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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는 매일 밤 책을 읽을 것이다

엄마와 딸, 그리고 엄마의 엄마 다른 세대를 살았어도 우리는 모두 욕망하는 인간이다. 철딱서니 없는 손녀, 입체적으로 할머니 바라보기.
20.01.27 15:40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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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생나무글(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
할머니는 책을 받아 들고는 "가슴팍에 꼬옥 안고 집으로 돌아가겠다." 했다. 엄마는 저녁에 잠이 오지 않을 때 딱 두 페이지씩 만 책을 읽어보라 말했다.

엄마는 찌는 더위 속 자신이 경험한 작은 행복을 자신의 엄마에게도 나누고 싶어 했다. 엄마는 책을 읽는 일이 힘들지만 한 글자 한 글자 읽어 내리는 행위가 스스로를 대접해주는 행동인 것 같아 기분이 좋다 했다. 엄마는 올여름, 그렇게도 좋아하는 여행 한 번 가지 못했다. 비행기에 오르는 대신 지하철에 오르고, 대영박물관이나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의 압도적인 문이 아닌 일민 미술관의 시간 떼가 묻어나는 문을 두 손으로 밀고 들어갔다. 그럼에도 가을과 겨울을 살아갈 힘을 얻었다 했다. 나는 이제는 작은 것에 만족하며 살아가야 하는 엄마가 어쩐지 안쓰러우면서도 일상 속에서 마음 붙일 것들을 찾아 자신의 이야기를 만드는 모습이 참 예뻤다.

엄마는 바쁘게 삶을 달려 반백의 시간을 버텨냈고, 할머니는 여든 번의 여름과 이별했다. 책이 든 봉투를 곱게 접어 꼭 끌어안은 할머니와 올여름의 이야기가 흐르는 눈동자를 반짝이는 딸은 운전석과 그 뒷좌석에 앉아 이야기를 나눈다. 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엄마는 이제는 자신의 것을 엄마에게 나눌 수 있을 만큼 어른이 되어버린 딸이 대견하기도 하고 애틋하기도 하고 가련하기도 해 책을 누름돌 삼아 가슴을 꾹 눌렀을 것이다. 어깨 너머로 들려오는 엄마의 목소리를 들으며 딸은 그 목소리가 언제고 그곳에 있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잠시나마 그 목소리에 생기가 깃들기를 무던히 바랐을 것이다.

그 둘의 목소리를 가만히 들으며 나는 마음이 아팠다가 화가 나기도 했다가.

할머니는 마당이 넓은 양갓집 규수였다고, 지금도 시답잖은 물건은 거들떠보기도 싫다고 콧대를 높이곤 했다. 할머니는 자신을 지게에 실어 흐르는 시내를 건네줄 머슴은 부려보았지만, 책을 선물해 귀인을 곁에 둔 적은 없었다. 할머니는 팔십 년이 넘는 세월을 살았는데.

팔십 년은 도대체 얼마나 긴 시간일까. 내가 팔십 년을 살면 어림잡아 몇 사람쯤 인연을 맺을까. 그중 내게 책을 선물할 사람은 몇이나 될까. 할머니에게는 왜 누구도 책을 선물하지 않았을까. 할머니는 팔십 년을 넘는 세월을 살았는데 그 시간 동안 서점에 입고되었던 책들을 전부 꼽아본다면 과연 몇 권이 될까. 왜 그 수 많은 책들 중 단 한 권도 할머니의 머리맡에 갈 수 없었을까. 할머니는 왜 평생을 살아도 책꽂이라는 가구는 가져본 적이 없을까. 할머니는 몇십 년을 쓴 농도 새것같이 매일매일 닦는 사람인데. 

할머니에게 아무런 이유 없이, 특별하지 않은 날 무심코 꽃을 선물했던 사람은 있을까. 할머니는 팔십 몇 년의 날들을 열심히 "양갓집 규수였다가 한가락 한다는 집에 시집와 살림 잘하는 여자"로 살아왔는데, 내가 태어나지도 않았고 엄마가 아빠를 만나지도 않았을 때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그늘 아래에서 지금도 꾸준히 맡은 역할을 하고 있는데, 왜 그 무수한 시간 동안 할머니가 좋아하는 것들을 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까. 할머니는 내일 아침 맛깔 나는 찬거리를 만들 푸성귀를 손에 쥐어주는 것이 좋을까. 영 무용하지만, 그 순간 오롯이 자신 됨을 만끽하게 해줄 꽃 한 송이를 쥐여주는 것이 좋을까.

무엇이 할머니를 살게 할까. 

할머니는 매일 밤 딱 두 페이지씩 책을 읽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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