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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장 우측에 자리한 '동학농민군 출진상'.
 광장 우측에 자리한 "동학농민군 출진상".
ⓒ 안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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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토현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동학농민군은 용기백배하며 대오를 정비하고 다음 출정을 준비했다.

고부관아를 점거한 데 이어 별다른 희생없이 황토현에서 관군을 물리침으로써 사기가 충천하고 연합군의 성격인데도 모두 한부대처럼 움직였다.

황토현 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이 크게 승리했다는 소문은 사방으로 전해졌다. 소문은 풍문을 낳고 풍문은 각종 참설과 유언비어를 새끼치면서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갔다. 앞으로 세상은 동학농민군이 지배하게 될 것이라는 소문이었다.

여기에 동학농민군은 총을 맞아도 죽지 않는다는 소문이 덧칠되면서 신비감과 외경심이 상승작용을 일으켰다. 실제로 농민군은 동학의 부적을 몸에 간직하고 전장에 나갔다. 이런 소문이 관군에게 알려지면서 관군은 움츠리고 사기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황토현에서 개가한 농민군은 그날 해질 무렵 정읍으로 진격하였다. 지휘부가 가장 먼저 정읍을 공격한 것은 황토현의 여세를 몰아 전주성을 점령하기 위한 전단계 전략이였다.
 
 
동학혁명 전봉준과 동학농민운동군.
▲ 동학혁명 전봉준과 동학농민운동군.
ⓒ 홈페이지 동학농민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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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황토현에서 출발, 점심 때 조금 지나 모천강에서 점심과 휴식을 취하고 연지원을 거쳐 정읍 관아로 들어 분탕을 치고 정읍의 보부상 점막(店幕)을 불태우고 밤늦게 삼거리에서 잠을 잤다. 황토현에서 삼거리까지는 약 35리의 거리였다. 이들은 신바람이 나서 초여름의 들판을 내달렸다.

다음날 그들은 흥덕을 거쳐 고창으로 들이닥쳤다. 농민군들은 고창성을 점령하고 옥문을 깨고 잡혀있던 농민군 7명을 풀어줬다. 그리고 바로 성 앞에 있는 만석군의 토호로 온갖 불법과 횡포를 저지른 은수룡(殷壽龍)의 집을 부수고 불태웠다.

그리고 성내의 군기를 빼앗고 장부를 거두어들이면서 이날 밤은 이곳에서 잤다. 황토현 이후 토호의 집을 불태운 일은 이것이 처음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악질 구실아치와 토호 · 양반만을 골라 집을 불태우거나 잡아 족쳤던 것이다. (주석 1)

 
동학농민군이 점령한 전주성 풍남문(豊南門)의 1977년 현재 모습. 사진 출처 : <한국백년>. 동학농민군이 점령한 전주성 풍남문(豊南門)의 1977년 현재 모습. 사진 출처 : <한국백년>.
▲ 동학농민군이 점령한 전주성 풍남문(豊南門)의 1977년 현재 모습. 사진 출처 : <한국백년>. 동학농민군이 점령한 전주성 풍남문(豊南門)의 1977년 현재 모습. 사진 출처 : <한국백년>.
ⓒ <한국백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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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부상(褓負商)'이란 봇짐장수와 등짐장수를 합친 이름으로 가내수공업자와 소비자 사이에 물물교환을 이어주는 행상인을 말한다. 전국에 수백명 씩의 조직을 갖고 동학혁명기에는 관의 첩자 노릇을 하였다.

농민군은 곧 현아(懸衙)를 습격하여 형방에 갇혀 있는 6명의 죄수를 석방하고 군기고를 파괴하여 많은 무기를 접수하였다. 이어서 현감의 가사(家舍)와 도사령(都使令)의 집을 아울러 타파하고 이 곳 보부상들이 주접하는 집을 불질러 보부상들에게 경종을 울리고 이날 밤 고부군 삼거리로 옮겨 숙영하였다.

황토현 싸움에서 승리를 거둔 후 동학군이 재빨리 정읍을 공격한 것은 이어서 곧 전주를 점령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4월 5일 (음) 군산에 상륙한 양호초토사 홍계훈이 4월 7일 (음) 경군을 거느리고 전주로 입성한다는 소식을 듣고 보다 화력을 강화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이에 따라 지방 관아에 비치되어 있는 무기를 접수하여 전력을 강화하기 위해 전라도 서해안 여러 군현으로 진군의 방향을 돌리게 되었다. 이같은 목적 아래 4월 7일 (음) 삼거리에 유한 동학농민군은 4월 8일 전봉준의 인솔 아래 흥덕읍으로 진주하였다. 흥덕읍으로 진주한 이들은 그 곳 군기고를 파괴하고 탄약과 창검 · 조총을 무난히 접수한 후 정오경에는 다시 고창으로 진주하였다.

이들은 고창읍의 옥문을 파괴하고 억울하게 감금되어 있는 동학교도 7명을 석방하였다. 또 이들은 읍저(邑底)에 있는 부호 은대정의 집으로 몰려가 가옥을 파괴하고 소각한 다음 무기를 접수하고 장적(帳籍)을 수험(收驗)하였다. 이어서 고창 현아 각 건물을 파괴하고 인부(印符)를 탈취하려 하자 현감은 그대로 도망치고 말았다. 농민군은 그날 고창읍내에서 머물렀다. (주석 2)


주석
1> 이이화, 앞의 글.
2> 김의환, 『전봉준전기』, 95~96쪽, 정음사, 1983.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동학혁명과 김개남장군‘]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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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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