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데미상 수상 발표후 기뻐하는 봉준호 감독

아카데미상 수상 발표후 기뻐하는 봉준호 감독 ⓒ CJ엔터테인먼트

 
"디 오스카 고스 투… 패러사이트(The Oscar goes to… Parasite)!"

제92대 아카데미 수상작으로 영화 <기생충>이 호명되자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당일 네이버 검색창에는 '봉준호'와 '기생충'이 종일 오르내렸고, 101년 만에 한국 영화가 아카데미 수상작으로 올랐다는 것에 대한 축하의 말들이 쏟아졌다. 문재인 대통령도 "영화 한 편이 주는 감동과 힘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우리 영화인들이 마음껏 상상력을 펴고 걱정 없이 영화를 제작할 수 있도록 정부도 함께하겠다"라는 축하의 메시지를 보냈다.

그 자리에는 이미경 CJ그룹 부회장도 동석하고 있었다. 그는 봉준호 감독과 함께 무대에 올라 "한국영화 보러 가주시는 분들 모두가 영화를 지원해준 분들"이라는 감사의 말을 전했다. CJ 그룹이 영화의 주요 투자자 중 하나였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그럴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어쩐지 설명되지 않는 불쾌함이 곧바로 따라붙었다. 아카데미 시상식 4관왕 그리고 CJ 부회장의 축하의 말. 그 어색한 풍경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가난과 모멸감을 그리는 영화 <기생충>이 대기업 부회장의 축하 말과 너무 어울리지 않은 까닭이었다.

<기생충>을 극장에서 봤다. 영화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소감이 있겠지만, 기생충은 내 기준에서 좋은 영화였다. 동시에 아쉬운 영화이기도 했다. 단지 영화가 '한국 사회에 존재하는 부의 불평등' 문제를 고발했기 때문은 아니다.

많은 이들이 반지하와 2층집이라는 공간을 주목했지만 나는 가난한 가족이 마시는 맥주를 주목했다. 필라이트만 먹는 가난한 가족이 영화 중반 이후 삿포로를 마시는 모습, 그리고 그 사이에서도 가족들에게 삿포로를 주고, 자기는 필라이트를 먹는 엄마의 모습. 그 모습이 지금의 사회를 반영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가난은 반지하에 사는 것일 수도 있지만 삿포로를 못 마시고 필라이트 맥주를 마셔야 하는 것일 수 있다는 점. 조금 여유로워진 후에도 누군가는 필라이트 맥주를 마셔야 한다는 점. 그리고 그 맥주를 마시는 사람이 엄마라는 점. 가난의 모습을 '반지하'라는 공간 이외의 모습으로 보여주려는 의도처럼 느껴졌다. 끝까지 우울하게 끝날 수밖에 없던 영화가 우울하면서도 좋았던 것은 바로 그 우울함을 세밀한 묘사를 통해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편으로 오로지 아들과 아버지의 시각,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만이 중심이라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았다. 돌로 머리가 박살이 나도 아들은 살지만, 칼에 찔린 딸이 죽어야 했던 이유는 죽어야 했던 이가 유일하게 이 영화에서 희망이나 변화를 만들 가능성이 있었던 이유였다. 이 모든 일을 기획하고 실행한 것은 딸이었다. 똑똑하고, 한편으로 영악했기에 그가 살아남았다면 또 다른 스토리가 이어졌을지도 모른다. 

가난한 사람에게 필요한 진짜 이야기 
 
 기생충의 한 장면. 엄마 역할을 맡은 배우만 해외 맥주 대신 필라이트 맥주를 마시고 있다.

기생충의 한 장면. 엄마 역할을 맡은 배우만 해외 맥주 대신 필라이트 맥주를 마시고 있다. ⓒ 봉준호

 
나는 봉준호 감독의 전작인 <옥자>나 <설국열차>가 <기생충>보다 좋았다. 그 이유는 <옥자>나 <설국열차>가 '아버지의 좌절' 이외의 메시지를 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누군가는 약자들의 연대를, 누군가는 변화의 가능성을, 누군가는 혁명을, 누군가는 영화 속 소수자들을 주목했을 것이다. <기생충>은 현실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좋은 영화였지만, 그곳에서 이야기가 멈추었기에 아쉬운 영화가 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절망만을 그리는 영화는 잘 보지 않게 되었다. 뻔한 결말이지만 평범한 사람들이 힘을 합쳐 고난과 역경을 해결해나가는 스토리를 더 좋아하게 되었다. 기생충이 가난한 사람들끼리 힘을 합쳐 사회를 바꾸는 영화였다면 어땠을까. 아마 지금과 같은 인기는 없었을 것이다. 대기업 투자도 없었을지도 모른다.

많은 관객들은 기생충을 본 후 자리에서 일어나 "한국 사회가 이렇구나. 좌절스럽다."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영화관 바깥에 나가자마자 사라졌을 것이다. 집으로 가는 길목에서 목격한 철거민들의 시위를 바라보며 시끄럽고 소란스러운 사람들이라 생각할지도 모른다. 혹은 파업이 진행되는 지하철을 짜증스럽게 기다렸을지도 모른다. 

가난을 말하는 영화를 보았다고 가난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현실을 알게 되었다고 현실을 바꿀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나는 함께 힘을 보태면 해결할 수 있다는 뻔한 이야기가 더 마음에 끌린다. 그 이야기가 영화관에 들어갈 수 없었던 가난한 사람들에게 더 필요한 이야기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가난을 고발하는 영화가 커다란 영화상을 받고, 대기업 부회장이 축하하는 기묘한 현상이 마냥 기묘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커다란 시상식을 보며 아주 소수는 가난이 조금, 소비된 것 같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마치 기생충에서 냄새가 난다는 말에 모멸감을 느끼는 등장인물처럼 어떤 사람들은 이 우스꽝스러운 광경을 보며 미묘한 불쾌함을 느낄 것이다. 

우리는 영화가 어디까지를 보여주고 어디까지를 말하지 않는지 그 불쾌함을 근거로 고민하게 될 것이다. 한국 영화가 영화판을 바꾸었다는 자랑스러움만으로 오늘의 일이 기억되지 않기를 바란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현실의 부조리극을 생각해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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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여성 정치에 관한 책 <판을 까는 여자들>과 <집이 아니라 방에 삽니다>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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