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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미국 방문 결과 보고 및 귀국 인사차 윤보선 대통령을 예방했다(1961. 11. 27.).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미국 방문 결과 보고 및 귀국 인사차 윤보선 대통령을 예방했다(1961. 11. 27.).
ⓒ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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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것이 왔구나"

1961년 5월 16일 새벽 4시 무렵 윤보선 대통령은 비서가 건네 준 육군참모총장 장도영의 전화를 받았다.

"각하, 지금 군부쿠데타가 일어났습니다. 정부 인사들이 은신 중이오니 대통령 각하께서도 신변의 안전을 배려해 주십시오."

하지만 윤보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날 오전 9시 무렵 장도영을 비롯한 3군 참모총장, 해병대사령관, 현석호 국방장관 그리고 박정희 소장과 유원식 대령을 맞이했다. 윤보선은 그들을 보자 불쑥 "올 것이 왔구나"라는 말을 뱉았다. 쿠데타의 주동자 박정희가 입을 뗐다.

"대통령 각하, 근심을 끼쳐드려서 죄송합니다. 저희도 처자가 있는 몸으로서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애국일념에서 목숨을 걸고 이 혁명을 일으킨 것입니다."
  
 윤보선 생일, 국가재건최고회의 간부들로부터 축하 인사를 받고 있다.
 윤보선 생일, 국가재건최고회의 간부들로부터 축하 인사를 받고 있다.
ⓒ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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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박정희는 이미 선포된 계엄령을 추인해 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윤보선은 이를 거절한 뒤 "우리 군인들끼리 피를 흘리는 일이 없도록 잘 수습하라"고 말하면서 이들을 돌려보냈다. 

쿠데타 지휘부는 일단 모두 물러났다가 잠시 후 박정희와 유원식만이 다시 접견실로 돌아와서 윤보선에게 말했다.

"저희들은 대통령 각하께 과거에도 충성을 다했고, 지금도 그러합니다. 앞으로도 그 충성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저희는 이 혁명을 '인조반정'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유원식의 이 말에는 함축적인 뜻이 담겨 있었다. 인조반정이란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인조를 왕위에 앉힌 사건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장면을 실각시킨 뒤 윤보선을 옹립하겠다는 암시로 해석할 수 있는 고도의 계산된 대목이었다. 윤보선은 그제야 내심 자기가 뱉은 '올 것이 왔다'라는 말이 멀지 않아 눈 앞에 펼쳐질 것으로 기대했나 보다.

그들이 돌아간 다음, 유엔군사령관 매그루더와 주한 미대사 마셜이 윤 대통령을 찾아왔다. 매그루더는 "반란군 병력은 겨우 3600명인데, 그 열 배인 3만6000명만 동원하면 쿠데타 군을 진압할 수 있다"라고 병력 동원령을 요청했다.

하지만 윤보선은 "국군 사이에 교전이 벌어지면 그 틈을 타 북한이 쳐내려올 수도 있다"는 논리로 이를 거부했다. 그러면서 사태 해결을 위해 '거국내각을 구성해야 한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이는 윤보선이 쿠데타를 추인하겠다는 말이나 다름이 없었다.
    
 제5대 대통령 선거 당시 벽보(1963. 10. 15.).
 제5대 대통령 선거 당시 벽보(1963. 10. 15.).
ⓒ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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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보선, 쿠데타를 묵인 방조하다

이튿날 윤보선은 비서를 시켜 제1야전군사령관 이한림과 6개 군단장에게 아래 요지의 친서를 보냈다.

"국군끼리 충돌하지 말라."

이로 미뤄 보아 그즈음 윤보선은 쿠데타를 묵인 방조한 셈이었다.

5월 18일, 혜화동 칼멘 수도원에 잠적했던 장면이 그날에야 모습을 드러낸 뒤 전 국무위원의 사임을 발표했다. 그 결정적인 동기는 윤 대통령의 태도였다고 후일 그의 회고록에서 밝혔다.

그때 쿠데타 지휘부가 내건 대국민 혁명 공약은 "첫째, 반공을 국시의 제일의로 삼고로 시작하여 … 여섯째, 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 본연의 임무로 복귀할 준비를 갖추겠습니다"였다. 민정 이양의 뜻을 밝힌 것이다.

하지만 박정희는 쿠데타가 자리잡자 곧 국가재건최고의장으로 내세웠던 얼굴 마담 장도영을 실각시키고 자신이 전면에 나섰다. 그리고는 청와대로 찾아와 "군정을 1년쯤 연장하겠다"라고 했다. 하지만 막상 발표 일에는 2년을 연장해 1963년 여름에나 민정 이양을 한다고 했다. 이에 분개한 윤보선은 하야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버거 주한미대사의 만류로 주저앉았다.

그뿐 아니라 윤보선은 박정희의 어깨에 대장 승진 계급장까지 달아주는 들러리 역할까지 했다. 내용인즉, 박정희가 미국 방문을 앞둘 때였다. 그는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기 위하여 현재 계급인 중장에서 대장으로 승진시키고, 그 계급장을 윤 대통령이 직접 달아줄 것을 요청했다. 그에 따라 윤보선은 박정희의 대장 계급장을 직접 달아주었다. 그때의 일화다.

그날 윤보선 대통령은 박정희와 김종오 장군의 대장 진급 계급장을 달아주다가 "두 분 다 같이 키가 작군요"라는 농담을 했다. 그러자 박정희는 정색을 하면서 "작은 고추가 맵지 않습니까?"라고 발끈 대꾸했다(후속 박정희 편에서 다루겠지만 그는 '키가 작다'는 말을 평생토록 몹시 싫어했다). 

첫 결혼식 때 경북 선산군 도개면 도개마을 초례청에서 하객들이 신랑의 체구가 작다고 쑥덕거렸다. 그 말을 듣자 신랑은 매우 화가 났다. 나중에는 처가와 아예 발길조차도 끊었다. 처가 사람들이 당신의 체구와 가문을 우습게 여기는 것도 그렇게 된 한 요인이었다고 마을사람들은 지레 짐작했다. 

그는 자신의 체구가 작은데 대한 심한 콤플렉스로 평소 늘 선글라스를 끼고 다녔다. 케네디와 정상회담을 할 때도 체구의 왜소함을 감추고 강한 인상을 심어주고자 선글라스를 착용했다고 한다.
 
 케네디 박정희 한미정상회담 장면(1961. 11. 14.).
 케네디 박정희 한미정상회담 장면(1961. 11. 14.).
ⓒ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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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보선의 사임, 만장일치로 의결하다

1961년 11월, 육군대장 계급장을 달고 미국에 간 박정희는 11월 14일 케네디와 한미정상회담을 갖고 공동선언문을 발표했다. 이는 미국이 박정희 군사정권을 정식으로 인정하는 한미정상회담이었다. 윤보선은 그제나 이제나 박정희가 자신에게 정권을 물려줄 것으로 알았다. 하지만 그렇게 믿었던 박정희에게 속아 계속 얼굴 마담 역이나 들러리 역할을 한 걸 그때서야 알아챘다.

그는 박정희가 '목숨을 걸고 혁명했다'는 말의 진의를 그때까지 미처 파악치 못했다. 일본군 장교 출신으로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살아난 비주류 육군 소장이 '목숨 걸고' 쿠데타를 한 뒤 만석꾼 아들에게 권력을 순순히 이양할 수 있을까. 윤보선의 한심한, 대단한 착각이었다.

윤보선은 대통령으로서 상황판단과 사리분별력이 부족했다. 그뿐 아니라, 대통령으로서 가장 중요한 헌정 수호 의지가 빈약한 함량미달의 정치인이었다. 그는 세상물정 모르는 구시대 인물에 불과한 고집불통의 사람으로, 한 마디로 격동의 시대 대통령 감은 아니었다.

그는 대통령으로서 우리 현대사에 헌정 중단을 막지 못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인물이다. 우리는 어떤 정치인이 대통령이 되는 일보다 재임기간 중 국리민복을 위해, 올바른 역사를 위해, 어떻게 처신했는가를 냉정히 비판해야 만 할 것이다. 그래야만 앞으로 함량미달의 대통령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윤보선은 이런저런 배신감과 잔뜩 김칫국을 마셨던 데 대해 매우 분개했다. 이후 두 사람은 이승에서 끝내 화해치 못한 채 줄곧 앙숙관계가 된다.

박정희 역시 윤보선을 잘 이용했으면서도 구시대 인물이라고 헌 버선짝처럼 싫어했다. 박정희는 일찍이 고향집 이웃마을 만석꾼 아들 장택상도 몹시 싫어했다. 그들은 수많은 소작인의 피땀을 가로 채 호화유학한 이들로, 자기 같은 소작인 자식들은 상대도 않던 갑질을 보고 자랐기 때문일 것이다.

1962년 3월 22일 윤보선은 하야선언을 발표하고 청와대를 떠났다. 박정희로부터, 그리고 링 밖에서 재미있게 관전하던 미국 측으로부터도 용도 폐기처분을 당한 걸 그제야 알았기 때문이다. 

그때 청와대를 떠나면서 그는 반드시 '권토중래'하리라 다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그는 지략이 부족했다. 

다음은 1962년 3월 25일 자 동아일보 1면 보도이다.
 
"윤대 통령 사임허가

본인의 사의존중. 박 의장, 윤 대통령 사표 수리에 담(談).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은 윤 대통령의 사임이 최고회의 본회의에 의하여 허가된 직후 담화를 발표하고 '최고회의에서는 진지한 토의를 거듭한 나머지 결국 대통령 자신의 의사에 의하여 사임하겠다는 것이므로 그 의사를 존중한다는 뜻에서 사임허가를 만장일치로 의결하였다'고 말하였다.

윤보선은 대통령 사임조차도 박정희에게 허가받는 수모를 당했다. 그는 평소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변방의 한 육군 소장에게 이용만 당한 채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때 윤보선은 마음 속으로 칼을 갈았으리라.

(*다음 회에 계속)

덧붙이는 글 | * 이 기사는 강준식 지음 <대한민국의 대통령들> / 서중석 지음 <현대사 이야기> 등을 참고하여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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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년 교사생활 후 원주에서 지내고 있다. 장편소설 <허형식 장군> <약속> <용서>, 역사다큐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사진집<지울수 없는 이미지> <한국전쟁 Ⅱ> <일제강점기> <개화기와 대한제국> <미군정 3년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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