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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감학원 생존자 이대준씨, 당시 기거하던 숙소 위치 등을 설명하고 있다.
 선감학원 생존자 이대준씨, 당시 기거하던 숙소 위치 등을 설명하고 있다.
ⓒ 이민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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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적 밝은 편이었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솔직해 나를 놀라게 했다. 목소리도 씩씩해 '트라우마'라는 게 그를 비껴갔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대준, 그를 지난 2017년 봄 소년강제수용소 선감학원에서 생을 마감한 소년들이 묻힌 선감묘역(경기도 안산 선감도)에서 만났다. 위령제를 하는 날이었다. 선감학원은 일제강점기인 1942년에 세워져 1982년까지 안산 선감도에서 운영된 소년 강제 수용소다.

어린 시절 겪은 충격적인 일을 그는 남 일처럼 담담하게 말했다. 그 이전에 만난 피해자들처럼 숨이 가빠지거나 눈이 충혈되는 일은 없었다. 울지도 않았다.

긴 내용을 그는 너무 짧게 요약해 아쉬움마저 들게 했다. '고생 많으셨지요?'라고 위로하듯 던진 질문에, 마치 준비하고 있었다는 듯 이야기를 쏟아냈다.

"원래 고아였고요. 수원 보육원에 있다가 열 살 때쯤, 그러니까 1966년에 선감학원에 끌려갔어요. 오자마자 열일고여덟 살 정도 된 사장(숙소의 장)한테 성폭행을 당했어요. 아, 그 일을 당하면서도 저는 그게 성폭행이라는 사실도 몰랐어요. 생살이 찢기는 아픔을 겪으면서도 '소리치면 죽여 버린다'는 말이 무서워 신음도 내지 못했어요.

그게 성폭행이라는 것은 나중에 선생님한테 들어서 알게 됐어요. 엉기적거리면서 걷자 선생이 꼬치꼬치 캐물었고, 결국 사실대로 말하게 된 거죠. 그랬더니 그게 성폭행이라고. 다행히 그 분이 다른 숙소로 옮겨줘서 그 뒤로는 성폭행을 당하지 않았어요."


이렇게 시작된 그의 말. 듣고 있기 힘들 정도로 참담한 내용이었다. 그가 밝고 씩씩한 표정으로 남 이야기하듯 덤덤하게 이야기하지 않았다면 듣는 것을 중간에 포기 했을지도 모른다.

그가 노년이 돼서도 참으로 억울하게 생각한 것은, 학교(선감도 내 선감국민학교. 수용자 일부를 국민학교에 보냈다)에서 급식으로 나오던 건빵 한 봉지 훔쳐 먹고 퇴학을 당한 일이다. 5학년 때였다. 지금 생각해도 고아라고 너무 막 대한 것이다. 부모가 있었다면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그 뒤로는 막노동이 그의 일과였다. 그래도 학교에 다닐 때는 일을 덜 할 수 있었는데 말이다.

건빵은 배고픔을 참을 수 없어 훔쳐 먹었다. 반찬이랍시고 나오는 게 호박, 젓갈 같은 것이었는데, 호박은 익지 않은 채로 나와 못 먹었고 젓갈에서는 구더기가 나와서 먹을 수 없었다. 국에서 쥐머리하고 꼬리가 나온 적도 있다. 그래서 그는 지금도 호박과 젓갈을 먹지 않는다고 말했다.

열여섯 번의 탈출 시도 끝에 자유를 찾았지만
 
선감도에 1942년 소년 강제 수용소 선감학원이 문을 열었다. 사진은 첫 번째 원생들이 대부도 진두포구에 도착한 모습
 선감도에 1942년 소년 강제 수용소 선감학원이 문을 열었다. 사진은 첫 번째 원생들이 대부도 진두포구에 도착한 모습
ⓒ 이하라 히로미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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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감학원 희생 소년 위령제, 위령무
 선감학원 희생 소년 위령제, 위령무
ⓒ 이민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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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라도 매를 맞지 않으면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하루하루가 공포 그 자체였다. 자유가 그리워 수도 없이 도망쳤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그럴 때마다 수도 없이 매를 맞았다.

이대준씨는 19살이 돼서야 탈출할 수 있었다. 열여섯 번의 끈질긴 탈출 시도 끝에 얻은 자유였다. 선감학원 출신이 많은 인천에 왔지만 먹고 살 길은 막막했다. 깡통 들고 밥 얻으러 다니기도 했고 구두닦이도 했지만, 한 번 달라붙은 가난은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 운 좋게 결혼을 했지만 그마저도 실패했다.

그는 "지금은 버스 운전을 하면서 월세방에서 아들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라며 이야기를 마쳤다.

그의 부고가 날아온 것은 2020년 1월 15일. 그와 선감묘역에서 이야기를 나눈 지 2년 6개월여 만이다. 사망 원인은 간암. 어쩌면, 아니 당연히 그는 힘겨운 투병 기간에 나를 만났을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솔직하고 담담할 수 있었던 것일까. 어쩌면 원망이나 창피함 같은 이승의 것을 이미 절반쯤 내려놓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는 암 투병을 하면서도 선감학원 아동 피해 대책협의회 부회장으로 활동하며, 선감학원 피해 진상규명에 앞장서 왔다.

그의 이름 앞에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의미인 '고(故)'라는 글자를 붙여야 한다. 고 이대준(만 61세) 선감학원 아동 피해 대책협의회 부회장이다.

정말로 저승이란 곳이 있다면, 그는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는 어머니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저승이 있다는 것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믿고 싶다. 어머니가 있는 곳으로 편히 가소서.

태그:#선감학원, #소년 수용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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