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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이 영화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랫동안 하지 못한 말.
나도 네 꿈을 꿔."

-영화 <윤희에게> 극 중 윤희의 대사 

우리는 트랜스젠더 군인의 복무를 여군에 대한 잠재적 위협과 그들이 느낄 불안으로 설명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왜 한 정체성을 가진 노동자에게 주어지는 평등이 다른 정체성을 가진 노동자를 위협하는 것으로 상상될까? 왜 일터의 평등이라는 주제가 그 안에 속한 모든 구성원의 권리와 평등을 향상시키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누군가에게 한정되는 특권 혹은 다른 누군가를 향한 침해로 축소되는 것일까?

영화 <윤희에게>는 이렇게 서로 다른 것처럼 보이는 정체성의 문제가 어떻게 한 사람의 삶에서 나누어질 수 없는 문제로 엮여있는지, 그리고 삶의 변화를 만들어가는 존재에게 한 가지 질문으로 얽혀있는지를 보여준다.

<윤희에게>는 20년 전 연인이었던 윤희와 쥰이 편지를 매개로 다시 만나게 되는 과정을 그리는 영화다. 그런데 이 재회의 과정은 윤희와 쥰 둘의 의지보다는 각각의 주변인물들의 조력으로 성사되는 대단히 수동적인 만남이다. 수동적이기 때문에 오히려 운명적으로 보이는 이 만남은 심지어 한국과 일본이라고 하는 국가의 경계를 넘어서 이루어지는데, 일본에 있는 쥰이 부치지 못한 편지를 쥰의 고모가 우연히 보고 우체통에 넣는다.

그리고 한국에 도착한 편지를 윤희의 고등학생 딸 새봄이 먼저 발견하고, 엄마인 윤희에게 수능이 끝난 기념으로 편지의 발신지로 해외여행을 가자고 제안한다. 일본으로 여행을 떠난 모녀의 뒤에는 새봄의 남자친구가 몰래 동행하는데, 그가 쥰의 집과 고모의 카페 등 동태를 살피며 새봄이 둘의 '우연적인' 만남을 계획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윤희에게>의 공식 포스터
 <윤희에게>의 공식 포스터
ⓒ 영화 <윤희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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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희에게>의 마지막 장면은 암전된 상태에서 윤희가 "나도 네 꿈을 꿔"라고 말하는 것에서 끝나는데, 이 말은 영화의 시작점에 나오는 쥰의 편지에 대한 응답이다. 이 대사는 두 가지 점에서 중요하다. 첫 번째는 윤희가 이제껏 꿈이라는 무의식적이고 간접적인 방식을 통해서만 쥰을 상상해왔다는 것이고, 두 번째로는 억지로 자기 삶을 통제해왔던 친오빠를 떠나 하고 싶은 일을 찾게 되고 쥰에게 '나 역시 그렇다'라는 대답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 즉 윤희가 스스로 '형벌'이라고 표현했던 자기 삶에서 떨어져 나올 용기를 갖게 되었다는 점이다.

윤희가 '형벌'이라고 표현했던 자신의 삶은 어떤 것이었을까? 일본에 있는 쥰을 만나기 전까지, 영화의 도입부에 해당하는 장면들에서 새봄은 계속 윤희에게 어떤 말들을 던진다. 어느 날 저녁을 먹고서 새봄은 이런 저런 말을 거는 데, 이때 새봄이 윤희에게 대화를 시도하는 장면들에서 문제가 되는 건 대화의 내용이 아니라, 말이 전달되지 못하는 상황이다.

윤희는 새봄의 말을 계속 듣지 못한다. 극 중에서 계속 윤희가 저녁거리를 치우며 설거지하는 물소리가 강하게 들리고, 이 세찬 물소리 속에서 무어라고 말을 거는 새봄의 목소리가 몇 번씩 들리고 나서야 윤희는 수도꼭지를 닫고 새봄에게 고개를 돌린다. "뭐?" "너 뭐라고 했니?"

새봄은 자신이 대학생이 되면, 서울로 떠날 것이고 한 번 떠나면 고향에는 잘 오지 않을 것이고, 엄마의 서운한 반응은 자신에게 마음의 짐이니 표현하지 말라는 내용을 전한다. 온 몸이 피곤한 와중에 이런 말을 듣고 서운한 윤희는 이내 출근을 위해 머리를 말리고, 이번에는 엄청나게 큰 헤어드라이기 소리가 화면을 다 먹어버리는데, 간간히 뭐라고 말하는 새봄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렇게 정신이 하나도 없는 와중에 새봄은 또박또박 말을 전한다. 수능이 끝난 기념으로 같이 일본 여행을 가자고, 다른 애들도 다 엄마랑 여행을 간다고. 정신없고 피곤한 와중에 이런 얘기는 윤희의 귀에 잘 들리지 않는다. 윤희는 머리를 다시 말리고, 이내 침대에 누워 어떤 생각들을 한다.

이렇게 영화 <윤희에게>는 딸과 먹은 저녁식사의 그릇들을 설거지하고, 출근을 위해 밤에 머리를 말리고 하는 일상의 단계들을 시끄러운 소음으로 표현했는데, 집 밖의 공간에서도 이 소음은 지속된다. 공장 급식실로 출근해 배식을 하는 장면에서도 윤희는 큰 소음 속에 놓인다.

물론 영화가 표현적으로 강조한 큰 소리들만 소음인 것은 아니다. 이혼한 전 남편이 비타민이 든 봉다리를 손목에 걸고 집에 찾아오는 퇴근길, 급식실로 가는 봉고차를 기다리는 무리 속의 윤희, 이런 장면들은 조용하게 흘러가더라도 윤희에게 형벌처럼 겪어내야 하는 또 다른 소음이다.
 
2019년 개봉한 영화 <윤희에게>의 포스터
 2019년 개봉한 영화 <윤희에게>의 포스터
ⓒ 영화 <윤희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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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음 속에서 말을 들을 수 없는 상태에 놓인 사람에게 적혀진 편지란 얼마나 깊은 것이었을까. 윤희는 우편함에서 오랜만에 일본어로 쓰여진 주소를 보게 되고, 그대로 아파트 출입문 불이 꺼질 때 까지 서서 글자들을 읽는다. 다음날, 윤희는 급식실 영양사에게 휴가 관련 문의를 했다가 휴가를 가면 일자리는 남아있지 않을 거라는 냉대만 듣게 된다.

성실하게 일해왔으나 가장 기초적인 요구도 묵살 당한다는 사실에 모욕감을 느낀 윤희는 그대로 일을 관두고 떠난다. 그리고 놀랍게도 일본으로 무대가 옮겨진 다음부터, 눈이 무릎까지 오는 마을에서 더 조용할 수 없을 만큼 고요한 나날이 시작된다.

장남만 대학에 보낸 집안에서 엄마의 미안함으로 진학 대신 필름카메라를 받았던 여성으로써의 삶, 쥰을 사랑한다고 말했던 고등학생이 집안의 반대로 오빠가 소개시켜준 사람을 만나 억지로 결혼하게 된 퀴어로써의 삶, 다시 오빠가 소개시켜준 급식실에서 일하다 연차 한번 달라는 말에 냉대를 당한 비정규직 노동자로써의 삶, 이런 각각의 정체성들은 윤희가 자기 삶을 변화시키는 과정에서 연관된 문제들로 만난다. 결과적으로 일본에서 돌아온 윤희는, 대학 진학을 하는 새봄과 함께 고향을 떠나고 오빠와도 결별한다.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한 뒤, 작은 식당을 내고 싶고 그러기 위해 유명한 식당에서 일을 배울 거라는 목표를 세운 윤희가 자기소개서를 들고 식당 문을 두드리는 마지막 장면에 와서야, 영화를 시작하게끔 한 쥰의 편지에 대한 응답이 음성으로 전해진다. 마지막 대사이자 (쥰에게 쓰여진) 진정한 첫번째 응답, '언젠가 딸에게 네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될까', '나도 네 꿈을 꿔' 라는 말은 윤희가 새로운 삶을 겪으면서 이전의 '형벌'들에 대해 어떤 대답들을 만들어낼지 기대하도록 만든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활동가 김지안 님이 작성하셨습니다. 또한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에서 발행하는 잡지 <일터> 2월호에도 연재한 글입니다.


태그:#윤희에게, #퀴어노동자, #일터,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문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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