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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화도조약을 맺을 당시의 우리측 대표단과 일본측 대표단.
 강화도조약을 맺을 당시의 우리측 대표단과 일본측 대표단.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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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정부의 원병 요청국서는 원세개를 통해 청국 정부에 전달되었다.

당시 청나라의 실권자인 북양대신 이홍장(李鴻章)은 5월 1일(음) 수사제독(水師提督) 정여창(丁汝昌)에게 군함을 이끌고 인천으로 출동하라고 명령하였다. 이와 함께 산해관에 주둔한 섭지초(葉志超)와 태원진총병 섭사성(聶士成)이 지휘하는 청군 910명에게도 출동명령을 내려 충남 아산으로 상륙케 하였다.

동학농민혁명의 진척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일본은 청군의 파병정보를 입수하고, 5월 6일 주한 일본공사 오도리(大鳥圭介)가 군함 3척을 이끌고 인천에 상륙하였다. 오도리는 420명의 육전대가 대포 4문을 이끌고 서울에 입성하고 별도로 오호시마(大鳥義昌) 소장은 6천 명의 혼성여단을 지휘하여 인천에 상륙하였다.

섭지초의 청군 1천 5백 명과 일군 6천 명이 인천에 거의 동시에 상륙한 것이다. 청군은 정부의 요청이었지만 일본군은 불청객으로 한국에 들어왔다. 정부나 국민에게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그리고 동학농민혁명은 국제전의 성격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강화도조약 당시 진무영의 훈련장에서 일본군대가 군사 훈련을 하고 있고, 이를 강화부민들이 구경하고 있다.
 강화도조약 당시 진무영의 훈련장에서 일본군대가 군사 훈련을 하고 있고, 이를 강화부민들이 구경하고 있다.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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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혁명기에 고종정부가 외국군을 불러온 것은 민족만대의 죄업이었다. 마치 형제끼리 싸우는데 이웃 깡패를 불러들인 격이다. 조선왕조의 창업시기부터 시작된 '뼛속까지 사대망령'의 유전자였다.

틈만 보이면 조선침략의 야욕을 품어온 일본은 기회를 노렸다. 청국의 국세가 기울면서 조선에 대한 지배력도 점차 약화되었다. 임오병란 이후 청국군 3천명, 갑신정변 이후 일본군 2개 대대가 각각 서울에 주둔하고 있었다. 1885년 (고종 22) 4월 조선에서의 세력균형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톈진에서 청국의 직례총독 이홍장과 일본의 전권대사 이토 히로부미 사이에 이른바 '톈진조약'을 맺었다.

주요내용은 ① 청일 양국은 4개월 이내 조선에서 철병할 것. ② 조선 국왕에게 권해 조선의 자위군을 양성토록 하되, 훈련교관은 청일 양 당사국 외의 다른 나라에서 초빙토록할 것. ③ 앞으로 조선에서 어떤 변란이나 중요사건이 발생하여 청일 두 나라 또는 어느 한 나라가 파병할 필요가 있을 때는 먼저 문서로서 연락하고 사태가 가라앉으면 다시 철병할 것 등이다. 이 조약으로 일본은 조선에서 청국의 우월권을 없이하고 동등하고 세력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고종황제 어진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된 고종 황제의 어진. 통천관에 강사포를 입은 모습이다. 고종황제의 초상화는 12점이 제작되었는데, 6점만 전해지고 있다.
▲ 고종황제 어진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된 고종 황제의 어진. 통천관에 강사포를 입은 모습이다. 고종황제의 초상화는 12점이 제작되었는데, 6점만 전해지고 있다.
ⓒ 국립고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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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정부가 청국에 동학 진압군의 파병을 요청하면서, 이같은 '톈진조약'의 내용을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청병을 한 것은 일본에게는 하늘이 준 기회였다. 일본은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하면서 조선에 첩자들을 보내 첩보활동을 시작하고 있었다.

1893년 12월 조선의 정보와 첩보수집을 위해 연습함 쓰쿠바와 경비함 오시마를 조선 인천항으로 파견했다. 이때 첩자들이 조선으로 들어와 1894년 3월 말까지 첩보활동을 기록하고 남긴 것이 일본해군성 자료 「쓰쿠바함의 조선국첩보보고서」이다.

경성과 인천 사이를 오가는 선박, 뱃길, 육로, 경성 부근의 쌀 창고 위치, 조선의 병력 상황, 조선인의 생활습관 등 일본 해군성에 보고된 것에 대해 다루었다.

특히 이때 작성된 첩보 내용 중 「인천ㆍ경성 간 도로시찰 보고」는 인천에서 경성에 이르는 육로와 수로의 상황, 빠른 길, 숭례문을 넘어 한양도성으로 들어가는 방법까지 얼마나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있는지를 살폈다. 7시간이면 경성 공략이 가능한 지도가 작성되어 그해 6월 일본의 조선 무력 침략에 적극 활용되었음을 확인했다. (주석 16)

 
서울 종로구 소재 운현궁의 유물전시관에 소장된 이하응 영정. 서울 종로구 소재 운현궁의 유물전시관에 소장된 이하응 영정.
▲ 서울 종로구 소재 운현궁의 유물전시관에 소장된 이하응 영정. 서울 종로구 소재 운현궁의 유물전시관에 소장된 이하응 영정.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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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사정을 샅샅히 수집한 일본 참모본부는 5월 30일(음 4월 26일) 조선 파병을 결정하고 극비리에 준비를 서둘렀다. 동학농민군이 아직 전주성을 접수하기 전이다. 일본 참모총장은 6월 1일(양) 육해군에 군대파병 명령을 내리고, 뒷날 조선총독이 된 데라우찌 마사다케에게 해상 수송ㆍ운수ㆍ군수선발의 업무를 맡겼다.

다음날인 6월 2일 일본 각의에서 출병을 의결하고 1개 사단 파병에서 혼성여단 파병으로 결정했다. 6월 6일 선발대로 5사단 보병11연대 제1대대 (대대장 이치노해 효에)가 인천항으로 출발했다. 이어서 10일에는 육전대 정예요원 488명이 인천에 상륙하고, 12일 혼성여단 선발대(보병 1개대대 1,000여 명, 공병 50명), 14일에는 제2차 보병21연대 제3중대 255명, 15일에는 지연대 제2대대 780명이 조선에 들어왔다. 17일에는 혼성여단 4,000여 명이 조선 경성과 인천간의 요충지를 점거했다. 일본군은 보병탄약 320발들이 탄약상자 2,024개를 싣고 들어왔다.

일본군의 증파는 계속되었다. 6월 27일 21연대 병력 4,010명과 말 203마리가 인천항에 도착하여 용산 만리창에 포진했다. 7월 6일에는 군악대까지 들어왔다. (주석 17)


일본이 노린 것은 동학농민군의 진압이 아니라 조선왕궁이었다. 6월 7일 조선 정부가 일본군 출병 소식에 엄중히 항의했지만, 허공에 메아리로 그쳤다. 본국에 있던 당시 주한 일본 공사 오토리가 일본군과 함께 다시 한양으로 왔다.

이튿날 7일(양 6월 10일) 오토리 공사가 길을 떠나 마포에 이르렀다. (경성에서 10리 길이다), 우리 정부는 참판 이용직(李容㮨)을 보내 도중에 오토리 공사를 만나 군대를 철수하라고 말하게 했다. 오토리 공사가 대답하기를 "우리는 일본 천황의 명령을 받들고 왔다. 천황의 명령이 아니면 군대를 뺄 수 없다."고 했다. 오토리는 헌병대를 거느리고 경성에 들어와 일본 공관에 주둔했다.

이날 오후 일본병사 150명이 각각 격림포(格林砲), 총신을 여러 개 갖춘 개틀링 기관총(Gatling gun)를 가지고 들어왔다. 병사 100명이 인천과 경성 사이에 있는 높은 산의 주요 지점, 강을 따라 상류와 하류 곳곳에 막사를 짓고 주둔한 뒤 망원경으로 사방을 경계했다. (주석 18)


일본은 대규모의 병력을 조선에 파병하면서 '거류민 보호'를 내세웠다. 그리고 동학농민군 25만 여명을 학살하고, 동학군이 '진압'된 뒤에도 철군하지 않고 눌러앉아 1895년 8월 명성황후를 살해하는 을미사변 등 조선침략의 첨병 역할을 했다. 


주석
16> 박해순, 『1894~일본 조선침략』, 28쪽, 나녹, 2019.
17> 앞의 책, 23~26쪽, 발췌.
18> 정교, 『대한계년사』, 권 2.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동학혁명과 김개남장군‘]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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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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