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몇 해 전 법성포로 서해 일몰을 보러 가다 '이자겸 유배지'라고 적힌 안내판을 본 적이 있다. 이자겸이 누군가. 고려 중기 예종과 인종, 두 임금의 장인으로 당대 권력을 주무르다시피 한 인물 아닌가. 수업시간, 큰딸이 낳은 아들에게 작은딸을 시집보낸 당시의 상황을 지금의 아이들에게 이해시키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이자겸의 권력 농단에 사위인 인종의 측근 세력이 결집하자 스스로 난을 일으켰는데, 역사는 이를 '이자겸의 난'으로 기록하고 있다. 많은 역사학자들은 이를 두고 문벌귀족사회의 몰락을 가져온 시발점이자, 9년 뒤 일어난 '묘청의 난'의 또 하나의 원인이라고 평가한다. 여하튼 이자겸은 고려시대 '악인'의 대명사와도 같은 존재로 인식된다.

그런 그를 지방정부에서 굳이 기억하고 자취를 보존하려는 건, 관광객 유치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이자겸은 '굴비'의 주인공으로 알려져 있다. 법성포에 유배 온 뒤 맛보게 된 말린 조기를 개경에 있는 사위에게 보내며, 비참한 현실에 굴(屈)하지 않겠다(非)는 뜻을 피력했다고 전한다. 지금도 포털에 이자겸을 치면, 연관 검색어로 굴비가 뜬다.

뜬금없이 이자겸이 떠오른 이유가 있다. 재정자립도가 취약한 지방정부의 입장에서 관광자원을 발굴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는데, 지역과 관련된 인물의 역사적 평가에 대해선 별 관심이 없다는 거다. 명명백백한 친일파조차 세금을 들여 동상을 세우고 기념관을 짓는 지방정부가 허다한 마당에, 수백 년 전 역사 인물을 두고 몽니 부릴 일은 아니다.

여기 백남운이 있다. 웬만한 고등학생이라면 한두 번쯤 들어봤을 인물이다. 더욱이 수능을 준비하는 고3 수험생이라면, 이 이름을 모르면 곤란하다. 모든 역사 교과서의 일제강점기 단원에서 빠짐없이 소개되는 인물이자, 모의고사는 물론, 수능에서도 심심찮게 문제로 출제되고 있기 때문이다.

'유물 사관의 입장에서 한국사가 세계사의 보편적인 발전 법칙에 입각하여 발전해 왔음을 강조함으로써 일제 식민 사관의 정체성론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일제강점기 사회경제학자 백남운의 업적에 대한 교과서 서술이다. 교과서마다 그가 지은 <조선사회경제사>의 내용 일부를 발췌해, 당시 민족주의 사학과 실증 사학의 연구 방법론을 비교, 탐구하도록 하고 있다. 우리나라가 일제에 병합될 때까지 근대적인 요소를 갖추지 못했다는 정체성론을 논박하는 데 백남운의 역할이 지대했음을 두루 인정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그의 '공'은 아이들의 시험문제로 그쳐야지, 일상에서 그의 이름을 함부로 거론해선 안 된다. 그는 해방 직후 극심한 좌우의 대립 속에 월북해 북한 정권의 초대 교육상으로 임명된, 여지없는 '빨갱이'다. 더욱이 6.25 전쟁 이후 박헌영과 최창익 등 남로당계와 연안파 등이 잇따라 숙청되는 상황에서도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인물이다.

다행히도(?) 아이들은 시험을 위해 그의 이름과 업적은 달달 외우지만, 그의 해방 후 행적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는다. 하물며 그의 고향이 어디인지는, 명색이 역사를 가르치고 있는 교사인 나조차도 까맣게 몰랐다. 1979년에 사망한 뒤 북한 애국열사릉에 묻혔지만, 그가 태어난 곳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고인돌의 고장, 전라북도 고창이다.

따지고 보면, 북한 정권 수립에 협력한 인물들 중에 남쪽 출신이 적지 않다. 1948년 9월 9일 수립된 북한 정권 초대 내각의 면면만 살펴봐도, 남쪽이 고향인 인물이 거의 절반 가까이 된다. 우선 세 명의 부수상 중 김책을 제외한 나머지 두 명이 남쪽 출신이다. 외무상을 겸했던 박헌영과 소설 <임꺽정>의 저자이기도 한 홍명희.

박헌영의 고향은 충남 예산이고, 홍명희는 충북 괴산이다. 6.25 전쟁 중 미제 간첩으로 몰려 처형 당한 사법상 이승엽이 경기도 부천이고, 저 유명한 의열단의 의백(단장)으로 국가검열상으로 임명된 김원봉은, 영화 <암살>을 통해서도 잘 알려져 있듯이 경남 밀양 사람이다. 또, 농림상 박문규는 경북 경산에서 태어났고, 의사 출신 보건상 이병남은 충남 천안 사람이다.

김원봉과 함께 가장 잘 알려져 있는 사람은, 누가 뭐래도 북한 최고인민회의 초대 상임위원장을 역임한 김두봉일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그는 이태 전 개봉한 영화 <말모이>의 모티프가 된 저명한 국어학자로서, 일제강점기 중국에서 항일무장독립투쟁을 벌인 불세출의 독립운동가다. 그는 1920년대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의 의원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그가 활약한 곳은 중국과 북한 땅이었지만, 나고 자란 곳은 바로 한반도 남쪽 끝 부산이었다. 의열단원이자 김원봉의 부인인 박차정 의사가 김두봉의 조카딸로, 친인척 모두가 독립운동에 투신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참고로, 박차정 의사의 고향 역시 부산으로, 그의 생가는 그가 졸업한 동래여자고등학교 옆에 복원되어 있다. 

식민사관에 맞서 치열하게 독립운동 전개한 불세출의 학자
 
백남운의 생가 생가 주변은 폐비닐 쓰레기와 잡풀이 우거져 있어 접근하기조차 힘들다. 주소를 적은 팻말만 새뜻하다. 옆엔 널찍하게 울산 김씨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 백남운의 생가 생가 주변은 폐비닐 쓰레기와 잡풀이 우거져 있어 접근하기조차 힘들다. 주소를 적은 팻말만 새뜻하다. 옆엔 널찍하게 울산 김씨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 서부원

관련사진보기


지난 주말, 신학기를 준비하며 일제강점기 문화사 단원 수업 연구를 하다, 우연히 백남운의 고향이 전북 고창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고창이라면 이러저러한 이유로 1년이면 족히 대여섯 번은 찾는 곳인데, 지금껏 단 한 번도 백남운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다. 작년만 해도 고창의 인촌 김성수 생가와 미당 서정주 생가를 열 번 넘게 들락거렸다.

'빨갱이'인 그의 생가가 복원돼 있을 리는 만무하고, 그가 태어난 집터라도 확인하고 싶어 노트북을 켰다. 백과사전엔 고향이 고창이라는 것만 밝혀놓아 더 이상 추적이 불가능했다. 군청에 전화를 걸어 물어봐야 알 것 같지도 않고 되레 괜한 오해만 살 것 같아, 그의 이름과 관련된 애먼 블로그만 뚫어져라 들여다 봤다(나중에 혹시나 해서 고창군청에 물어보니 역시나 백남운과 관련해 등록된 문화재는 없다고 한다. 현재로선 백남운 생가를 공식 확인해 줄 곳이 없는 상태다).

만만치 않은 일일 거라 여겼는데, 실마리가 의외로 쉽게 풀렸다. 고창의 풍수지리에 관한 블로그에서 '갑툭튀' 그의 이름이 등장했다. 그가 태어난 마을이 정감록에 언급된 십승지지 중의 한 곳이라는 거다. 십승지지라고 하면, 전쟁과 흉년 등 난리를 피해 몸을 보전할 수 있는, 전통적인 이상향을 일컫는 말이다.

알아낸 주소는 전북 고창군 아산면 반암리 33-9. 수업 자료를 만들다 말고, 곧장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 자동차의 시동을 걸었다. 쉬엄쉬엄 가도 40분이면 충분한, 넘어지면 코 닿을 만한 거리다. 백남운의 생가터도 터지만, 우리나라에서 내로라하는 천하의 명당이라고 하니, 어디 보자 싶어 가는 내내 마음이 설레었다.

아닌 게 아니라, 마을 어귀에는 천하 명당임을 알리는 돌장승이 수문장처럼 지키고 섰다. 내비게이션에 '농촌정보화마을'이라고 적힌 글귀가 되레 생뚱맞게 느껴졌다. 마을에 들어서자 집들이 햇볕 가득 받아 안은 채 평온하게 들어앉아 있다. 그야말로 '옹기종기'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마을이다.

마을의 위치가 아스팔트 도로가 깔리기까지는 찾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산과 물이 함께 마을을 감싼 경우는 처음 봤다. 그다지 높은 산도 아니고 강폭이 넓지도 않지만, 외부와 적당히 격리된 느낌을 준다. 자동차가 없던 시절에는, 명당 운운하지 않더라도 정감록에서 언급한 대로 숨어들기 좋은 입지 조건을 갖췄다.

마을의 가장자리 맨 끝이 바로 백남운의 생가다. 덩그러니 빈 터만 있을 줄 알았더니, 흉물스럽게나마 집이 남아 있다. 부러 찾아온 사람을 위해서인지, 벽에 번지수를 적은 팻말이 붙어 있다. 김원봉과 친자가 생존해 있는 박헌영을 제외하면, 북한 정권 수립에 협력한 인물의 생가가 남아 있거나 알려져 있는 경우는 백남운이 유일하지 않을까 싶다.

아무런 꾸밈없이 튼실한 모습이지만, 오랫동안 버려진 탓인지 문짝의 자물쇠에 녹만 가득하다. 퇴락한 집 벽엔 폐비닐 쓰레기 더미가 수북하고, 찾아오지 말라는 듯 도깨비 풀이 주변을 감싸고 있다. 툇마루에 걸터앉았다가 옷에 달라붙은 도깨비 풀을 떼어내느라 한참을 씨름하기도 했다. 당장이라도 고쳐 쓴다면 괜찮을 성싶은데 안타까울 뿐이다.

남향에다 볕이 잘 드는 곳이어서일까. 생가 옆 널찍한 터에 큼지막한 무덤 한 기가 자리하고 있다. 얼추 집터보다 서너 배는 더 넓다. 듣자니까, 이곳 반암 마을엔 인촌 김성수의 할머니인 연일 정씨를 비롯해 울산 김씨 가문의 사람들이 여럿 묻혀 있다고 한다. 내로라하는 명당이어선지, 묘의 밀집도로만 보면 우리나라에서 단연 몇 손가락에 드는 곳일 듯하다.

명당이라는 이곳이 배출한 최고의 인물은 단연 백남운일 테지만, 어느 누구도 그를 입에 올리진 않는다. 생가가 맞는지 재차 확인해 보기 위해 나이 50쯤 돼 보이는 내 또래의 마을 주민에게 물었더니, 외려 그 사람이 누군지를 되묻기도 했다. 세세손손 이곳에서 살아온 토박이가 아니라면 몰랐을 수도 있다. 다만, 아주 드물게 그 빈집을 찾아오는 이들이 있다고는 했다.

백남운은 비록 북한 정권 수립에 협력한 자이지만, 모든 교과서가 일제의 식민사관에 맞서 치열하게 독립운동을 전개한 불세출의 학자로 인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언 70년 동안 금기시된 그의 이름을 해방시킬 때도 되지 않았나 싶다. 친일파의 반민족행위를 문제 삼으면 공과 과를 함께 보라면서, 월북한 독립운동가에겐 이름조차 언급 못하게 하는 건 말이 안 된다.

이곳 반암 마을과 친일파 김성수, 김연수 형제가 태어난 인촌 마을은 지척에 있다. 그곳엔 빗발치는 교체 요구에도 여전히 그들의 반민족 행위를 미화한 황당한 안내판이 버젓이 세워져 있다. 일제의 식민사관에 맞서 싸운 백남운과, 일제의 식민통치에 협력한 김성수, 김연수 형제. 왜 한쪽은 이름조차 못 꺼내는데, 다른 한쪽은 대대손손 저토록 당당할 수 있는가. 

댓글4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