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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어서 술을 한창 마실 때에는 새해가 시작되면 곧잘 절주(節酒)를 맹세하곤 했었다. 그런데 나이를 먹어가니 이제는 몸이 상해 절주를 맹세할 필요도 없어져 버렸다. 고작해야 막걸리 반 병을 넘기지 않는 주량에 절주를 맹세하는 꼴이 우스운 것이다.

지금도 여전히 소주를 두어 병씩 넘겨 마시는 주당(酒黨) 친구들을 볼 때면 부러움도 일고 걱정도 함께 든다. 종명(終命)할 때까지 불구가 되지 않고 마실 수만 있다면 더없이 좋은 일인데, 어디 그런 행운이 쉬운 것은 아닌 것이다.

음주가 간신히 목을 축이는 수준으로 되어버리니 주흥을 잊은 지도 한참 되었다. 고달픈 인생살이에 취하게 마시고 주흥이 일어야 근심도 털고 즐거워지는데, 그렇지 못하니 한결 무미건조해진 것이다. 하여 취하게 마시지는 못하나 그 기분을 시로서나마 느껴보려고, 옛사람들의 취흥을 노래하는 시를 찾아 대신하게 되었다.



長醉後方何礙        거나하게 취했는데 무엇을 거리끼며
不醒時有甚思        술깨지 않았는데 무슨 고민 있으랴
糟醃兩個功名字     공명이란 글자는 술지게미에 띄워버리고
醅淹千古興亡事     천고의 흥망사는 막걸리에 담궈버리고
曲埋萬丈虹霓志     높은 출세의 뜻은 누룩에 묻어버리세
不達時皆笑屈原非  잘 모르고 모두 굴원이 잘못이라 비웃지만
但知音盡說陶潛是  오직 아는 사람은 도연명이 옳다고 하지.


중국 원나라 시대의 문인 백박(白樸, 1226-1285년)이 쓴 시다. 백박은 몽고에 나라를 잃고 스스로 출사를 포기한 채 시문이나 쓰면서 세월을 보냈다. 시대에 좌절한 괴로운 삶에 당연히 술이 따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대취하여 주흥이 일면 공명을 따지는 세상사 따위야 우스워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충절을 지킨 굴원을 이해하고, 오로지 자신이 도연명의 옳음을 안다는 것이다.

백박이 도연명을 거론하니 도연명의 음주시를 가져오지 않을 수 없다. 도연명이 쓴 음주 연작시 가운데 14번째 수이다.

飮酒 14

故人賞我趣  동네 사람들이 나를 반기어
挈壺相與至  술병 들고서 서로 몰려왔네.
班荊坐松下  소나무 밑에 자리깔고 마시니
數斟已復醉  몇 잔 술에 벌써 취해버렸네
父老雜亂言  동네 어른들 시끄럽게 떠들고
觴酌失行次  술잔도 순서없이 돌아가니
不覺知有我  내가 있는지도 의식 못하는데
安知物爲貴  어찌 부귀가 귀한 줄 알겠는가.
悠悠迷所留  유유히 마시며 아득하게 빠져드니
酒中有深味  술 속에 깊은 맛이 있구나.
 

도연명이 동네 사람들과 어울려 즐겁게 술마시는 모습이 선하게 떠오른다. 서로가 허물없이 잔을 권하고 마시다 보니 모두가 취하게 되는 것이다. 취중에는 자신조차 잊어버리니 부귀영화 따위야 안중에도 없는 것이다. 취한 속에서도 인생의 참뜻을 음미하게 되니, 음주가 인생의 즐거움을 더해 주는 것이다.
 
경주 시골집 마당에서 막걸리를 마시다.
▲ 막걸리 음주 경주 시골집 마당에서 막걸리를 마시다.
ⓒ 배남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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竹葉酒

楚人汲漢水  초나라 사람 한수에서 물길어
釀酒古宜城  의성의 옛법대로 술을 빚었지
春風吹酒熟  봄바람 불어 술이 익으면
猶似漢江淸  오히려 한수의 물처럼 맑았지
耆舊人何在  좋아하던 엣사람들 어디에 있는가
丘墳應已平  무덤의 구릉마저 평평해졌지
惟餘竹葉在  오로지 죽엽주만이 남아
留此千古情  천년의 옛정을 여기 남겼지.


소식(蘇軾, 1037-1101)은 송나라 최고의 문장가로 술을 즐기고 품평을 잘 했다. 소동파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지만, 그가 쓴 적벽부는 불후의 문장으로 애송되고 있다. 적벽부에서도 '강물도 흘러가고 우리도 흘러가고 모든 것은 흘러가지만, 저 달과 바람과 술을 마음껏 즐길 수 있으니 무엇이 더 필요한가'라고 음주의 풍류를 즐기고 있다.

소식은 이 시를 통해 죽엽주를 생생하게 품평하고 있다. 초나라 사람이 한수로 맑게 술을 빚었는데, 그 술을 즐기던 애주가들은 이제 자취도 없는 것이다. 그들이 묻힌 봉분조차도 평평해져 흐르는 세월의 무상함을 절감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직 죽엽주만이 이어져 와서 그때의 정취를 그대로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젊은 시절 죽엽주는 비싼 술이어서 가난한 처지에 어쩌다 마셔보면 정말 맛있는 술이었다. 어쩌다 죽엽청주를 마시며 중국요리를 안주로 곁들이면, 그 호사는 이루 말할 수 없었던 것이다. 빈 술병이 아까워 버리지를 못하고 오랫동안 집안에 두고 본 적도 있었다.

술이 평생을 함께 하는 벗이 될 줄 알았는데, 속병이 생겨 이렇게 빨리 절주해야 될 줄은 몰랐다. 나이가 먹을수록 적적해지는데, 술조차 마음대로 즐기지 못하니 적적함이 더욱 커지는 것이다. 이제는 되돌릴 수 없는 아쉬운 일이지만, 감수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일찍이 20대에 마시게 된 술과 함께 알게 된 당나라 시인 이하(李賀)의 시 '증진상(贈陳商, 진상에게 드림)이 있다. 20대에 좋아하던 시를 40여년이 지나도 여전히 좋아하고 있으니 인생을 함께 해온 것이다. 그때만큼 술을 마시지 못하는 것만 다를 뿐 좋아하는 느낌은 변함이 없는 것이다.

아마도 이 시를 읽으면서 운명적인 공감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회재불우(懷才不遇)했던 이하는 자신의 싯귀대로, 머리가 희어지길 기다리지 않고 27세에 요절했다. 그토록 바라던 하늘은 열리지 않아, 고검이 크게 울리도록 휘둘러 보지도 못한 채 슬프게 떠나간 것이다. 오늘 딱 한잔의 술을 마시면서 다시 그를 조상해본다.

長安有男兒  장안에 한 사내 있어
二十心已朽  나이 스물에 벌써 마음이 늙었다.
楞伽堆案前  능가경을 책상 앞에 두고
楚辭系肘後  초사를 팔꿈치에 괴다
人生有窮拙  인생에 좌절이 있어
日暮聊飮酒  초저녁부터 음주를 즐긴다
只今道已塞  이제 길은 이미 막혔거늘
何必須白首  구태여 머리가 희어지길 기다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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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眼何時開  하늘의 눈은 언제 열리려나
古劍庸一吼  옛날 검 한번 크게 울도록

태그:#주흥, #백박, #도연명, #소식, #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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