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이 글은 전북산악연맹 비장애인 산악인과 추진복지재단 발달장애 청소년이 함께 걸으면서 만들어낸 땀내나는 이야기입니다.[기자말]
희망 원정대는 장애인 4명, 전문 산악인 7명, 인솔 교사 1명, 모두 12명이 한 팀을 이루어서 10박 12일간 히말라야 푼힐-안나푸르나 베이스-남서벽 코스로 총 132km 등반을 했다.

4000미터가 넘는 고산에서는 비장애인도 컨디션 관리가 어렵다. 우리는 일대일 멘토-멘티로 2인 1조가 되어 밀착 관리를 했다. 그것이 난데없는 '커플 경쟁' 구도가 될 줄은 몰랐다.

조현희 등반대장(일명 현대장)과 고동욱(발달장애 2급)군은 유일한 남남 커플인데, 잠까지 함께 잤다. 현대장은 매일 밤 동욱이 침낭에 핫팩을 넣어주고, 속옷을 챙겨 입혔다. 자다가 방귀를 끼고 저도 우스운지 킥킥거리는 동욱이를 보며 '나를 편하게 생각하는구나' 하고 흐뭇해 하는 현대장이다. 원정이 끝날 때쯤, 이 둘의 모습은 영락없는 부자지간이었다. 현대장 무릎 위에 자연스럽게 앉는 동욱이나 자연스럽게 다리를 내어주는 현대장의 모습이 그만큼 스스럼없이 보였다.

'사랑해요'를 100번도 넘게 외친 커플이 있다. 문제의 커플은 김미경 대원과 임형규군(발달장애 2급, 27세). 트레킹을 시작한 3일째 되는 날, 형규는 자다가 급하게 화장실을 가려다 바지에 대변을 싸고 말았다. 새벽 3시, 롯지의 (방귀도 소리 내 못 뀔 정도로) 얇은 벽 사이로 옆방의 다급한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나는 사고가 난 줄 알고 벌떡 일어나 옆방 문을 열었는데, 이영재 선생님이 "문 열면 안 돼요"를 외쳤다. 활짝 젖혔던 문을 다시 닫는데 설명이 필요 없는 냄새가 확 풍겼다. 이영재 선생님은 형규가 실수를 해서 치우고 있다고 했다.

그날은 새벽 4시에 일어나야 했다. 푼힐 전망대의 일출 산행이 예정돼 있는 날이었고, 처음으로 3000미터 고도에 진입하는 날이기도 했다(3000미터 이상부터 고산병에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한다). 미경 언니는 영재 선생님을 도와 형규 옷을 갈아 입히고, 산행 준비를 마쳐서 푼힐 전망대에 올랐다.

형규는 속이 단단히 탈이 났는지 올라가는 동안에도 여섯 번이나 더 화장실에 갔다. 전설의 '육변 신화'를 푼힐 전망대에서 세우게 된 것이다. 세번째부터는 형규가 "배 아파요"라고 하면 기계적으로 휴지를 들고 화장실을 찾는 미경 언니였다. 아마 이들의 사랑이 시작된 것은 이때부터였던 것 같다. 어쩌면 미경 언니도 사랑의 힘으로 냄새를 극복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역시 사랑은 고난과 역경을 통해서 더욱 커지는 것이었다.

산행 내내 뒤에서 형규와 미경 언니가 "사랑해요"를 구호처럼 외쳐댔다. 특히 위험한 구간에서 형규가 집중력을 잃을까 봐 미경 언니가 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사랑한다는 말을 남발하는 커플 앞에서 덤덤한 우리 커플(나와 인왕이)이 이상했는지 조창신 대장이 우리도 사랑한다고 하라고 했다. 나는 인왕이의 장래를 위해서 그럴 수 없다고 농담하듯 말했고, 인왕이에게도 나중에 진짜 사랑을 위해서 아껴두라고 했다.

하긴 우리 커플도 구호가 하나 필요하긴 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상냥해요"인데, 구호를 외치는 시점은 항상 미경-형규 커플이 "사랑해요"를 한 바로 다음이었다. "사랑해요"와 비슷하게 들리면서도 절제미가 느껴지는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사실은 사랑한다는 말을 듬뿍 들은 형규는 얼굴에 웃음이 떠나지 않았고, 다른 사람의 수저나 물을 챙겨주는 등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여 주었다. 누군가의 관심이 그를 달라지게 한 것이 아닐까.

인왕에게 내가 너무 무뚝뚝하게 군 걸까. 사랑한다고 하고 모든 것을 내가 직접 해주며 적극적으로 표현하면 그 순간을 좋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조용히 뒤에서 인왕이의 물병, 스틱, 버프를 챙겨주고 그때마다 설명을 했다. 인왕이가 스스로 하는 경험을 할 수 있기를, 그렇게 해서 나중에는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많아지기를 바랐다.

잘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초면에 서로의 벽을 허물기 위해서는 스킨십이나 애정 표현이 필요했는지 모른다. 마지막까지도 우리는 조금 어색한 사이로 남아버렸기 때문이다. 이제야 감을 잡고 인왕에게도 익숙해져서 애정 표현을 하려고 했는데, 한국으로 돌아와버렸다.

공항에서 인왕에게 쪽지를 썼다.

"인왕아, 네팔에서의 기억 오래 간직하자. 계속 산에서 만나자."
"준정 누나 상냥해요!"

괜히 큰 소리로 웃으며 아쉬움을 감추어 본다.

태그:#커플 경쟁, #형규&미경, #상냥한 커플, #우리가 몰랐던 것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장을 봐서 요리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학원밥 18년에 폐업한 뒤로 매일 나물을 무치고 살고 있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