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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기사] 산책하다가 천주교 입문... 하느님 죄송합니다 (http://omn.kr/1mfkk)

나일론은 옷감의 일종이다. 석유에서 추출한 화학물질을 합성해 만든다. 1930년대 처음 등장했고, 그로부터 20여 년 후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당시에는 어마어마한 혁신 제품이었다. 거미줄보다 가늘지만 철사보다 질기다는 찬사를 받았다. 일부러 찢기 전에는 절대 해지지 않는다. 구김도 없다. 가벼운 데다가 반짝반짝 윤까지 난다. 각선미를 돋보이게 하는 스타킹의 소재로 쓰이면서 특히 여성들이 열광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나일론의 인기는 시들해졌다. 자연 소재인 천에 비해 통풍이나 흡수성이 현저히 떨어졌다. 미끈거리는 착용감도 기분 나빴다. 지나치게 오래가는 것도 나중엔 사람들을 지겹게 했다. 그러다 보니 반짝임마저 천박하게 보였다. 있는 사람들은 다시 실크나 면으로 돌아갔다. 사람들은 나일론을 가짜 옷감이라며 천대했다. 싸구려의 대명사로 전락하고 말았다.

우리는 참 재치 있는 민족이다. 그런 나일론의 부정적 특성을 되살려 다른 의미로 쓰기 시작했다. 명사를 형용사처럼 썼다. 사람이나 사물 앞에 나일론을 붙이면 '가짜' 혹은 '겉은 그럴 듯하나 속은 텅 빈' 따위의 뜻이 됐다. '헛'이나 '척'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렇게 비틀어 쓸 때는 영어 발음인 나일론보다 일본식인 '나이롱'이라 해야 제 맛이 난다.

대표적인 게 '나이롱 환자'다. 교통사고로 입원한 환자 중에 많다. 아프지도 않으면서 꾀병을 부리며 퇴원을 거부하는 환자들을 가리킨다. 머리는 하이칼라로 넘기고 명품 옷까지 걸쳤지만 정작 지갑과 머리는 텅 빈 남자를 나이롱 신사라 부른다. 나이롱 박수는 치는 척만 했지, 실제로는 손뼉을 치지 않는다. 당연히 소리가 나지 않는다.

그런 점을 감안할 때, 나는 삶 자체가 '나이롱'이었다. 부모님에게 순종하는 척했지만 속으로는 끊임없이 반란과 독립을 획책하던 나이롱 아들이었다. 공부는 하는 시늉만 내던 나이롱 학생이었다. 입으로는 '당신만을 사랑해'라 속삭였지만 정작 사랑이 뭔지도 모르는 나이롱 연인이었다. 열심히 일하는 흉내만 냈지 아침엔 점심 메뉴를, 오후엔 저녁 술자리 조각만 고심하던 나이롱 직장인이었다. 뭐든 도무지 진정성이 없었다.

처음 신을 찾게 된 사연
 
 지난 20여 년, 나는 나이롱 불교 신자였다.
 지난 20여 년, 나는 나이롱 불교 신자였다.
ⓒ 이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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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도 그랬다. 지난 20여 년, 나는 나이롱 불교 신자였다. 그 이전, 아예 어렸을 땐 종교 자체를 믿지 않았다. 종교란 나약한 사람들이 만든 방패막이며, 그런 인간들의 허점을 교묘하게 파고드는 사기일 뿐이라고 단정했다. 종교는 아편이라 정의한 한 철학자를 존경했다. 신보다 내 주먹을 더 믿는다는 어느 싸움꾼의 일갈을 신조로 삼았다. 참으로 시건방지고 불경스럽기가 이를 데 없었다.

그러다 문득 종교 혹은 신에 관심이 가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촌 동생의 죽음이 발단이었다. 겨우 스물둘, 꽃다운 나이의 숙녀가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했다. 온 가족이 큰 슬픔에 잠겼다. 특히 늦둥이 막내딸을 유난히 사랑했던 큰아버지에게는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다. 결국 당신은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다. 잇따르는 불행이 전혀 믿기지 않았다.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부녀의 장례를 차례로 치르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길을 걷고 있는데, 웬 젊은 남녀가 잔뜩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고 내 소매를 잡아끌었다.

"아, 선생님 댁에 우환이 많으시네요. 객사에 줄초상까지, 힘드시지요?"

난 내 귀를 의심했다. 생판 처음 보는 사람들이 어찌 내 사정을 그리 훤히 알고 있을까, 의아했고. 넋이 나갔다. 그들은 나를 인근의 커피숍으로 데려갔다. 자신들을 모 사찰에서 도(道)를 공부하는 수련생들이라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수련의 일환으로 가끔 이렇게 저잣거리에 나와 나처럼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돕기도 한다고 했다.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분들이 있기에 세상은 아직 따뜻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게 종교구나, 신앙인의 참모습이란 이런 거구나, 나는 이런 것도 모르고 치고 까불기만 했구나.' 깊은 자책과 회한에 휩싸였다. 나도 모르는 새 생전 처음 보는 그들에게 우리 가족의 불행과 비극을 줄줄이 털어놓았다. 그들은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내 말을 끝까지 경청해 주었다. 나는 끝내 눈물까지 보였다.

그들은 나를 진심으로 위로했다. 그러면서 내가 그렇게 진심으로 두 분의 넋을 기리니 망자들은 아마도 좋은 곳에 가셨을 것이라 토닥였다. 그러면서도 혹시 모르니 부처님 전(前)에 초 하나 밝히라 권했다. 당신들이 가는 길을 환하게 해 줄 것이라 했다.

거절할 수 없었다. 오히려 그렇게라도 하면 마음의 부담을 덜 수 있을 것 같아 반가웠다. 주머니를 털어 촛값으로 5만 원을 내놨다. 그들은 공손하게 합장하며 '성불'하시라는 인사를 남기고 홀연히 사라졌다.

물론 그건 그냥 사기였다. 요즘도 행인 많은 거리에서 '기를 아십니까'하고 묻고 다니는 그런 사이비 종교인들이었다. 나는 대낮에 사람들 북적이는 시내 한복판에서 그냥 돈을 뜯긴 거였다. 그런 사실도 한참 후에야 알았다. 친구에게 그 사연을 전해주는데 녀석은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에라이 한심한 놈아' 했다. 20년 전의 일이니 그냥 지금의 5만 원이 아니었다. 꽤 큰 돈이었다.

하지만 나는 하나도 억울하다거나 화가 나지 않았다. 잘했다고 스스로를 칭찬했다. 그건 단순한 인지부조화의 심리 현상 같은 게 아니었다. 그들에게 돈을 건네는 그 순간만큼은 정말 경건하고 엄숙했다. 진심으로 큰아버지와 사촌 동생의 명복을 빌었다. 정말 간절하게 빌었다. 그 돈이 부처님 앞으로 가는지 아닌지는 알 필요도 없었다. 그런 마음으로 시주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했고 의미가 있었다.

그들과의 만남 이후 여기저기 사찰을 찾아다녔다. 부처님께 예를 다해 절을 올리고 공양을 바쳤다. 절은 처음엔 삼배로 시작해, 나중엔 백팔배도 거뜬히 했다. 서울 어느 사찰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여는 삼천 배 철야정진에도 몇 번 갔다. 절 한 번 할 때마다 큰아버지와 사촌 동생의 이름을 되뇌이며 진심으로 명복을 빌었다. 그 모든 게 그날 만났던 길거리 수도자들의 가르침 그대로였다.

그런데 거기까지였다. 처음엔 정말 간절한 마음으로, 온 정성을 다해 기도를 드렸지만 점점 시들해졌다. 갈수록 건성이었다. 꾀가 나기 시작했다. 한 달에 서너 번씩 절을 찾다가 한 달에 한두 번, 두 달에 한 번꼴로 늘어졌다. 명상을 한답시고 부처님 앞에 앉아서도 내내 딴생각만 했다. 불교경전 한 권 읽지 않았다. 심지어 정해 놓고 가는 절도 없었다. 도무지 신심이 없었다. 그냥 몸뚱이만 부처님 앞에 가 있었을 뿐이었다.
 
내 발로 찾아간 성당, 나와의 약속
 
교리수업 출석부  독실은 아니더라도 성실한 신자가 되기 위한 첫걸음, 결석하지 말자
▲ 교리수업 출석부  독실은 아니더라도 성실한 신자가 되기 위한 첫걸음, 결석하지 말자
ⓒ 이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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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우연히, 정말 뜻하지 않게 성당엘 다니게 됐다. 누가 일러 주지도 않았고 잡아끈 것도 아니었는데 그렇게 됐다. 아버지와 막냇동생이 천주교 신자였지만 그들은 함께 성당에 나가 보자고 권하지 않았다. 아예 종교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꺼렸다. 내가 자주 절에 다니는 걸 알아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나는 그냥 뭐에 홀린 듯 내 발로 성당에 찾아갔다. 본격적으로 교리공부를 시작했다. 난생 처음 미사에 참석해 예수님도 뵀다.(관련기사 : 산책하다가 천주교 입문... 하느님 죄송합니다)

첫날 교리신청서를 내면서 스스로에게 다짐한 게 있다. 여기선 절대 '나이롱'이 되지 말자, '독실'까지는 아니더라도 '성실'한 신도 정도는 돼 보자는 거였다. 그걸 위해 무엇보다 교리공부나 미사에 빠지지 말자고 결심했다.

아직까진 잘 지키고 있다. 지난 23주 동안 단 한 번도 빠지지 않았다. 집안 잔치 때문에 지방에 내려갔을 땐 거기 성당에 나가 미사를 드렸다. 업무 특성상 일요일에도 나가는 경우가 잦았지만 회사에 양해를 구했다. 고맙게도 일요일 오전은 온전히 비워주었다.

교리공부 시간에 내주시는 숙제도 꼬박꼬박 하고 있다. 첫 숙제는 신앙생활을 시작하면서 느끼는 소감문 쓰기였다. 곧바로 했다. 마르코 복음 필사는 한 장, 한 장 채워 가고 있다. 언제 다 쓰나 싶었는데 어느덧 11장에 이르렀다.
 
성경 필사  성실 신자가 되는 두번째 단계, 꼬박꼬박 숙제하기, 언제 다 쓰나 싶었는데 벌써 11장을 쓴다.
▲ 성경 필사  성실 신자가 되는 두번째 단계, 꼬박꼬박 숙제하기, 언제 다 쓰나 싶었는데 벌써 11장을 쓴다.
ⓒ 이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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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다섯 장, 세례 받기 전까진 충분히 마칠 것 같다. 기도문 외우기는 골치 아프다. 이게 참 쉽지 않다. '고백기도문'을 외우면 '주님의 기도문'을 까먹는 식이다. 그래도 운전 중에도, 화장실에 가서도 맹렬하게 외우고 또 외운다.

이 약속을 꼭 지키고 싶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건 금연 이후 내 생애 두 번째로 지키는 나 자신과의 약속이 될 것이다. 나이롱 인생의 오명을 어느 정도 벗겨낼 수 있기도 할 터다. 뭐 하나 끝까지 하는 게 없다는 어머니의 타박도 조금은 무색해질 것이다.

이제 곧 육십이다. 뒤늦었지만 이제라도 '진정성'을 갖춰야 한다. 여하한 경우에라도 약속을 지킬 것이다. 정말 간절히 그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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