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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오마이뉴스>가 올해 창간 20주년을 맞아 '나의 스무살' 기사 공모를 진행합니다. 청춘이라지만 마냥 빛날 수는 없었던, 희망과 좌절이 뒤섞인 여러분의 스무살 이야기를 기다립니다.[편집자말]
사랑하는 큰 조카가 올해 원하는 대학에 입학했다.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의 큰 아들로 4명의 조카들 중 지금으로부터 18년 전 불의의 사고로 가족들과 생이별한 내 어머니께서 유일하게 품었던 손자이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우리 가족들은 큰 조카를 유독 예뻐했다. 그런 큰 조카가 벌써 대학에 입학했다. 어머니께서 봤다면 얼마나 기뻐했을까 생각하니 코끝이 찡해온다.

큰 조카의 입학식이 비록 '코로나19' 때문에 2주 연기됐지만 가족들은 지난주 천안 동생 집에 모여 큰 조카의 입학을 대대적으로 축하했다. 예쁘기만 했고 아직도 어린아이 같기만 한 큰 조카가 어느새 180cm가 넘게 훌쩍 자라 오히려 어른들을 자신의 품에 쏙 들어오도록 껴안은 모습을 보니 흐뭇하면서도 희비가 교차했다.

그런데 일순간 분위기가 싸해졌다. 즐거운 만남에 동생이 갑자기 군대 이야기를 꺼냈기 때문이다. 1년 후 군대에 보내겠다는 말에 훈훈한 가족모임이 일순간 쌔한 분위기로 바뀌었다. 가장 충격을 받은 것은 바로 본인 큰 조카였다. 한편으로는 "어차피 가야 할 군대 빨리 다녀오는 게 낫죠"라면서 담담하면서도 쓴웃음을 보였지만 내심 속은 그렇지 않았을 것이라는 걸 다 알고 있었다.

한참 캠퍼스의 낭만을 즐겨야 하지만 대한민국의 남자라면 꼭 거쳐야 할 의무인 군대에 대한 고민도 함께해야 할 나이 스무 살. 큰 조카의 고민도 여느 스무살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스무살. 고등학생의 티를 벗고 어엿한 성인으로서의 인생을 시작할 터닝포인트다. 그렇다면 스무살의 나는 어떠했을까. 

직업군인의 꿈은 멈추지 않는다

 
 경남과학기술대학교 학군사관후보생이 4일 대학본관 입구에서 권진택 총장에게 '동계 입영훈련 출정 신고식'을 하고 있다.
 경남과학기술대학교 학군사관후보생들 (해당 기사와 관련 없습니다)
ⓒ 경남과학기술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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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12월 마지막 대학입학 학력고사가 치러졌다. 1993년부터는 당시에는 생소했던 수학능력시험으로 바뀌는 전환기였다. 그래서일까. 치열한 눈치작전이 펼쳐졌다. 선지원 후시험인지라 마지막 지원 마감시간 까지 무전기를 동원한 원서접수 전쟁이 벌어졌다. 학과와는 무관하게 조금이라도 경쟁률이 낮은 곳에 지원하기 위해서다.

이미 지원학교와 지원학과를 마음속에 정한 나였지만 치열하게 펼쳐지는 눈치작전을 직접 현장에서 지켜보니 원서접수 창구 앞에서 망설여졌다. 이쪽저쪽을 기웃거리기도 했다. 막상 지원서를 접수하려다보니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그렇게 원서접수 마감 시간이 다가왔고, 나는 본래 마음속에 정했던 과에 지원서를 접수했다.

학교에서 담임선생님과 함께 고민 끝에 2단계를 낮춰 하향 안전지원을 했다고 생각한 터라 자신감도 있었지만 막상 접수하고 발표된 경쟁률을 보고는 까무러치지 않을 수 없었다. 37대 1. 헉 소리가 났다.

사실 학력고사 두 달여 전에 직업군인의 꿈을 이루기 위해 해군사관학교에 이미 한 번 응시했었다. 그 당시에도 자신감은 있었지만 '38대 1'이라는 경쟁률에 주눅 들어서인지 고배를 마신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왜 지원하는데 마다 경쟁률이 30대 1이 넘을까 억세게도 운이 없구나!'하는 자책감도 들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해군사관학교에 낙방하면서 한차례 꿈은 좌절됐지만 높은 경쟁률에서 살아남아 '대학 합격 통지서'를 받아들었으니 그리 억세게 운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높은 문턱을 넘어 어렵게 들어간 대학. 하지만 원하는 과도 아닌 탓에 공부는 뒷전이요, 캠퍼스의 낭만을 즐기는 데에만 관심이 있었다. 친구들과 어울리며 캠퍼스 잔디밭에 앉아 낮술을 마시고, 당구장에 가서 내기 당구도 치고, 내기 당구에서 이긴 친구가 산 술을 마시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지내던 어느 날 운명 같은 안내문이 눈앞에 나타났다. 어릴 적부터 꿈꿔왔던 장교로서의 꿈을 이룰 수 있는 기회가 다시 찾아온 것.

나는 곧바로 모집 안내를 낸 학군단을 찾았다. 구체적인 자격 조건을 꼼꼼히 확인하고, 향후 시험 일정도 메모했다. 이제부터는 나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체력측정에 대비한 관리가 필요했다. 좋아하던 술도 합격의 순간까지는 끊기로 했다.

매일 아침 운동장을 돌며 합격의 순간만을 생각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운명의 날이 다가왔다. 왕복달리기, 팔굽혀펴기, 턱걸이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무난히 기준을 넘어섰다. 마지막 남은 1.5km달리기. 가장 자신 없는 종목이었다. 그렇게 연습했지만 도무지 기록을 끌어올릴 수 없었다.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안간힘을 냈다. 하지만 역시 다른 동기들에 비해 역부족이었다. 다행히 과락이라는 기준이 없어 탈락하지는 않았다. 아쉬움이 많이 남았다. 1.5km 달리기 때문에 또 다시 꿈이 좌절되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위기는 또 있었다. 지금은 세종시에 편입됐지만 당시 충남 연기군에 위치해 있던 국군병원에서 시행했던 신체검사. 부모님께서 물려준 타고난 시력과 청력, 그리고 색맹 검사에서는 무난히 통과했다. 남은 건 키였다. 커트라인에 딱 걸리는 키여서 불안했다.

키를 재러 올라가기 전 불안해하던 나와 비슷한 키의 친구와 눈길이 오갔다. 꼼수를 쓰자는 눈빛이었다. 신체검사에서 꼼수를 쓸 수 있을까. 다행히 양말을 신고 키를 쟀기 때문에 약간의 꼼수는 가능했다.

휴지를 두툼하게 말았다. 양말을 벗고 뒤꿈치에 넣었다.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신장계에 올랐다. 머리를 찍고 올라간 결과가 측정자의 입에서 흘러 나왔다. 심장이 터지려는 순간 측정자의 입에서 '통과'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다 됐구나! 드디어 꿈이 내 앞으로 왔구나!'

면접까지 마치고 마침내 최종 합격자가 발표되던 날. 함께 시험을 치른 동기들과 학군단을 찾았다. 합격자 명단이 붙어 있는 학군단 앞 게시대가 조금씩 눈앞에 가까워졌다. 그러면서 하필이면 1년 전 해군사관학교 합격자 발표를 보기 위해 대전병무청을 찾았던 기억이 오버랩됐다. 불길했다. 합격자 발표를 보기 위해 함께 학군단을 찾았던 동기에게 대신 내 이름이 있는지 봐 달라고 부탁했다.

"있다. 축하한다"
"너는?"
"나도 있다"
"축하한다"


그렇게 쫄깃했던 장교의 꿈은 합격이라는 영광과 함께 내 품 안으로 들어왔다. 그렇게 나의 스무살은 그야말로 '꿈은 이루어진다'는 말처럼 직업군인을 꿈꿔왔던 내 인생의 길라잡이가 되어 주었다.

그리고 취업전선에 뛰어들기 위해 밤낮으로 도서관에 몸을 맡긴 친구들과는 달리 이미 직업군인의 길이 열린 나로서는 그야말로 대학생활은 환상 그 자체였다.

꿈은 이루어진다
 
군생활 동안 희노애락을 함께 한 동기들 스무살의 꿈을 이룬 동기들. 어느새 임관 20년이 훌쩍 넘어 중년이 됐다. 아직 군에 남아 있는 동기들은 중령, 대령 계급장을 달고 꿈을 이어가고 있다. 사진은 지난 2017년 7월 임관 20주년을 맞아 한 자리에 모인 동기들. 맨 앞줄 왼쪽에서 세번째가 필자다.
▲ 군생활 동안 희노애락을 함께 한 동기들 스무살의 꿈을 이룬 동기들. 어느새 임관 20년이 훌쩍 넘어 중년이 됐다. 아직 군에 남아 있는 동기들은 중령, 대령 계급장을 달고 꿈을 이어가고 있다. 사진은 지난 2017년 7월 임관 20주년을 맞아 한 자리에 모인 동기들. 맨 앞줄 왼쪽에서 세번째가 필자다.
ⓒ 김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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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간의 대학생활을 마치고 1997년 4월 마침내 꿈을 향한 도전이 시작됐다. 장교로서 첫 시작으로 대구의 영천에 위치한 3사관학교에 입교한 것. 12주의 교육만 이수하면 그토록 원하는 '5만 촉광 다이아몬드'가 박힌 육군 장교로서 임관하게 된다.
  
1997년 6월 임관 전 사실상 마지막 과정이자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유격훈련까지 무사히 마친 나는 부모님이 직접 계급장을 달아주며 자랑스러워하는 육군 소위로 임관했고, 꿈도 이뤘다.

육군 장교로서 중부전선 최전방인 육군 백골부대에서부터 705특공연대, 6포병여단, 육군훈련소를 마지막으로 7년간 군 생활을 한 뒤 전역하면서 지금은 비록 스무살의 꿈이 멈췄지만, 1993년 나의 스무살은 내 인생에서 영원히 기억될 선명한 칼라사진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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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의 지역신문인 태안신문 기자입니다. 소외된 이웃들을 위한 밝은 빛이 되고자 펜을 들었습니다. 행동하는 양심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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