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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봉준과 동학농민운동. 광화문광장 동북쪽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전봉준과 동학농민운동. 광화문광장 동북쪽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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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나긴 실정이 누적되어 통치권의 정당성을 인식하는 객관적 능력이 결여될 때, 그리고 위정자가 이러한 불평과 불만에 대처함에 있어서 새로운 대책을 강구하기보다는 도리어 이것을 탄압하려고 할 때, 억압이 실패하였을 경우 전면적인 타협을 시도하기보다도 도리어 가혹한 탄압을 끝까지 강행하려고 할 때, 위정자의 선의에 대한 민중의 신뢰감이 소멸하였을 때 혁명이 일어난다. - A. H. 라스키.

한말에 이르러 세도정치가 강화되면서 조선왕조의 부패상은 극한에 이르고 이에 저항한 민란이 자주 일어났다.

1862년의 농민항쟁은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경기도ㆍ황해도ㆍ함경도 일부 지방 등 전국 71개 군현에서 전개되었다. 1870년대 민씨 척족의 지배체제가 강화되면서 부정부패는 더욱 심화되고 탐관오리들의 국가 재정의 수탈과, 이들과 유착한 지주들의 농민수탈이 더욱 가속화되었다.

1811년의 홍경래의 난에서부터 1862년의 진주민란(임술민란)을 들 수 있다. 진주민란이 발생한 1862년 한 해에만도 경상도에서 17회, 전라도 9회, 충청도 9회, 경기도와 황해도, 함경도 등지에서는 1회 등 총 37회의 농민봉기가 발생하였다. (주석 1)

이 시기에 피지배층도 차츰 각성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언제까지나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민초들은 차츰 자신들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은 채 비밀 결사체를 만들거나 여러 가지 방법의 저항을 시도하였다.

한편 19세기에 들어서서는 하층민 중심으로 비밀결사체도 등장했다. 곧 양반을 죽이자는 살반계, 상전을 죽이자는 살주계, 부호의 재산을 빼앗는다는 살약계(殺掠契) 등이 조직되어 횡행했다.

또 수령과 아전 등 관료들의 수탈을 폭로하고 항의하는 와언(訛言) 산호(山呼) 거화(擧火) 투서(投書) 등이 벌어졌다. 한편으로는 관아 건물에 괘서(掛書) 방서(榜書)를 붙이기도 하교 흉서(凶書)를 보내 경고를 하기도 했다. 또 곳곳에서 고변이 일어났다. 관아를 들이쳐는 음모를 꾸민다거나 변란을 도모하는 사건이 전개된 것이다. (주석 2)

 
동학농민혁명군 최고 지도자 최시형
▲ 교수형 직전의 최시형 선생 동학농민혁명군 최고 지도자 최시형
ⓒ 박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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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의 각성에는 동학의 평등사상과 개혁사상이 기여한 바 적지 않았다. 그래서 각지의 민란에는 동학도들이 참여하고 그럴수록 관의 탄압이 가중되었다. 삼례집회를 알리는 최시형의 '통유문'의 한 대목이다.

여러 고을의 수령들이 오도(吾道)를 서학 여파로 지목하여 조사해 잡아들여 감옥에 가두고 전재를 토색질해서 죽은 자와 상한 자가 연속해서 끊어지지 않고 향곡의 호민이 동학도라는 소문을 들은 대로 침학을 해서 집을 허물고 재산을 빼앗음이 곳곳에 널려 있으니 도유로 이름한 자는 모조리 유리해 살 곳이 없다. (주석 3)

내우외환으로 국가적인 위기가 목전에 이르고 있는 데도 조정의 민씨와 조씨 세도척족들은 크고 작은 감투를 매관매직하느라 영일이 없었고, 외세는 칼날을 세우면서 조선실정을 정탐하기에 영일이 없었다. 이즈음 일본정부의 한 인물이 분석한 '조선사정'이다.

독립국이라고는 하나 실제는 없고 단지 겨우 금일의 일루의 명맥만이 간신히 명멸(明滅)의 사이를 이어가고 있다. 무슨 연유이든 실로 조선은 동양에 있어 발칸반도이다. 사방의 이웃이 그 손톱과 이빨을 갈면서 그 고기를 살핀지가 오래되었다고 하지만, 또 어찌 하지도 않았다.

러시아는 결코 조선을 아우를 수 없고, 영국은 감히 조선을 범할 수 없다. 지나(支那, 중국) 또한 조선을 자기나라에 예속시킬 수가 없다. 우리나라(일본 - 필자) 또한 용이하게 조선을 움직이기 어렵다. 이것은 동양의 화평을 유지하기 위해 마땅히 그리하지 않을 수 없는 바의 것이다.

돌아보면 이 나라의 내부 모습을 관찰하니, 각종 불평당의 숨은 세력이 지금은 점차 그 걸음을 내딛어 정부의 기강이 흔들리는 기회를 타서 혁명을 간절히 바라고, 내지(內地) 여러 곳에서 봉기하여 안으로는 간사한 자를 배척하여 충량(忠良)에 힘쓰고 밖으로는 척왜(斥倭) 척양(斥洋) 주의를 실행해야 한다는 것을 명분으로 삼고, 행위는 지극히 착실할 것을 뜻으로 하고 망동을 피해 오직 지방 토민의 환심을 사는 것에 노력하였다.……조정을 싫어하는 토민은 다투어 이에 응하여 그 세력이 대단히 창궐하였다. (주석 4)


주석
1> 임형진, 앞의 책, 109쪽.
2> 이이화, 「동학농민혁명은 기층민의 변혁운동」, 2014년 10월 28일, 국립중앙박물관 강연.
3> 『천도교교회사초고』, 포덕 33년 10월 27일조.
4> 『갑오조선내란시말』 서론, 편자는 없고 익명인 함남일인(函南逸人)으로 표기.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동학혁명과 김개남장군‘]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동학혁명 , #김개남장군, #동학혁명_김개남장군, #홍경래의난, #진주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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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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