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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페미니즘이 뭔지 잘 모른다. 페미니즘을 둘러싼 논쟁과 이슈들은 늘 첨예하고 날카롭다. 말하는 사람들도 하나같이 날이 서있는 것 같다. 조금이라도 틈을 주지않겠다는 태도다. 나는 어디가면 '저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다 이 책을 읽고 깜짝 놀랐다.

장편소설 <여성의 설득>은 페미니스트인 '페이스'가 한 대학에서 강연을 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페이스는 이렇게 말한다.
 
"대학에서 강연을 할 때마다 나는 '저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요...'라고 하는 젊은 여성들을 만나게 되죠. 이 말뜻은 사실 '나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부르지는 않지만 동일임금을 원하고 남자들과 동등한 관계를 맺고 싶고, 당연히 성적 쾌락에 있어서 동등한 권리를 갖고 싶어요. 공정하고 멋진 삶을 살고 싶고요. 내가 여자라는 이유 때문에 억압받고 싶지 않아요'라는 뜻이죠.....(중략)...그러면 나는 항상 이렇게 답하고 싶어요. '그게 아니라면 페미니즘이 대체 뭐라고 생각하죠? 당신이 원하는 삶을 얻게 만들어주는 것이 유일한 목표인 정치적 운동을 부인한다면 그런 것들을 어떻게 얻을 생각이에요?'라고 말이죠." p.44
 
완전히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였다. 이 소설 속에서 강연장에 있던 대학생 '그리어'는 페이스의 강연을 듣고, 그녀를 흠모하게 된다. 아마 내가 그 자리에 있었어도 그랬을지 모른다. 그런 공감대로 시작해서, 나는 이 소설에 빠져들었다. 6백 페이지의 두툼한 책에.
 
메그 월리처의 장편소설 <여성의 설득>
 메그 월리처의 장편소설 <여성의 설득>
ⓒ 걷는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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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어는 어린 시절에 '가슴이 빈약하다'는 성희롱을 당했으며, 대학에 들어와서는 '대런'이라는 남학생으로부터 성추행 당한 고통스러운 기억을 갖고 있다. 그리어는 교내에 대런의 성추행 사실을 공론화하고, 자신처럼 대런에게 성추행을 당한 여성들과 연대하여 대런의 처벌을 요구했지만, 학교 측에서는 심의회를 열고 '봉사활동' 하는 수준에서 사건을 마무리한다.

뼈저린 무력함을 느끼던 그리어. 혼란스러워하던 그리어 앞에 '페이스'가 나타난다. 60대의 나이에도 여전히 총명하고 매력있고 지적인 페미니스트. 미국 여성들과 페미니스트들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여성이다.

이 소설 <여성의 설득>은 책벌레에 우물쭈물하고, 수줍은 성격의 그리어가 자신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삶에 용기를 주는 페미니스트가 되기까지의 과정과 성장통을 담은 작품이다. 아울러 진정한 페미니즘이란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만드는 작품이다.

페이스는 대학 강연에서 알게 된 그리어의 재능을 눈여겨보고, 자신이 운영하는 사무실에서 일할 것을 제안한다. 하지만 시작도 하기 전에 운영난으로 문을 닫게 된 상황. 그러다 자신의 옛 연인이자 재벌인 에밋으로부터 후원을 받게 된 페이스가 여성 재단을 세우고, 다시 그리어에게 손을 내민다. 그리어는 페이스와 함께 여성들의 불평등과 인권 침해를 사회에 알리고, 그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세미나 등의 프로그램을 계획한다.

페미니즘, 무엇이 맞고 무엇이 틀릴까

하지만 그리어는 재단의 규모가 커지고 유명해짐에 따라, 자신들의 사업이 부유층 여성들의 향유를 위한 모임으로 변질되어간다는 회의를 느끼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마침내 사건의 본질을 뒤엎는 이벤트의 추악한 진실을 알게 되고, 그리어는 페이스에게 그 사실을 알린다.

이것이 과연 우리들이 지향했던 페미니즘이었던가?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은 운동과 신념이 변질되고 자본에 이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면? 20대의 혈기왕성한 페미니스트라면 아마 그 집단을 박차고 뛰쳐나왔으리라. 그리어도 페이스에게 그런 반응을 당연히 기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페이스의 반응은 냉담했다.

페이스는 자신이 많은 사람들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한 재단의 대표임을, 자본에 이용당한다는 모욕감보다는 지금 하고 있는 일의 순기능이 더 많다는 신념을 지키기위해 그 사실을 묵과한다. 다양한 사업들을 계획하고, 수많은 여성들을 만나는 순간 순간, 자신의 철학과 현실적 문제에서 고민해야 했던 페미니스트. 그에게 모든 상황은 '저울질'하고 타협해야 하는 선택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페이스는 자본에 이용당하더라도 여성들을 구할 수 있는 길을 택한다. 그 일로 그리어는 페이스와 멀어지게 된다. 그리어에게는 스승이자 롤모델이었던 페이스가 그런 비겁한(적어도 그리어의 눈에는) 행동을 했다는 사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실망감이자 배신감이었을테니.

이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가치와 다양한 인물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생각했다. 페이스에게 누가 돌을 던질 수 있을 것인가. 나는 20대 그리어의 열정과 순수함, 60대 페이스의 노련함과 타협하는 지혜도 모두 존중한다. 페미니즘은 여전히 잘 모르지만, 페미니즘이 성숙하기 위해서는 그리어, 페이스같은 사람 모두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둘 중 어느 한 쪽이 맞고 한 쪽이 그르다고 하기엔 세상에는 많은 가치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 소설 속에는 다양한 '여자'들이 등장한다. 여자를 위해 목소리를 내는 여자, 여자를 미워하는 여자, 여자를 이용하는 여자, 여자를 질투하는 여자... 그리고 영화의 엑스트라처럼 아주 잠깐 나타났다 사라지는 여자들도 있다. 집안 청소부나 가정부들이다. 그러나 그들의 존재는 보이지 않는 공기처럼 다른 여자들과 남자들을 포근히 감싸준다.

페이스와 그리어의 관계 못지않게 이 소설 속에서 중요한 인물이 있다. 그리어의 애인인 '코리'. 그는 프린스턴 대학을 졸업한 명석한 인재로서, 미래가 촉망된 젊은이였다. 하지만 자신의 어린 남동생이 어머니의 실수로 죽게 되고, 집안이 풍비박산이 되자 핑크빛 미래를 포기하고 고향으로 내려온다.

엄청난 연봉을 받던 소위 잘나가던 젊은 청년이 따분한 시골에 내려와 하는 일이란 온전히 어머니를 돌보는 일이었다. 그리고 빨래, 청소, 요리. 그는 누군가를 돌보고 살림을 하면서 그 일이 얼마나 숭고하고 중요한지, 자신의 삶이 많은 여성들의 보살핌 속에서 지탱해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코리)는 전에는 제대로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던 청소라는 단순한 행위에서 놀랄 만큼 자부심을 느꼈다. 이건 평생 동안 어머니가 그를 위해 해주었던 일이었고 그 후에는 잠깐 동안 자이가 맡았던 일이었다. 그리고 가끔씩 고등학생 때나 대학 방학 때 그리어가 집에 오면 자연스럽게 코리가 아무 데나 벗어놓은 양말과 음료 캔을 치워주곤 했다. 평생동안 여자들이 그의 청소를 대신해주었고, 그는 여자들로부터 보살핌을 받았다. 이제야 그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p.260

아직도 페미니즘을 잘 모르기는 마찬가지만, 페미니즘이란 누군가를 살리는 마음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건 여성만의 전유물도 아니고 이념이나 논쟁거리도 아니다. 인간이 인간에게 갖는 기본적인 애정. 어려움에 처해있는 사람이라면 누가 됐든 도와주고 싶은 마음,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받거나 침해받아서는 안 된다는 상식이 그 바탕 아닐까.

페이스가 페미니스트로 활동하게 되었던 배경에는 1960년대 미국의 히피문화와 반전운동, 페미니즘운동이 있는데 그 부분은 마치 한 편의 별개의 단편소설을 읽는 것처럼 흥미롭다. 세상의 잣대와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히피처럼 살아가는 그리어의 부모, 그리어의 절친이자 동성연애자인 '지', 모든 것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삶의 행복을 만나게 된 코리 등 다양한 인물군상의 이야기들도 보석처럼 반짝인다. 미드 <굿 와이프>의 원작자로도 잘 알려진 인기작가 메그 월리처의 소설이다.

여성의 설득

메그 월리처 (지은이), 김지원 (옮긴이), 걷는나무(2019)


태그:#메그 월리처, #페미니즘 , #여성의 설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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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픈 것은 삶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도스또엡스키(1821-18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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