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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토중래를 노리다

윤보선은 1963년 10월 15일에 실시된 5대 대선에서 15만여 표 차이로 박정희에게 고배를 마셨다. 그래서 1967년 6대 대선에서는 일대의 설욕전을 벼렸다. 윤보선이 이끄는 신한당은 대선을 1년 여 앞둔 1966년 3월 30일, 일찌감치 대통령 후보를 지명하고 전열을 가다듬었다. 그 소식을 접한 민중당은 대통령 후보로 유진오 전 고대 총장을 영입한 뒤 신한당에 통합을 제의했다.

하지만 윤보선은 민중당을 '사쿠라당'이라고 일축했다. 그러자 당내 김도연, 장택상, 정일형 등이 민중당과 통합치 않으면 탈당을 하겠다고 압박을 해왔다. 게다가 백낙준, 이범석, 허정 등 재야인사들도 압박했다. 그러자 윤보선은 그제야 통합원칙에 합의해 자신과 유진오, 백낙준, 이범석의 4자 회담을 제안했다.

그 4자 회담에서 대통령 후보는 윤보선, 당수는 유진오로 합의 추대해 야권의 전열을 가다듬었다. 그런 뒤 공화당 박정희 후보와 맞붙었다. 

윤보선 후보는 공화당 박정희 후보를 황소에 빗대 "지난 농사 망친 황소, 올봄에는 갈아보자" "박정해서 못살겠다. 윤택하게 살아보자"라는 구호로 맹공했다. 하지만 5대 대선에 견줘 야당 후보로 신선함이 떨어졌다. 게다가 윤보선은 두 차례나 대선 후보를 양보하지 않으면서 굳어진 고집불통 이미지로 1967년 5월 3일에 실시된 제6대 대통령 선거 결과 참패했다. 이번에는 116만 표 차였다.

그래도 윤보선은 대통령에 대한 강한 집념을 버리지 못했다. 제7대 대선을 앞두고 김대중, 김영삼, 이철승 등의 신진 세력들이 '40대 기수론'을 내세우고 등장했다. 윤보선은 당내 지명 희망이 보이지 않자 아예 탈당해 국민당을 새로이 창당한 뒤 다시 한 번 기회를 엿봤다. 하지만 국민 여론은 싸늘했다. 그래서 윤보선은 당신 대신 박기출 후보를 내세웠지만 4만여 표로 참담하게 끝났다. 
  
 대통령 선거 투표 후 기자들에게 둘러싸인 윤보선 후보.
 대통령 선거 투표 후 기자들에게 둘러싸인 윤보선 후보.
ⓒ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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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와 악연

1971년 10월, 박정희의 유신 선포로 나라 전체가 겨울공화국이었다. 서슬 퍼런 유신 체제 하 윤보선은 민주화운동에 앞장서서 눈물겨운 투쟁을 벌였다. 1973년에는 정구영, 지학순 등과 민주구국헌장을 발표했고, 1974년에는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과 관련해 기소되기도 했다.

그해 7월에는 인민혁명당(인혁당) 사건과 관련해 탄원서에 서명도 했고, 민청학련 사건의 배후로 지목돼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기도 했다.

민주화 투쟁을 벌이다가 1979년 10.26 사태를 맞았다. 하지만 5공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자 윤보선은 국정자문위원을 맡았다. 그는 군사정권과 전에 없던 우호관계로 전두환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뿐 아니라, 1987년 대선에선 노태우 후보를 지지하기도 했다.

이러한 윤보선의 행보는 당시 야당과 학생들로부터 맹렬한 비난을 받았다. 배우자와 자녀들조차도 그에게 제발 나서지 말라고 만류했다고 전해진다. 한 인물에 대한 평가는 그의 말년을 보라고 했는데, 그의 말년 행적은 많은 사람들을 어리둥절케 했다. 

그런 그에게도 죽음은 비켜가지 않았다. 윤보선 전 대통령은 1990년 7월 18일 안국동 자택에서 94세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그는 다른 대통령과는 달리 국립묘지에 모셔지지 않고 충남 아산 선산에 안장됐다고 한다.

사실 사람으로 태어나 죽어서 국립묘지에 묻힌다는 것은 최대의 영광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윤보선은 그런 혜택을 사양한 채 선산으로 갔다. 그곳으로 모신 이유는 명당이라는 이른바 풍수지리설 때문이요, 또 다른 하나는 박정희와 같은 곳에 묻히기 싫어서 그랬다는 소문도 있다.
 
 충남 아산 선산에 안장된 윤보선 무덤.
 충남 아산 선산에 안장된 윤보선 무덤.
ⓒ 자료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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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보선 묘지

나는 이 두 가지 설의 진위는 잘 모르겠으나 반감이 일어난다. 아직도 풍수지리설에 따른 무덤을 쓰는 전근대적인 이가 이 나라 대통령이었다는 사실에 어이가 없다. 내가 들러본 지구촌 어디에도 대한민국과 같은 요란한 무덤은 없었다. 우리나라보다 땅덩어리가 수십 배나 큰 미국이나 중국도 무덤은 간소했고, 중국의 덩샤오핑이나 저우언라이 같은 지도자는 당신의 무덤 자체를 만들지 못하게 해 아예 유해를 바다에 뿌리라는 유언을 남겼다. 또 프랑스의 드 골 대통령은 일반인이나 다름없는 무덤에 묘비문조차도 당신 이름과 생몰연대만 쓰게 했다고 한다.

만약 두 번째 이유로 국립묘지에 가지 않았다면 전직 대통령으로서 옹졸하기 그지없는 처사다. 또한 대통령으로서 대한민국과 국민들을 우습게 여긴 오만한 작태가 아닐 수 없다.

아무튼 이런 말들이 나돌 만큼 윤보선-박정희 두 사람의 이승에서 악연이 깊었다. 아마 저 세상에서도 두 사람은 여태 화해치 않았을지 모르겠다. 이제 저승의 텅 빈 링 위에서 구경꾼도 없는데 서로 피 터지게 싸울 필요는 없지 않은가.

윤보선은 올해로 사후 30년을 맞는다. 아직 그분에 대한 바른 평가는 이른 감이 있다. 강원 산골의 한 서생은 다만 그분의 묘지를 국립묘지로 천장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후손들에게 전한다.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역사를 위하여. 

(*다음 회부터는 장면 국무총리를 다룹니다. 대통령은 아니었지만 내각책임제의 수장이었기 때문입니다.)

덧붙이는 글 | * 이 기사는 강준식 지음 <대한민국의 대통령들> / 박영규 지음 <대한민국 대통령실록> 등을 참고하여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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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년 교사생활 후 원주에서 지내고 있다. 장편소설 <허형식 장군> <약속> <용서>, 역사다큐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사진집<지울수 없는 이미지> <한국전쟁 Ⅱ> <일제강점기> <개화기와 대한제국> <미군정 3년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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