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비안느에 관한 진실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 ⓒ 티캐스트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21세기 일본 영화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의 영화는 몹시 담백하다.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 자극적인 묘사를 찾아보기 어렵다. 이야기 중심의 영화가 그의 강점이다. 주로 가족과 죽음, 관계와 상실을 이야기한다. 모두가 겪는 일이지만, 미처 돌아보지 못 했던 지점들을 잡아낼 줄 안다.

<아무도 모른다>에서는 아이들이 겪는 소외를 일본 사회 전체의 문제로 환원시켰다. 히로카즈의 영화에서 '가족'에 대한 고찰은 가장 중요한 요소다. 그는 '정상 가족'을 그리지 않는다.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만든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그리고 <어느 가족>에서는 '진정한 가족은 무엇으로 만들어지는가'라는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가족은 혈연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후천적 관계를 통해 완성된다는 것. <걸어도 걸어도>(2009)에서는 말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가족 사이의 '균열'을 논했다. 그의 영화 속에서 가족은 누구보다 가까운 듯, 또 누구보다 먼 존재다.

좀도둑으로 이뤄진 '유사 가족'을 다룬 <어느 가족>이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을 때, 아베 신조 총리는 히로카즈에게 축하 메시지를 보내지 않았다. '쿨재팬'이라는 슬로건과 함께 문화강국을 자임하는 아베였지만, '쿨재팬' 속에 국가주의를 거부하는 예술가가 설 자리는 없었기 때문이다.
 
<어느 가족>의 감동이 가시기도 전, 히로카즈가 신작 <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 >을 내놓았다. 베니스 영화제와 세자르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명배우 까뜨린느 드뇌브와 줄리엣 비노쉬, 할리우드 배우 에단 호크 등의 배우들이 참여했다. 2003년, 연극을 위한 희곡을 쓰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만난 배우의 이야기에서 탄생했다.

영화의 배경이 일본에서 프랑스 파리로 옮겨졌고, 평범한 사람에서 '대배우 파비안느'로 주인공이 바뀌었다. 그러나 이질감은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가족은 역시 보편적인 이야기다.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은 전적으로 어머니와 딸의 서사다. 겉보기에는 가장 가까워 보이는 두 사람이지만, '남'들은 알 수 없는 거리가 있다.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 ⓒ 티캐스트

 
까뜨린나 드뇌브가 연기한 파비안느는 실제 배우가 그렇듯, 모두의 존경을 받는 명배우이며, 황혼기에 접어든 배우이기도 하다. 그녀는 삶의 수많은 순간을 연기로 일관했다. 자신의 인생을 그린 회고록에서조차도 그랬다.

"이 책에는 진실이라고는 없잖아요."

시나리오 작가인 딸 뤼미르는 분노한다. 파비안느의 화려한 회고록에 진실은 몇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회고록 속의 따뜻한 묘사와 달리, 파비안느는 뤼미르의 등교길을 배웅한 적이 없다. 그녀를 수십 년 동안 보필한 뤼크 역시 실망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파비안느의 회고록에는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파비안느는 "나는 배우라서 진실을 다 말하지 않아"라고 응수한다.  파비안느는 나쁜 엄마, 나쁜 친구가 되더라도 좋은 배우가 되는 것이 낫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녀의 삶을 지배한 것은 허위의 논리였다. 그러나 영화의 말미, 파비안느는 자신과 타인에게 진실할수록, 연기도 그것을 닮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영화 속에는 '내 어머니의 추억'이라는 이름의 극중극이 등장한다. 7년마다 지구에 돌아오는 우주비행사 어머니가 등장한다. 파비안느는 어머니를 기다리다가 할머니가 된 '에이미'의 모습을 연기했다. 에이미의 어머니를 연기한 이는 마농(마농 끌라벨)이라는 배우다.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를 기다리는 에이미의 모습에서 딸을 발견한 것일까. 아니면 자신의 친구였던 배우 '사라 몽다방'를 닮은 마농을 보고 마음이 동한 것일까. 이 극중극은 파비안느와 뤼미르의 균열을 봉합하고 매개하는 데에 기여한다.  그렇다고 해도 두 사람 사이에 비밀이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이 영화는 진실과 거짓을 수없이 교차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뤘다.
 
12월 13일,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광화문 씨네큐브에서 열린 GV(왓챠 주최)를 통해 한국 관객들을 만났다. "다음에 한국에서 촬영을 하게 된다면 간장게장을 출연시키겠다"며 너스레를 떠는 그였지만, 작품을 이야기할 때의 눈빛은 사뭇 진지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각본을 쓰기 전 까뜨린느 드뇌브를 여러 차례 만나, 그 인터뷰를 각본에 반영했다. 까뜨린느 드뇌브를 섭외하는 데에 3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라고 말했다. 히로카즈의 작품인 <걸어도 걸어도>를 인상 깊게 본 드뇌브가 히로카즈를 만나고 싶다는 의사를 표명한 것이다. 까뜨린느 드뇌브와 파비안느는 다르면서도 같은 인물이다. 이 영화는 히로카즈의 영화인 동시에, 명배우 까뜨린느 드뇌브의 인생에 대한 독특한 헌사이기도 하다.
 
관객들은 파비안느처럼 배우도, 뤼미르처럼 시나리오 작가도 아니다. 꾸며내는 것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 이들이 아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영화 속 이야기에 공감할 수 있다. 인간의 삶은 진실과 거짓이 혼재된 채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 역시 파비안느처럼, 연기를 하지 않아도 될 때마저 가면을 쓰고 있었던 적은 없는가. 뤼미르처럼 자신의 감정을 그럴듯한 대사로 꾸며내어 전달한 적은 없는가. 히로카즈의 가족 영화는 이번에도 우리에게 독특한 여운을 남겼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 까뜨린느 드뇌브 줄리엣 비노쉬 에단 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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