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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독을 권한다. 어떻게 살 것인가. 인생, 자녀교육, 투표에 대한 생각이 근본적으로 달라질 것이다."  

<정희진처럼 읽기>에서 작가의 강력한 권유에 이끌려 책을 폈다. 작가는 '공포', 한 단어로 정리해서 이야기를 끌고 간다. 그러나 나는 경제학 분야도 새롭고 내용도 충격적이라 한 단어만으로 압축해서 풀어내기 어렵다. <자본론> 이후 가장 많이 팔린 경제학서라는 평을 받는 책의 무게를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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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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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우리에게 번역 소개된 책은 권력이 자신들의 성을 어떻게 공고히 하는지, 사경제가 자신들의 부를 어떤 방식으로 지켜내는지에 관해 적나라하게 고발한다. 부와 권력의 완벽한 이분법, 나누고 구분하고 배척하고 멸시하고 소외시키는 모든 것들에 관한 냉정한 고찰과 권력과 부의 작동 방식, 그들의 사고의 패턴, 교묘한 술책, 허술한 사회안전망을 견고한 것처럼 포장하는 기술과 위선을 볼 수 있다.

아무도 인식하지 못한 채로 다가오는 경제적 공포에 대해 저자는 인간의 선택에 달려 있다고 말하지만 낙관론은 아니다. 오히려 비관에 가깝다. 노동의 장소와 경제의 장소가 하나가 된 지점, 수많은 노동자들이 경영자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존재였던 그 세계는 이미 사라졌다고 말한다.

현재의 시대는 노동의 세계를 성가신 '기생충' 같은 것으로 취급할 뿐이라고. 노동자 계급은 취약투성이들이고 '노동 탄력성'이라는 말은 세계의 결정권을 지닌 자들이 만들어 낸 일부의 헤게모니이다. 여기에, '정의롭다는 사람들의 논리'와 '이론가들의 신중함', '선하고 덕망 있는 자들이 담담한 태도의 방관'이 그들의 결정을 거들었다고 말한다.
 
"수익성을 올리는 데 이용할 만한 가치가 없는 자들의 삶도 과연 <유용>할까?"라는 질문이 되풀이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질문 또한 "살아갈 권리를 갖기 위해서는 살아남을 수 있는 <자격>이 필요한가?"라는 질문의 반향이다. 이 질문에서는 뭔가 두려움이 새어 나온다.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어서 정당화된 이 공포는 쓸모없는 잉여 존재라고 인정된 수많은 인간들을 보지 않으면 안 된다는 데서 오는 공포이다.

열등한 존재나 버림받은 존재가 아니라, <쓸모없는 잉여 존재>라고 평가된 사람들. 그래서 해로운 존재로 낙인찍힌 사람들... 이런 판정이 벌써 입 밖으로 나와진 것은 아니다. 말로 내뱉아진 적도 없고, 아마 의식적으로 생각되어 본 일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지 않은가!

이미 노동시장은 추상적이고 비인간적인 세계경제의 헤게모니에 잠식되어 있다고 저자는 진단한다. 그리고 어떠한 집단도 이러한 문제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구직자는 수치스럽고 위험한 존재이며, 그들을 위한다는 제도는 이미 길바닥보다 더 냉랭하다고 말한다. 잔인한 부조리다.

헤게모니를 구축한 그들도 '불상한 사람들을 보면 눈물을 흘리며 가난에 눈물을 훔친다'고 한다. 그 순간 그들은 자신들을 완벽하게 '장발장'과 '코제트'로 빙의한다. 이들은 국가를 움직이는 힘으로서의 '장발장'이 되고, 정작 현실이 '장발장'이고 '코제트'인 사람들은 자신의 실제와 너무 같아 오히려 동조하지 않고 덤덤하다.

무관심에 대해서도 말한다. 무관심이 "해롭고 불결한 권력의 남용과 탈선을 허용해 준다"라고, 우리가 사는 "20세기는 그러한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비극적인 증인"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어떤 프레임에 완벽하게 포섭된 후에야 수정 불가능한 상황에서 간신히 깨닫게 되는 일들이 많다. 국정농단이나 사법권의 남용 등에서 확인하듯이 뒤늦은 깨달음은 공포 그 자체다. 그리고 그러한 프레임을 완벽하게 만들어 놓은 집단은 공권력뿐만 아니라 사경제의 주도권을 잡고 있는 이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손에 들어간 것을 빼앗기지 않는 장치들을 치밀한 과정을 통해서 구축했다고 작가는 고발하며 마치 현재 우리 사회의 상황을 눈으로 보듯 말하고 있다.
 
무관심이란 잔인한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은 매우 활동적이며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무관심은 무엇보다도 해롭고 불결한 것인, 권력의 남용과 탈선을 허용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20세기는 바로 그러한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비극적인 증인이다. 하나의 제도를 만드는 데 있어서 국민들로부터 무관심을 얻어냈다는 것은, 부분적인 동의를 얻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승리를 거두었음을 뜻한다. 사실 어떤 체제가 대중적인 동의를 얻게 되는 것은, 다름 아닌 대중들의 무관심에 의해서이다. 그때의 결과가 어떤 것인지는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는 바이다.

영화 <기생충>은 제목부터 한국 사회의 향기가 진하게 배어 있다. 모든 것을 벌레로 치환하는 언어의 마술을 보여주는 세상에서 인간이 벌레가 되는 현실을 고발한 우리의 영화가 세계무대를 휩쓸고 있다. 영화 <기생충>의 현실은 저자가 말하는 잉여인간과 정확히 맞닿아 있다. 인간을 이용하려는 사람들과 이용당할 가치마저 상실한 사람들. 이미 잉여 존재일지도 모르는 등장인물들.

권력은 이미 그들의 가치는 물론 존재 자체를 쓸모없다고 판단하였을지도 모른다. 영화에서의 계획은 모두 실패한다. 그래도 우리는 계획을 세워봐야 하지 않을까. 무계획의 세대가 지금까지 대물림되었다면 이제는 계획이 있는 세대가, 미래에 그 계획이 어찌 흘러가는지 지켜보는 작은 희망이라도 가져봄직 하지 않을까 싶다.

앞으로의 상황이 암담하다고 고백하려는 순간, 영화 <기생충>을 통해 희망을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책에서 말한, 결정권자들이 단단하게 구축한 은밀한 헤게모니에 작은 구멍 하나는 뚫린 셈이라고. 영화 <기생충>이 고발하는 현대 사회를 세계인들 모두가 공감하고 있으니 말이다. 시작은 했으니 그다음 단계로 나아가서 공고한 듯 보이는 헤게모니에 대처하는 방법,

첫째, "사고하라! 사고할 때만이 비평과 각성이라는 중요한 무기를 사용할 수 있다." 노동자와 가난한 사람들의 의식이 깨어나는 것을 끊임없이 차단하는 음모로부터 벗어날 것.

둘째, 투표하라! 이들은 '자신들의 이슈에 무관심을 이끌어 낸 것 자체를 부분적인 동의보다 훨씬 더 커다란 승리로 받아들인다는 사실'을 인식한다면. 총선이 가깝게 다가왔고 만 18세에게 투표권이 주어졌다. 그들은 자신들이 살아갈 미래와 삶을 위해, 또한 권리를 위해 투표권을 행사해야 한다.
 
공포에 맞설 만한 무기는 없다. 우리 의식의 각성, 사실의 정확성에 대한 감각, 주의력의 요구, 지성적인 노력, 이러한 것들을 제외하고는……. 이런 무기들은 적어도 우리들이 자율권을 소유할 수 있게 해 준다. 다른 사람들의 견해에 흡수되지 않고, 스스로 자기 자신을 생각하여 자신이 설 자리를 만들고 다른 사람들의 비전을 통하지 않고 스스로 자기 자신을 인정하는 능력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권력과 사경제의 주도권을 잡은 이들을 향해 설마 이 정도까지? 이만큼이나? 질문하지 말라.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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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현장을 떠나니 다양한 삶의 모습이 보입니다. 순간을 포착하고 싶고, 책에 대해서도 사회의 이야기도 글로 전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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