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14 09:09최종 업데이트 20.04.24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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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필을 수리하며 만난 사람들의 따뜻한 사연과 그 속에서 얻은 깊은 통찰을 전합니다. 갈수록 디지털화 되어가는 세상에서, 필기구 한 자루에 온기를 담아내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리고 싶습니다. 온/오프(On/Off)로 모든 게 결정되는 세상이지만, 그래도 아날로그 한 조각을 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는 펜닥터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기자말]
만년필이라는 '쓸 것'을 제대로 수리해야겠다고 다짐하게 된 데는 나름의 까닭이 있습니다. 단종된 지 오래라 더 이상 부속을 구할 수도 없어 어디서도 받아주지 않았다고, 마지막이란 심정으로 찾아왔다고 하는 분들을 외면하고 싶지 않아서였습니다. 수리 비용의 많고 적음과 상관없이 어떻게든 살려내 다시 쓰고 싶다는 분들의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멀리 부산, 제주도에서 펜 한 자루 손에 쥐고 올라온 분들과 마주할 때면, 만년필이란 것이 '그저 뭔가를 끄적이는 데만 목적이 있는 도구'가 아님을 느낍니다. 무시로 찾아드는, 족히 30~40년은 더 된 낡은 만년필들. 단순히 금전적 가치로 환산하면 얼마 되지 않지만, 그 안에 담긴 세월의 깊이와 무게를 가늠할 수 없기에 값을 매길 수 없는 도구. 만년필은 제게 그런 것이었습니다.


내 손에 쥐어진 '쓸 것'에 단순한 필기도구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면, 펜은 개인의 역사가 고스란히 봉인된 마법의 램프가 됩니다. '이야기 틀'이 됩니다.

오래된 사진 한 장을 들여다보면, 그 안의 내 얼굴과 옷차림, 풍경을 통해 잠깐 시간여행을 하게 됩니다. 굳이 기억을 더듬지 않아도 저절로 그때의 날씨나 기분, 있었던 일들이 떠오릅니다. 만년필도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오래된 펜을 손에 쥐면 사진을 통해 거슬렀던 시간보다 더 멀리 시간여행을 떠날 수 있습니다. 사진은 찍힌 그때의 기억만을 떠올리게 하지만, 만년필은 훨씬 더 오래전 오늘의, 다양하고 입체적인 장면들을 띄워줍니다. 세월의 더께가 담뿍 얹힌 오래된 만년필의 가치는 여기에 있습니다. 그저 손에 쥐는 것만으로, 몇 글자 쓰는 것만으로 세월을 거스를 수 있습니다.
 

펠리칸 문장 펠리칸의 시대별 문장 변천사(이해를 돕기 위한 캡처 사진임을 밝힙니다). ⓒ 펠리칸(Pelikan)

 
1832년 독일 하노버의 작은 공방에서 화방도구 생산과 함께 태동한 펠리칸(Pelikan)은, 1878년 오스트리아 출신 화학자 군터 와그너(Gunther Wagner)의 문장인 '펠리칸 모자상'을 등록하며 본격적인 행보를 시작했습니다.

펠리칸은 1901년 두터운 마니아층을 가진 잉크중 하나인 '펠리칸 4001'을 출시했으며, 1929년 피스톤필러를 채용한 펠리칸 최초의 만년필을 선보이며 주목받습니다. 1883년 루이스 에드슨 워터맨(Lewis Edson Waterman)에 의해 시작한 워터맨사보다 50여 년 더 빨리 문을 열었지만, 만년필은 그와 비슷한 세월이 더 지난 뒤에야 선보입니다.

워터맨, 파카, 몽블랑, 심지어 쉐퍼, 오로라보다도 늦게 만년필 생산 대열에 합류한 펠리칸. 하지만 현대 만년필계 최강자가 '몽블랑 149'라 한다면, 그에 맞상대할 가장 강력한 대항마를 '펠리칸 M800'이라 부릅니다. 펠리칸 최초의 문장엔 어미새가 한 마리, 아래 아기새가 네 마리였습니다. 자세히 보면 1957년 문장부턴 아기새가 두 마리로 줄었고, 현재엔 한 마리 더 줄었습니다. 펠리칸 애호가들에겐 문장의 형태와 아기새 숫자를 기준으로 생산 시기를 가늠하는 것이 소소한 즐거움이기도 합니다.

강아지가 질겅질겅 씹어버린 펜촉

어느 날 제게 곤란함이 가득 담긴 문의 쪽지가 왔습니다.

"안녕하세요. 이걸 어쩌지요? 키우는 강아지가 그만... 잠깐 한눈 판 새 만년필 펜촉을 질겅질겅 씹어버렸어요. 친구에게 소개받고 연락드렸습니다만, 아무래도 이건 힘들겠지요?"

만년필 사용자들은, 대부분 펜을 과할 정도로 아끼면 아꼈지 함부로 다루지 않습니다. 실수로 펜이 책상에서 구르거나, 손에서 미끄러져 바닥으로 떨어지는 경우는 있지만, 추락한 펜을 발로 한 번 더 밟아 캡(Cap, 만년필 뚜껑)이나 배럴(Barrel, 손에 쥐는 몸통 부분)이 두 동강 나는 경우는 드뭅니다.

이 펜은 펠리칸의 상징과도 같은 모델 소베렌 M800, 그중에서도 스페셜에디션에 속하는 톨토이즈쉘 브라운(Tortoiseshell Brown) M촉입니다.

펠리칸 만년필의 특징은 명확합니다. 기본적으로 레진(Resin) 소재를 사용해 손에 쥐었을 때 따뜻한 느낌이 먼저 듭니다. 펜이 가벼워 장시간 필기 시 손목 부담이 덜하고, 몸통 전체에 충전하는 피스톤필러(Piston Filler) 방식이라 한 번에 주입 가능한 잉크 양이 많으며, 정확히 잠기는 트위스트 방식 캡을 채용해 안정성이 뛰어납니다.

만년필 펜촉은 굵기에 따라 EF(Extra Fine)촉부터 3B촉까지 10여 가지 이상 다양한 선택지가 있습니다. 이외에도 OM(Oblique Medium)촉 등 기울어진 형태에 따라 구분하는 펜촉, 1.1mm부터 시작하는 캘리그래피용 계열의 펜촉, 세필 위주의 일본브랜드에서 생산하는 UEF(Ultra Extra Fine)촉, 기타 특수제작 펜촉까지 수십 종이 있습니다. 대부분 사용자들은 EF, F, M촉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게 보편적입니다.
 

펠리칸의 펜촉 종류 구분(이해를 돕기 위한 캡처 사진임을 밝힙니다). ⓒ 펠리칸

 
EF촉이 통상 다이어리 메모처럼 작은 글씨를 섬세하게 필기하기 위한 용도라면, F(Fine)촉은 편지, 낙서 등 일상적인 용도로 주로 쓰이고, M(Medium)촉은 상대적으로 굵은 글씨, 이를테면 서명용에 가깝다 할 수 있습니다. 펜촉 선택은 지극히 개인적 취향에 따른 부분이니 정답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M800은 펠리칸의 상위모델에 속하며 펜 무게가 대략 30g 정도, 손에 쥐었을 때 꽉 차고 묵직한 느낌입니다. 흐름 좋은 펜 중 하나인 M800에 M촉이 장착됐다는 건, 둘 중 하나일 확률이 높단 얘기입니다. 사무실 책상 위에 두고 서류 서명용으로 쓰거나, 일이 잘 안 풀려 답답할 때 그저 슥슥 긋는 것만으로도 속이 시원해질 그런, 풍부한 흐름의 스트레스 해소용이거나 말이지요.

이 펜만 살려낼 수 있다면

등기우편으로 도착한 펜은 충격적이었습니다. 여태 손본 수천 자루의 펜 중 이런 경우는 처음입니다. 그저 제법 휜 상태겠지, 어지간한 펜보다 조금 더 꺾인 정도겠지 짐작했을 뿐, 설마 이런 모습일 줄 어떻게 알았겠어요? 일단 시도해보자. 녹록지 않은 상황인 건 분명하지만, 머리를 맞대보면 뭔가 방법이 생기지 않겠느냐... 그런 온갖 희망적인 말들을 끄집어냈던 걸 후회했습니다.
 

펠리칸 M800 펜촉 수리 전 ⓒ 김덕래

 

펠리칸 M800 펜촉 수리 전 ⓒ 김덕래

  
어떻게 하지? 뭐라 설명해야 하지? 이 정도 상태면 수리 불가란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하지? 대체 이런 펜은 어디를 어떻게 손을 대야 하지? 가능하긴 한 걸까? 펜촉엔 손도 못 댄 채, 이틀 내내 그런 고민만 했습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죽하면 내게 연락했을까. 그간 오래 만년필을 써온 분이니, 이런 상태의 펜은 고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을 텐데... 입장을 바꿔놓고 보면 그 사람이 보입니다. 아끼는 펜을 실수로 떨어뜨린 게 아니고, 잠깐 고개 돌린 새 강아지가 물어버렸다고 하셨습니다. 화를 낼 수도 없었을 그 막막한 심정을 어쩐지 알 것만 같았습니다.

때때로 솔직함은 최선의 방책이 됩니다.

"뭐라 말씀드려야 좋을지 모르겠는데, 제가 생각한 것 이상이에요. 사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대야 할지 감이 안 와요. 살려내지 못할 확률이 99%고, 요행히 다시 쓸 수 있게 된다면 말 그대로 기적이에요."

"괜찮아요. 저도 살려낼 수 있을 거라 크게 기대하진 않아요. 다만 그간 오래 쓴 펜이라 정이 들어, 한번 손이라도 써보고 싶었던 것뿐이에요. 상식적으로 이런 펜을 어떻게 다시 쓸 수 있게 하겠어요. 어떻게 들리실지 모르겠지만, 제겐 그저 필기만 하는 도구 이상의 의미가 있는 펜이에요. 어차피 새 촉으로 교체해야 할 수밖에 없겠지만, 뭔가 시도라도 해보고 싶었던 거니 부담 갖지 않으셔도 됩니다."

상대가 담담히 얘기하니 되려 뜨거워졌습니다. 혹시 내가 그간 손보기 힘든 펜은 의식적으로 외면했던 건 아닐까, 그래서 고쳐낸 확률이 높았던 건 아닐까, 그래놓고 많이 살려냈다며 홀로 자만한 건 아닐까, 하고요.

저는 펜을 수리할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합니다. 오늘 이 펜만 고칠 수 있다면, 앞으로 다른 펜은 고치지 못해도 좋다고. 그러니 이 펜은 어떻게든 살려낼 재주를 달라고. 이번에도 그런 심정이었습니다. 

마음을 가다듬고 망가진 펜과 마주했습니다. 누군가의 표현처럼 마치 춤을 추듯 하늘거리는 펜촉을 보며, 잘 손봐졌을 때의 모습을 상상합니다. 손을 뻗어 펜촉을 이렇게, 또 저렇게 매만져봅니다. 살짝살짝 휘었다 폈다 반복하며 아까 상상했던 그 모습에 가깝도록 계속 다듬어갑니다. 그렇게 며칠이 빠르게도 흘렀습니다. 시간은 얼마가 걸려도 좋았습니다. 살려낼 수만 있다면요.
 

펠리칸 M800 펜촉 수리 후 ⓒ 김덕래

  

펠리칸 M800 펜촉 수리 후 ⓒ 김덕래

 
펜촉도 펜촉이지만 뒤를 받쳐주는 피드(Feed)도 만만찮게 상했습니다. 강아지가 껌인 양 씹어댔는데 멀쩡하면 그게 이상한 거지요.

손을 댔지만 온전하진 않습니다. 마치 빗살처럼 생긴 피드의 콤(Comb)도 원래 모습을 떠올리기 힘듭니다. 그래도 뭉개진 부분 최대한 살려냈고, 원형을 찾기 힘든 곳은 흔적이라도 냈습니다. 한동안 방치해 뻑뻑해진 피스톤도 분해해 손봤습니다. 펠리칸 M800에 걸맞은 컨디션까지 끌어올렸습니다. 전력을 다했습니다. 유일한 수리도구인 손톱이 여기저기가 패었습니다. 잉크가 짙게 밴 손끝이 이처럼 보기 좋았던 적이 있었나 싶습니다.
 

유일한 수리도구, 손 ⓒ 김덕래

 
완벽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무리 없이 써집니다. 다행입니다.

조금은 달라진 펜촉도, 피드도 지금 이 모습 그대로 인정하면 마음이 편해집니다. 외형은 험하지만, 쓸 수 있습니다. 더 쓰임을 다할 수 있습니다. 가족과 다름없을, 이 펜을 물어버린 강아지도 언젠간 나이가 들 테고, 그러면 기력도 지금 같진 않을 겁니다. 하지만 뛰진 못해도 걸을 순 있는 것처럼, 큰 수술 받은 펜이라 생각하고 더 아껴주세요. 그러면 지금의 이 컨디션 최대한 오래 유지할 수 있습니다. 
 

11)펠리칸 M800 시필 펠리칸 만년필 M800 톨토이즈쉘 브라운 M촉, 수리 후 시필테스트 ⓒ 김덕래

 
* 펠리칸(Pelikan) : 몽블랑과 함께 독일을 대표하는 필기구 업체 중 한 곳. 브랜드 대표모델인 펠리칸 M200은 필기구 애호가들에게 '고시용 만년필' 이라는 애칭으로 불릴 만큼 고객층이 두터움. 스틸촉과 금촉, 일반라인과 한정판. 적극적인 투트랙(Twotrack) 전략 구사로 만년필 입문자부터 수집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수요층을 아우름.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광주여대신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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