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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날씨가 따뜻하기 이를 데 없는 고장, 겨울에도 노지에서 채소를 수확할 수 있는 고장이 바로 캘리포니아다.

물론 그렇다고 겨울에 춥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이런 기후에 적응하면 섭씨 영상 10도에도 춥다. 한겨울엔 10도 아래로 내려가기도 하는데, 이런 때는 두툼하고 따뜻한 롱패딩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번 겨울에 들어서자 사나흘 동안 겨울 폭풍이 불어, 저지대에는 많은 비를 뿌렸고 고지대엔 폭설이 내렸다. 이번 태풍은 비단 캘리포니아만 아니라 미서부지역에 골고루 영향을 미처 평소엔 눈이 많지 않던 곳들에도 많은 눈이 내려 주변을 온통 눈 세상으로 만들었다. 이번에는 이런 겨울 폭풍이 몰아치기 시작하는 날 출발해 하얀 겨울 왕국에서 헤매다 폭풍이 끝날 무렵 돌아온 여행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라스베이거스를 지날 때만 해도 세차게 내리던 비는 유타에 접어들면서 진눈깨비로 바뀌는가 싶더니 어느 틈엔지 함박눈으로 바뀌었다. 비가 눈으로 바뀌자 새하얀 설국에 대한 기대가 커지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눈길이 걱정됐다.

깜깜한 밤이라서 주변 상황이 잘 파악되질 않는다. 캠핑 스폿이 있는 세다 시(Cedar City)에 접어들었다. 가로등 불빛에 보이는 길은 이미 제설작업을 했는지 아스팔트가 드러나 있었고, 눈은 이미 그쳤다. 예상보다 훨씬 적은 눈이 쌓였는데도 캠핑 스폿으로가는 길이 막혔다.
     
길이 막혔으니 일단 차를 세우고 길 옆에 난 널찍한 빈터에 자리를 잡았다. 달리 방법이 없어 이곳에서 하룻밤 신세를 져야 할 모양이다. 이번 여행은 텐트를 치지 않고 차 안에서 잘 생각으로 짐을 정리한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길이 막혔으니 이 길을 통해 다음 목적지로 가려던 계획은 무산됐다.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기로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소란스러운 소리에 눈을 떴다. 밖이 추운지 창문에 성애가 방울방울 맺혀 좀 닦아내고 밖을 살폈다.
 
 지난 밤 내린 눈으로 바깥은 온통 눈밭이다.
 지난 밤 내린 눈으로 바깥은 온통 눈밭이다.
ⓒ 이만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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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내리고 있었다. 

텐트에서 일어나 문을 열면 텐트 밖이 하얀 눈으로 덮인 세상을 보는 것이 그동안 여행하면서 꿔본 꿈이었는데, 이것을 차 안에서 이루게 됐다. 이럴 때 '꿩 대신 닭'이라는 말을 쓰면 될까? 

얼른 눈곱을 떼고 차 문을 열어 창밖 세상을 끌어들여 사진에 담았다. 산과 들, 나무와 풀들, 이제 막 옷을 벗고 겨우살이에 든 온갖 것들 위에 고즈넉이 내려앉은 눈송이들이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브라이스 가는 길
 
세다 시티의 설경 세다는 겨울이면 눈이 많기로 이름나 있다. 인근에 세다 브레이크스 준 국립공원이 있고, 근처 브라이언 헤드에는 스키장도 있다.
▲ 세다 시티의 설경 세다는 겨울이면 눈이 많기로 이름나 있다. 인근에 세다 브레이크스 준 국립공원이 있고, 근처 브라이언 헤드에는 스키장도 있다.
ⓒ 이만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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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제 어느 길로 갈 것인지 고민해야 할 시간이다. 목적지는 브라이스 캐니언 국립공원이니 가는 길은 정해져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일반적이지 않은 경로는 없는지 한번 살펴보고 아침도 해결할 겸 세다 시의 한 패스트푸드점에 들려 지도를 살폈다.

세다 시에서 브라이스 국립공원으로 가는 길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15번 고속도로를 이용하거나 국도를 이용하는 방법인데, 어젯밤 내린 눈 때문에 국도는 막힌 곳이 여럿일 것이다. 안전하게 고속도로를 이용하기로 했다. 사실 고속도로를 이용하는 것은 별 재미는 없는데, 이번엔 어쩔 수 없게 됐다.  
     
아침에 내리던 눈은 차츰 뜸해지더니 구름만 남기고 멈췄다. 가는 동안 걱정은 덜었지만, 눈이 그치니 혹시 브라이스에 눈이 적으면 어쩌나 하는 염려를 안고 고속도로에 올랐다. 지난밤 내린 눈으로 산이며 들은 이미 하얀 겨울옷으로 갈아입었다. 가끔씩 지나는 차들은 마치 눈 구경하듯 속도를 늦추고 거북이걸음이다.

그런데 지난밤 곳에 따라 눈 내린 양이 달랐는지 브라이스 국립공원에 가까워질수록 쌓인 눈이 적어지더니, 이윽고 공원이 있는 12번 도로에 접어들면서는 드문드문 잔설만 남았다. 브라이스 국립공원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레드락 캐니언(Red Rock Canyon) 역시나 지난 밤에 눈이 내리지 않았다.

뭐 어쩌겠는가? 눈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고, 더구나 산 위엔 그래도 많은 눈이 있어 붉은 바위 산을 빛내고 있으면 됐지 싶었다. 눈이 없을 때는 없는 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 또 눈이 적으면 적은 대로 그 나름대로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자연이 아닐까 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이내 마음이 평온해졌다. 하늘에 구름이 많은 걸 보니 산 위 브라이스 캐니언 국립공원엔 눈이 내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레드락 캐니언(Red Rock Canyon) 지난 밤에는 눈이 내리지 않았지만, 그 전에 내린 눈이 아직 남아 있다.
▲ 레드락 캐니언(Red Rock Canyon) 지난 밤에는 눈이 내리지 않았지만, 그 전에 내린 눈이 아직 남아 있다.
ⓒ 이만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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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도로 12번 국가 지정 아름다운 도로(National Scenic Byway)로 지정된 12번 도로를 알리는 이정표가 보인다. 조금 더 가면 레드 락 캐니언이 있고, 좀 더 가면 브라이스 국립공원이 나온다.
▲ 아름다운 도로 12번 국가 지정 아름다운 도로(National Scenic Byway)로 지정된 12번 도로를 알리는 이정표가 보인다. 조금 더 가면 레드 락 캐니언이 있고, 좀 더 가면 브라이스 국립공원이 나온다.
ⓒ 이만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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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으로 가는 12번 도로 양 옆의 숲에 드문드문 눈이 남아있고, 살짝 낀 안개와 잔뜩 흐린 하늘은 을씨년스럽다기보다는 눈에 대한 기대 때문에 도리어 즐겁다. 길섶 풍경 살피랴 하늘 살피랴 노량으로 가다 보니 어느샌가 나폴나폴 눈송이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브라이스에 가까워질수록 하늘이 짙어져 공원 입구에 다다를 무렵엔 함박눈으로 바뀌어 온 하늘을 덮었다. 눈 덮인 브라이스의 모습을 볼 생각에 조금씩 속도를 올려보지만, 눈길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밑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눈이 제법 많이 쌓인 것을 보니 공원에는 아침부터 눈이 내린 모양이다. 공원 요금소와 방문자 안내소는 문을 열지 않았다. 오늘은 추수감사절 당일이다보니, 근무자가 없는 모양이었다. 비지터 센터 앞 주차장에 들르니 궂은 날씨에도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비지터 센터가 문을 열지는 않았지만, 센터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거나 주변을 산책하는 이들로 북적였다.
           
소복소복 추억도 쌓이네

함박눈에 거센 바람이 몰아친다. 잔뜩 몸을 움츠리고 사진을 찍으려니 바람에 날린 눈송이들이 렌즈를 가로막아 얼른 몇 장 찍고 거둬들였다. 아침에 세다에서 만난 눈보다 훨씬 더 많을 뿐만 아니라, 얼마나 거세게 내리던지 거의 '폭설' 수준이다. 그동안 이 정도의 눈을 맞았던 적이 있었던가 싶을 만큼 눈이 내렸다. 

오늘처럼 큰 눈이 내릴 때는 공원 트레일이나 뷰 포인트들을 닫는 경우가 종종 있다. 오늘은 어떨지 모르겠다. 공원에 안내하는 사람들이 없으니 어디 알아볼 만한 곳도 없기 때문에 그냥 둘러보다가 막혔으면 돌아 나오는 수밖에 없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천천히 운전하다 보니 눈 쌓인 공원 안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얼핏 봐도 멋있어 보이는 상록수와 나뭇잎과 가지에 내려앉은 하얀 눈송이들이 대비를 이뤄 절경이다. 이런 풍경을 그냥 지나치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싶어 사진 한 장 찍고 가려고 갓길에 차를 세우려는데, 차가 그만 눈에 미끄러져 길 아래로 비껴 나고 말았다. 

얼른 사륜으로 바꾸고 이리저리 해봤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눈 때문에 보이지 않았는데 갓길이 없는 턱이 진 길이었던 것이다. 한참을 씨름하고 있는데, 지나던 이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덤벼들어 도와주기 시작했고, 어떤 이는 자기가 운전을 해보면 어떻겠느냐며 도와주려 한다. 여러 사람이 붙어 뒤에서 밀면서 탈출을 시도했지만, 한번 미끄러지기 시작한 차는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았다. 한참을 그러다가 마침 준비해 가지고 다니던 탈출용 보드(Traction Boards)를 이용해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다. 
     
지난해에는 화이트 포켓(White Pocket) 여행에서 모래에 빠져 견인하느라 무려 700달러의 거금을 날렸는데, 이번엔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눈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함박눈이 내리는 상황에서도 나몰라라 하지 않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도우려 선뜻 나섰던 그 모든 여행객들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눈에 빠진 차를 밀고있다 여럿이 덤벼 밀어보지만 어림없다. 결국 트렉션 보드를 이용해 탈출에 성공했다.
▲ 눈에 빠진 차를 밀고있다 여럿이 덤벼 밀어보지만 어림없다. 결국 트렉션 보드를 이용해 탈출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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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다음 브런치(https://brunch.co.kr/@leemansup/160)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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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캘리포니아에 사는 노동자, 한 달에 한 번은 주말을 이용해서라도 여행을 하려고 애쓰며, 여행에서 얻은 생각을 사진과 글로 정리하고 있다. 빛에 홀려 떠나는 여행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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