문동 한옥집은 지금은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그 자리에 연립주택, 빌라가 건립되어 전통 한옥마을의 분위기는 사라지고 말았다.

눈이 살짝 뿌리는 가운데 보문동 한옥집을 찾아나섰다. 마침 연립주택 주인이 청소를 위해 밖으로 나왔다. 인사를 나누고 사진을 찍는 이유를 설명했다. 언제 이사를 왔느냐고 물으니 10년 전인 2010년쯤 이 집을 사서 이사를 왔다고 말했다. 지금 문화탐방기를 쓰고 있으니 함께 사진 촬영을 해도 무방하냐고 물었더니 포즈를 취해주었다. 보문동 한옥 근처에는 비구니 사찰로 유명한 보문사가 자리 잡고 있다.
 
비구니사찰로 유명한 보문사의 대웅전인 ‘적멸보궁’이다. 그 옆에는 ‘묘청전’, ’보광전‘ 등이 자리하고 있다.
▲ 보문사 대웅전  비구니사찰로 유명한 보문사의 대웅전인 ‘적멸보궁’이다. 그 옆에는 ‘묘청전’, ’보광전‘ 등이 자리하고 있다.
ⓒ 박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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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는 보문동을 거쳐 송파 신천동 아파트 그리고 아차울 노란집으로 옮겨다니며 주옥같은 단편들을 쏟아내었다. 이러한 이주 과정에서 남편과 서울의대를 다니던 아들을 잃고 그 충격으로 한때 절필을 하기도 했다. 참척의 슬픔을 딛고 일어나 「대범한 밥상」·「환각의 나비」를 비롯한 한국문학사에서 너무도 소중한 30여 편의 '노년소설들'을 펴냈던 것이다.

 
조지훈 시인의 창작공간인 ‘방우산장’에는 마음속에 소를 한 마리 키우면 직접 소를 키우지 않아도 소를 키우는 것과 다름 없다는 방우즉모우 사상을 담고 있다.
▲ 성북동의 ‘방우산장’ 조지훈 시인의 창작공간인 ‘방우산장’에는 마음속에 소를 한 마리 키우면 직접 소를 키우지 않아도 소를 키우는 것과 다름 없다는 방우즉모우 사상을 담고 있다.
ⓒ 박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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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훈은 식민지 시대 말기의 잡지 <문장>에서 시인 정지용의 추천으로 박두진, 박목월과 함께 문단에 데뷔했다. 조지훈의 생가는 삼척에서 그리 멀지 않은 경북 영양에 있다. 하지만 조지훈이 고려대 국문과 교수를 하면서 수많은 단아한 시를 토해낸 공간이 바로 성북동에 있다. 지금은 집터를 표시하는 표석과 '방우산장' 모형만 남아있다. 시인의 창작공간인 '방우산장'에는 마음속에 소를 한 마리 키우면 직접 소를 키우지 않아도 소를 키우는 것과 다름 없다는 방무즉모우 사상을 담고 있다.
 
조지훈 시인이 살았던 집은 사라지고 현재 5층 빌라가 건립되어 있다. 빌라 앞에 승무 시비가 서있어 시인의 창작공간이 현대 문화유적으로나마 존속하고 있다.
▲ 성북동의 조지훈집터 조지훈 시인이 살았던 집은 사라지고 현재 5층 빌라가 건립되어 있다. 빌라 앞에 승무 시비가 서있어 시인의 창작공간이 현대 문화유적으로나마 존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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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훈의 집은 사라지고 현재는 5층짜리 빌라 지어져서 성북동의 옛정서는 사라지고 중·서민층이 거주하는 마을로 변해 버렸다. '수향산방'이 있던 자리 주변의 성북동과는 대조적이다. 그쪽에는 재벌가의 대 맨션과 각국 대사들의 관저들로 구성되어 있다.
 
시집 <성북동비둘기>로 유명한 시인 김광섭의 집터를 알려주는 표석이 서 있다. 표석이 있는 골목길로 300m 정도를 올라가서 뒷골목에 김광섭 시인이 1961년부터 1966년까지 살았던 집이 자리하고 있으나 구주소로는 찾을 수가 없다.
▲ 성북동 큰길거리의 ‘김광섭 집터’ 표석 시집 <성북동비둘기>로 유명한 시인 김광섭의 집터를 알려주는 표석이 서 있다. 표석이 있는 골목길로 300m 정도를 올라가서 뒷골목에 김광섭 시인이 1961년부터 1966년까지 살았던 집이 자리하고 있으나 구주소로는 찾을 수가 없다.
ⓒ 박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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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훈이 살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시인 김광섭이 살고 있었다. 김광섭은 시집 <성북동 비둘기>가 유명하지만, 김환기 화백의 점묘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 시리즈에 큰 영향을 준 시 '저녁에'를 창작한 것으로도 독자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김광섭이 1969년 새로 시집을 출간하면서 당시 뉴욕에 거주하던 김환기·김향안 부부에게 편지와 함께 시집을 보낸 것이 계기가 됐다. 성북동의 심우장 앞의 좁은 비탈길을 따라 올라가면 국민대학교 디자인학과 교수와 학생들이 조성한 북정마을 비둘기공원이 있다. 김광섭시인은 오래전에 작고했지만, 그가 창작한 <성북동비둘기>는 성북동 사람들의 가슴 속에 영원히 살아 있다.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김광섭이 살았던 34번지의 집은 찾을 수가 없었다. 구주소의 집들이 나란히 위치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추운 겨울 날씨 속에 2시간을 찾아 헤맸으나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다만 35번지의 집이 예스러운 한옥 주택으로 되어 있어 1960년대에 김광섭 시인이 성북동에 살았던 분위기는 느낄 수 있었다.
▲ ‘성북동 168 ? 35’ 구주소지에 있는 주택 김광섭이 살았던 34번지의 집은 찾을 수가 없었다. 구주소의 집들이 나란히 위치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추운 겨울 날씨 속에 2시간을 찾아 헤맸으나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다만 35번지의 집이 예스러운 한옥 주택으로 되어 있어 1960년대에 김광섭 시인이 성북동에 살았던 분위기는 느낄 수 있었다.
ⓒ 박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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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섭 시인이 1961년부터 1966년까지 살았던 집터를 찾아보기 위해 구주소를 가지고 추운 날씨에 찾아다녔으나 결국 주변만 맴돌고 찾아내지 못했다. 김광섭 집터라는 표석은 동소문동에서 간송미술관 가는 큰길에 세워져 있으나 거주했던 집 호수는 순서대로 되어 있지 않아서 2시간을 주변을 훑었으나 찾기가 어려웠다. 다만 '성북동 168의 35' 주소의 바로 옆집은 찾아내었다. 아마도 김광섭이 살았던 집도 35번 집과 같은 분위기를 지녔을 것으로 상상되었다.

새벽에 찾아간 길상사에는 무언의 정적과 함께 자야와 법정의 침묵의 소리가 귓전에 들려왔다. 법정의 <무소유>를 읽고 1000억원 가치의 대원각 7000여 평의 땅과 40여 채의 건물을 절을 지어달라고 기부하려고 한 분의 이야기를 당시 신문 기사에서 읽고 큰 감동을 받았었다. 1987년의 자야의 제안을, 법정은 계속 거부하다가 1995년에야 받아들여 길상사를 건립하고 자야(김영한 여사)에게 '길상화'라는 법명을 지어주었다.

이로부터 5년 후 자야는 추위가 닥치는 11월에 "내가 죽으면 눈 많이 오는 날 뼈를 이곳에 뿌려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길상사에는 길상화를 기리는 공덕비와 사당이 세워져 있다. '길상사'라는 이름의 유래는 전남 해남이 고향인 법정이 전남대학교 상과를 중퇴하고 송광사에서 출가를 했는데, 바로 송광사의 옛 이름이 '길상사'였기 때문에 그곳에서 따왔다고 한다.
 
길상사에 1000억대의 재산을 시주한 자야를 기리기 위해 사당과 공덕비가 세워져 있다. 공덕비 옆에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라는 백석 시비도 건립되어 있다.
▲ 길상사 경내의 ‘자야의 공덕비’와 사당 길상사에 1000억대의 재산을 시주한 자야를 기리기 위해 사당과 공덕비가 세워져 있다. 공덕비 옆에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라는 백석 시비도 건립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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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야와 시인 백석과의 인연은 질기고도 길다. 백석은 1935년 11월 <조광> 창간호에 '산지' '주막' '비' '나와 지렝이'의 네 편의 시를 게재한다. 그리고 12월 <조광> 1권 2호에 '여우난곬족' '통영' '힌 밤'의 세 편의 시를 발표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그해 12월 23일 조선권번의 기생 진향이 불쌍한 이를 위해 써달라고 요리집에서 고달프게 번 돈 65원 32전(현재 돈가치로 약 500만 원)을 기부했다(안도현, <백석평전> 86~87쪽)고 <동아일보>는 보도했다. 이 기생 진향이 바로 나중에 백석과 열애를 한 자야다.

백석은 25세였던 1936년 1월에 그렇게도 꿈꿔왔던 첫시집 <사슴>(33편 수록)을 200부 한정판(이동순편, <백석시전집> 연보)으로 펴냈다. <사슴>에 실린 시에 대해 김기림·박용철·이효석은 극찬을 했으나, 사회주의 계열의 임화와 오장환은 "그곳에는 생생한 생활의 노래는 없다. 오직 이제 막 소멸하려고 하는 과거적인 모든 것에 대한 끝없는 애수, 그것에 대한 비가이다. 요컨대 현대화된 향토적 목가가 아닐까?"(임화)라고 혹평을 했다. 하여튼 모던보이 백석은 시집 <사슴>으로 문단의 주류에 진입하고 있었다.
 
김영안 여사는 백석으로부터 이태백 싯귀에서 따온 ‘자야’라는 호를 선물로 받았다. 자야는 전 재산을 기부하면서 “내가 죽으면 눈 많이 오는 날 뼈를 이곳에 뿌려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길상사 회주 법정스님은 길상화를 기리기 위해 경내에 사당을 건립하였다.
▲ 길상사 경내의 ‘자야 사당’ 김영안 여사는 백석으로부터 이태백 싯귀에서 따온 ‘자야’라는 호를 선물로 받았다. 자야는 전 재산을 기부하면서 “내가 죽으면 눈 많이 오는 날 뼈를 이곳에 뿌려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길상사 회주 법정스님은 길상화를 기리기 위해 경내에 사당을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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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에서 기자로 2년 근무한 백석은 함흥의 영생고보 교사로 이직한다. 백석은 요리집에서 있었던 동료교사 송별연에서 기생 진향을 만나서 사랑을 나누게 된다. 

그러나 보수적인 성향의 백석 부모는 진천 출신의 여성과 결혼하라고 강요하고 어쩔 수 없이 결혼한 백석에게 자야는 충격을 받게 되며 만주 신경으로 떠나려고 하는 백석을 따라가지 않고 경성으로 돌아간다. 질긴 인연과 비극적인 운명의 갈림길에서 두 사람은 남과 북으로 나뉘어 죽을 때까지 다시 만나지 못한다. 하지만 자야는 백석을 잊지 못하고 대원각을 기증한 후에도 살던 아파트를 팔아 백석문학상을 제정하라고 유언을 남긴다. 두 사람은 죽어서야 김환기의 점묘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라는 예술 이야기의 주인공이 된 듯하다.

태그:#길상사, #성북동 거주 예술가들, #박완서의 보문동 한옥집터, #백석시인과 자야, #시인 조지훈과 김광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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