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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개평마을 출신 일두 정여창(1450-1504)과 후대 사람이지만 경주 양동마을의 회재 이언적(1491-1553)은 대학자로 둘의 인생행로는 많이 닮았다. 이언적은 10세 때, 정여창은 18세에 비교적 이른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둘 다 걸출한 스승을 두었고 다 같이 동방오현(東方五賢)에 이름을 올렸다. 이언적은 외삼촌 손중돈(1463-1529) 손에 자라 '태생적으로' 손중돈이라는 거물 스승을 얻었고 정여창은 함양군수로 부임한 김종직을 '운명적으로' 만나 김굉필과 함께 제자가 되었다. 김종직은 정여창을 죽음에 이르게 한 무오사화의 단초를 제공하였으니 둘의 만남은 운명적이었다.

조선전기 성리학 학맥은 김종직(1431-1492)에서 발원하였다. 정몽주에서 길재, 김숙자(김종직의 아버지)를 거쳐 김종직으로 계승된 영학파 학맥은 김종직의 제자 손중돈, 정여창, 김굉필로 이어진다. 다시 한 갈래는 손중돈, 이언적을 거쳐 이황으로 이어져 퇴계학파가 되고 다른 갈래는 김굉필, 조광조로 계승되어 기호학파의 원연(遠緣)이 되었다. 다른 갈래는 조식으로 전승되어 남명학파를 이뤘다.
   
이 중에 김굉필, 정여창, 이언적, 조광조, 이황을 동방오현이라 부른다. 무오, 갑자, 기묘, 을사, 정미사화의 참화를 겪으면서 주도세력으로 등장한 사림세력은 권력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성리학의 계보를 세우기 위해 이들을 성균관 문묘에 종사(從祀)한 것이다.
  
남계서원 강익을 비롯한 고을선비들은 정여창이 태어난 개평마을 근처에 남계서원을 세웠다. 소수서원에 이어 두 번째 세워진 서원이다. 최근 남계서원, 옥산서원을 포함한 9개 서원이 묶여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 남계서원 강익을 비롯한 고을선비들은 정여창이 태어난 개평마을 근처에 남계서원을 세웠다. 소수서원에 이어 두 번째 세워진 서원이다. 최근 남계서원, 옥산서원을 포함한 9개 서원이 묶여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 김정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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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의 말년 행로도 비슷하다. 이언적은 1547년 을사사화의 여파로 일어난 양재역벽서사건(정미사화)으로 평안북도 강계로 유배되고 정여창은 1498년 무오사화로 함경도 종성에 유배되었다. 둘 다 유배지에서 사망하여 두 달여 만에 고향에 묻혔다. 후대의 고을선비들은 각각 함양에 남계서원과 경주 안강에 옥산서원을 세워 이들의 학문과 덕행을 기렸다.

화림동(花林洞) 계곡 군자정

정여창은 16세(1465년)에 정종의 12남 이말생의 딸, 완산 이씨와 결혼하였다. 종친의 사위가 된 것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관료로 있었고 정여창 누이도 태종의 종손인 영인군 이순에게 시집간 점을 미루어보면 정여창 집안은 함양의 재지사족에 머물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함양은 뼈대 있는 고을로 안동에 비유되곤 한다. 이를 말해주듯 육십령고개 넘어 풍광 좋은 화림동계곡에 많은 정자가 세워졌다. 한때 정자가 많아 '팔담팔정'으로 불리었으나 현재 농월정(弄月亭)과 거연정(居然亭), 군자정(君子亭), 동호정(東湖亭)만 남아 있다.
  
군자정 정경 1802년 정여창의 처가마을인 봉전마을에 세거하던 정선전씨 전세걸이 정여창을 기리기 위해 천변 너럭바위, 유영대위에 지은 정자다. 군자가 머무르던 곳이라 하여 군자정이라 하였다.
▲ 군자정 정경 1802년 정여창의 처가마을인 봉전마을에 세거하던 정선전씨 전세걸이 정여창을 기리기 위해 천변 너럭바위, 유영대위에 지은 정자다. 군자가 머무르던 곳이라 하여 군자정이라 하였다.
ⓒ 김정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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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 정여창과 관련 있는 정자는 군자정. 정여창의 처가마을인 봉전마을 곁에 있다. 정여창은 처가에 들를 때마다 천변 너럭바위, 유영대에서 자주 시를 읊조리며 노닐었다 한다. 군자정이 세워진 것은 300여 년 뒤의 일이다. 1802년 봉전마을에 살던 전세걸은 정여창을 흠모한 나머지 유영대 위에 정자를 짓고 그를 기렸다.

섬진강변 악양정

정여창은 23세 때 때마침 함양군수로 부임한 김종직을 만나 문하생이 되었다. 그 후 3년간 지리산에 들어가 경학과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모친의 권유로 34세 뒤늦은 나이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모친이 사망한 뒤, 39세 때 아예 거처를 옮겨 섬진강 변에 악양정(岳陽亭)을 짓고 강서(講書), 강도(講道), 음영(吟詠)하며 살았다. 41세에 문과에 급제하고 45세에 안음현감이 되어 선정을 베풀기도 하였지만 풍류를 즐기며 살려한 것이 그의 속마음이었다. 20대 지리산행이 경학수행이었다면 40대 지리산행은 풍류의 은거였다.
  
악양정 정경  하동군 화개면 덕은사 경내에 있는 정자로 정여창은 이곳에 은거하며 학문을 연구하고 풍류를 즐겼다.
▲ 악양정 정경  하동군 화개면 덕은사 경내에 있는 정자로 정여창은 이곳에 은거하며 학문을 연구하고 풍류를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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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는 대가를 알아보는 법이다. 처사(處士) 남명 조식은 지리산을 유람하며 남긴 지리산유람기<유두류록(遊頭流錄)>에 정여창 옛집을 보고 정여창에 대한 감상을 남겼다.

"선생은 바로 천년의 유종(儒宗, 유학자들이 우러러보는 큰 학자)이었다. 학문이 깊고 독실하여 우리나라 도학의 실마리를 열어준 분으로 처자식을 이끌고 산속으로 들어가 내한(內翰)을 거쳐 안음현감이 되었다. 뒤에 교동주(喬桐主, 연산군)에 의해 죽었다. 이곳은 삽암에서 10리쯤 떨어진 곳이다. 밝은 철인(哲人)의 행과 불행이 어찌 운명이 아니겠는가?"

남계서원과 굴뚝

정여창의 꿈은 무오사화로 산산조각난다. 49세(1498년)에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되었다. 장형 100대에 9년 유배형, 9년을 다 채우기도 전 1504년 봄, 55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두 달 뒤 고향땅에 묻히고 그 해 9월 갑자사화로 부관참시 당했다.
 
남계서원과 야경(野景)   남계서원은 연화산 끄트머리 경사면에 세워져 남계서원 사당에서 내려다보는 야경이 좋다. 평평한 땅에 남계천이 휘돌아가고 앞산이 몰려와 생기가 가득하며 뒷산은 물러나 흐릿하여 유연하다.
▲ 남계서원과 야경(野景)  남계서원은 연화산 끄트머리 경사면에 세워져 남계서원 사당에서 내려다보는 야경이 좋다. 평평한 땅에 남계천이 휘돌아가고 앞산이 몰려와 생기가 가득하며 뒷산은 물러나 흐릿하여 유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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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2년 정여창을 사모한 개암 강익의 주도아래 고을선비는 개평마을 가까이 남계서원(灆溪書院)을 세웠다. 연화산(蓮花山) 끝, 경사면에 들어서 야경(野景)이 좋다. 사방 들판이 평평하고 들판사이에 남계천이 감돌아 얽힌 곳이다. 앞산 백암산은 몰려와 소처럼 누웠고 뒷산은 지리산으로 물러나 유연하면서 생기가 가득하다.

남계서원은 홍살문, 누각, 연지, 기숙사, 강학공간,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누각 풍영루(風咏樓)는 돌기둥의 골기가 뻗쳐 기상이 드높고 풍영루 아래 두 연지(蓮池)는 그 골기를 연지 속에 담았다. 기숙사 양정재(養正齋)와 보인재(輔仁齋)가 마주 보고 한단 위에 강학공간 명성당(明誠堂)이 우뚝 서 있다. 사당은 명성당 뒤 가파른 돌계단 끝에 맺혀 있다.
  
풍영루와 연지 풍영루는 정여창의 풍류의 기상을, 애련헌과 영매헌 앞에 조성해 놓은 두 연지는 매화와 연꽃을 사랑한 정여창의 마음을 담은 것이다.
▲ 풍영루와 연지 풍영루는 정여창의 풍류의 기상을, 애련헌과 영매헌 앞에 조성해 놓은 두 연지는 매화와 연꽃을 사랑한 정여창의 마음을 담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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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계서원 사당 강학공간인 명성당에서 멀리 떨어진 언덕 위에 침묵의 제향공간, 사당을 마련하였다.
▲ 남계서원 사당 강학공간인 명성당에서 멀리 떨어진 언덕 위에 침묵의 제향공간, 사당을 마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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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 이름에 정여창의 풍모와 기상, 풍류가 들어 있다. "바람을 쐬고 시를 읊조린다"는 풍영루는 누각 위에서 활달한 자연을 감상하고 인공적으로 조성한 연지를 조경 삼아 휴식하고 풍류를 잊지 말라는 뜻이다. 정여창 후손 정환필은 '이 다락에 오르면 마음이 넓어지고 정신이 편안해지며 마음과 정신이 자연 속에 자맥질한다' 하였다.
  
풍영루 풍영루 화강암 돌기둥의 골기는 정여창의 기상을 닮았다. ‘바람을 쐬고 시를 읊조린다.’는 풍영루는 정여창의 풍류의 기상을 아로새긴 것이다.
▲ 풍영루 풍영루 화강암 돌기둥의 골기는 정여창의 기상을 닮았다. ‘바람을 쐬고 시를 읊조린다.’는 풍영루는 정여창의 풍류의 기상을 아로새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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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계서원의 문은 원래 준도문(遵道門)이었다. 현재 '준도문' 편액이 풍영루 안쪽에 걸려 있다. 준도는 중용의 "군자는 알아주는 이가 없어도 '도(道)'를 좇아 행한다(군자준도이행 君子遵道而行)"에서 나오는 말이다. 준도문 이름은 정여창의 군자의 풍모를 그리며 지은 것이다.
  
보인재와 영매헌  경사진 땅을 평평하게 정지 작업하지 않고 경사진 땅에는 누마루를 내고 위의 평평한 땅에는 방을 들였다. 아궁이는 누마루 아래 벽체에 만들어 놓았다.
▲ 보인재와 영매헌  경사진 땅을 평평하게 정지 작업하지 않고 경사진 땅에는 누마루를 내고 위의 평평한 땅에는 방을 들였다. 아궁이는 누마루 아래 벽체에 만들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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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재와 서재는 누마루와 방으로 되어 있다. 방에 누마루를 낸 발상이 기가 막히다. 경사진 땅에는 누마루를 내고 한단 위 평평한 땅에는 방을 들인 것이다. 동재 방은 양정재, 누마루는 애련헌(愛蓮軒)이고 서재 방은 보인재, 누마루는 영매헌(咏梅軒)이다. 연꽃을 사랑하고 매화를 노래한다는 애련헌과 영매헌은 연꽃과 매화를 사랑한 정여창의 뜻이 깃들어 있다.

남계서원 굴뚝은 꾸미지 않아 더 좋아 보인다. 동재굴뚝은 양정재 측면 기단에 있는데 엉성하여 존재감 없이 보인다. 서재굴뚝은 보인재 뒤편 기단에 있는 원시적인 기단굴뚝으로 훼손되지 않은 예전 그대로의 모습이다. 뒤편벽체에 있는 명성당 굴뚝은 막혀 있어 굴뚝인지 분간조차 하기 어렵다.
  
양정재 굴뚝 양정재 굴뚝은 측면 기단에 있다. 가래굴만 낸 원시적인 굴뚝이다. 아궁이는 애련헌 누마루 아래 벽체에 만들어 놓았다.
▲ 양정재 굴뚝 양정재 굴뚝은 측면 기단에 있다. 가래굴만 낸 원시적인 굴뚝이다. 아궁이는 애련헌 누마루 아래 벽체에 만들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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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청 굴뚝   사당 경내에 있는 전사청(제기를 보관하고 제사 음식을 장만하는 곳) 뒤쪽에서 조용히 제 역할을 다하고 있다. 군자는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어도 도를 좇는다 하였으니 이 굴뚝이 군자처럼 보인 이유다.
▲ 전사청 굴뚝  사당 경내에 있는 전사청(제기를 보관하고 제사 음식을 장만하는 곳) 뒤쪽에서 조용히 제 역할을 다하고 있다. 군자는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어도 도를 좇는다 하였으니 이 굴뚝이 군자처럼 보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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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볼 만한 굴뚝은 사당 안에 있는 전사청(典祀廳) 뒤편의 굴뚝이다. 이 서원에서 가장 후미진 곳에서 숨죽이고 있다. 그러나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제 도리(道理)를 다하고 있다. 아주 작고 꼿꼿한 군자의 모습이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곳에서 도리를 다하는 전사청의 굴뚝에서 알아주는 이 없어도 도를 좇는 군자, 정여창의 그림자가 아른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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