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고 싶은 거 할 만큼 했으면... 고생했다. 정배야. 이제 공부해서 남 주자!"

15년의 프로 생활 동안 빛보다는 그늘에 머문 시간이 더 많았던 투수가 개인 SNS를 통해 스스로에게 남긴 말이다. 2005년부터 작년까지 두산 베어스와 SK 와이번스를 오가며 활약했던 투수 박정배가 작년 시즌을 끝으로 현역 생활을 마감하기로 결정했다. 박정배는 야구를 처음 시작했던 공주 중동 초등학교부터 현역 생활 연장을 위해 마지막으로 선택했던 질롱코리아까지 자신이 속했던 팀을 모두 태그하며 야구인생을 돌아봤다.
 
 9회말 2사 이후 역전패를 허용한 SK 마무리 박정배

박정배 선수의 모습. ⓒ SK 와이번스

 
작년 시즌이 끝나고 SK의 보류 선수 명단에 포함되지 못하며 방출을 당했던 박정배는 작년 12월 호주 프로야구 질롱코리아에 합류했지만 끝내 현역 선수로서 커리어를 이어가지 못했다. 통산 373경기에서 28승 23패 20세이브 59홀드 평균자책점 4.83의 성적을 남긴 박정배는 모교인 공주중학교의 투수 인스트럭트와 후배가 운영하는 트레이닝 센터의 피칭지도를 병행하며 제2의 야구인생을 구상할 예정이다.

SK 이적 후 프로 입단 8년 만에 잠재력 폭발한 '피콜로'

동명이인인 '도루왕' 박찬호(KIA 타이거즈)를 제외하고 박정배처럼 '코리안 특급' 박찬호와 공통점이 많은 야구 선수를 찾는 것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1982년 충남 공주에서 태어난 박정배는 초중고등학교를 거쳐 한양대에 입학한 것까지 '코리안 특급' 박찬호의 행보와 정확히 일치한다. 게다가 박찬호와 성도 같아 친척이라는 오해도 많이 받았지만 실제로 박찬호와 박정배는 고향 선·후배 사이일 뿐 친척 관계는 아니다.

2005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2차 6라운드로 두산에 지명된 박정배는 시속 145km를 넘나드는 빠른 공을 앞세워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당시 두산에는 정재훈, 이재우, 이용찬, 고창성 같은 좋은 불펜 투수들이 즐비했고 박정배는 7년 동안 단 2승만 기록한 채 보류 선수 명단에서 제외됐다. 1군 경험이 미미한 선수가 서른이 넘은 나이에 구단에서 방출을 당했다는 것은 곧 은퇴가 유력하다는 의미다.

실제로 박정배 역시 모교인 공주고의 코치 자리를 알아보며 제2의 인생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박정배는 이만수 감독의 추천으로 SK에 입단 테스트를 받고 합격해 현역 생활을 이어갔다. 2012년 37경기에 등판해 4승 3패 3홀드 3.14로 SK의 1군에 자리 잡은 박정배는 2013년 5승 2패 14홀드 1.65로 리그를 대표하는 셋업맨으로 떠올랐다. 2013시즌 리그에서 10개 이상의 홀드와 1점대 평균자책점을 동시에 기록한 불펜 투수는 박정배가 유일했다.

하지만 SK 이적 후 2년 동안 불펜 투수로서 126.1이닝을 소화한 박정배의 어깨는 결국 탈이 나고 말았다. 박정배는 2014시즌 셋업맨과 마무리를 가리지 않고 등판하다가 어깨부상을 당하며 수술을 받았다. 1년의 재활 끝에 마운드로 돌아온 박정배는 2012, 2013시즌에 선보였던 날카로운 구위를 잃은 채 2015년 2승 2패 2홀드 5.33, 작년 시즌 2승 3패 2세이브 11홀드 5.40에 그치며 평범한 투수로 전락했다.

2012~13년 박희수, 정우람(한화 이글스)과 함께 SK 불펜의 핵심으로 활약했던 박정배는 이후 3년 동안 부상과 부진이 겹치며 1군에서 만족할 만한 성적을 내지 못했다. 박정배는 채병용만큼 경험이 풍부하지도 않고 서진용처럼 젊은 선수도 아니며 좌완 김태훈이나 사이드암 김주한처럼 투구유형의 이점을 가진 투수도 아니었다. 하지만 박정배는 방출과 수술 등 많은 고난을 견뎌낸 남다른 근성을 지닌 투수였다.

질롱코리아 입단해 현역 연장 의지 보였지만... 끝내 은퇴 결심

박정배는 트레이 힐만 감독(마이애미 말린스 주루코치)이 부임한 2017년 61경기에 등판해 5승 3패 7세이브 16홀드 3.57의 성적으로 SK불펜의 중심으로 맹활약했다. 실제로 2017년 박정배는 SK 불펜 투수들 중에서 홀드 1위, 세이브 2위, 경기 수 2위, 이닝 2위를 기록하며 힐만 감독의 확실한 눈도장을 찍었다. 만약 2017년 SK 불펜에 박정배가 없었다면 가을야구 막차 티켓은 기대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2018년 SK의 투수조 조장을 맡은 박정배는 시즌 초반 힐만 감독으로부터 팀의 마무리 투수로 낙점받았다. 박정배는 5월 중순까지 9세이브를 기록했지만 평균자책점이 6점대까지 치솟으면서 불안함을 노출했고 결국 마무리 자리에서 내려와 추격조로 밀려나고 말았다. 그리고 2018년 11월 5일 한국시리즈 2차전에서 마지막 투수로 등판해 1이닝 무실점을 기록한 것이 결과적으로 박정배의 현역 생활 마지막 불꽃이 되고 말았다.

2018년 SK는 박정배의 활약 없이도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고 박정배는 염경엽 감독이 부임한 2019시즌 주요 전력에서 배제되고 말았다. SK는 박정배가 주역으로 활약하지 못한 작년 시즌 세이브왕 하재훈, 홀드2위 서진용, 전천후 좌완 김태훈 등을 앞세워 강력한 불펜진을 구축했다. 반면에 팀 내 최고참 투수 박정배는 20경기에 등판해 1승 1패 1홀드 10.07로 프로 데뷔 후 최악의 성적을 기록했다.

작년 가을야구 엔트리에도 포함되지 못한 박정배는 시즌이 끝나고 FA 자격도 포기했지만 SK 구단은 박정배에게 재계약이 아닌 은퇴를 권유했다. 하지만 현역 연장을 원했던 박정배는 방출을 선택했고 호주리그의 질롱코리아에 입단하며 새로운 진로를 모색했다. 박정배는 질롱코리아에서 16경기에 등판해 2승 2홀드 3.91의 준수한 성적을 올렸지만 끝내 박정배를 찾는 구단은 나타나지 않았고 결국 은퇴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많은 선수들이 화려한 은퇴식과 영구결번 등을 꿈꾸며 프로생활을 시작하지만 실제로는 대다수의 선수들이 소속팀도 없이 쫓기듯 은퇴를 결정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박정배 역시 새 팀을 구하지 못해 쓸쓸하게 은퇴하는 많은 선수 중 한 명에 불과하다. 하지만 많은 야구팬들은 깡마른 체구에도 씩씩하게 마운드에 올라 묵직한 속구를 던지던 'SK의 리베라'이자 '야구계의 피콜로' 박정배를 오래 기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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