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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한 할머니가 있다. 이름은 잔, 나이는 아흔 살, 프랑스의 외딴 시골 농가에서 혼자 살고 있다. 책 <체리토마토파이> 주인공 잔 할머니는 아흔 번째 봄에 일기 쓰기를 시작한다.

그녀는 자유로이 쓸 수 있는 많은 시간을 무료하게 보내지 않고 늙은이의 특권이라 여긴다. 그 넘쳐나는 시간을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그날그날의 기분을, 순간순간 떠오르는 추억을 기록한다. 
 
 책 '체리토마토파이' 겉표지
 책 "체리토마토파이" 겉표지
ⓒ 청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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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 살던 도시 아가씨 잔은 결혼하여 시골에서의 삶을 시작했다. 책 첫머리에 '잔의 작은 세상'이라는 그림이 있는 페이지가 있다. 책을 읽으면서 내내 그 세상 속에서 잔 할머니의 생활이 머릿속에서 3D로 구현되었다.

일기에는 잔 할머니의 생활이 나타난다. 봄에서 시작한 이 일기는 여름, 가을, 겨울까지 이어지고 이듬해 봄이 시작할 무렵 끝난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정원에서 수확하는 야채들의 종류가 바뀌고 할머니의 산책코스, 옷차림 등이 변한다.

잔 할머니는 일정한 시간에 식사를 하고 산책을 한다. 할머니에게는 친구들이 있다. 한 주도 거르지 않고 그들과 성당 미사에서 얼굴을 보고, 집에 모여 식사나 다과를 하고 카드놀이를 한다. 이웃에 사는 부부와의 교류도 원만 아니 각별하다. 의리 있는 가정부도 있고 오고 싶을 때만 오는 정원사도 있다.

잔 할머니는 이들과 더불어 사는 삶속에 확실한 생활 습관을 가지고 있다. 그 이유로 그녀의 삶은 외롭지 않을 뿐 아니라 삶의 주체도 확실하게 그녀 자신이다. 아들과 딸이 손자 손녀들을 데리고 명절, 휴가에 번갈아 방문할 때 할머니는 그들에게 먹일 음식을 직접 만들기도 하고 미리 사다 두기도 한다. 자녀의 방문은 반갑지만 그녀의 확실한 생활 습관은 침해받는다.

"마지막 손님까지 모두 떠났다. 사흘간 도떼기시장 같던 집이 다시 조용해지니 기분이 나쁘지 않다."

부모님을 만나고 집으로 돌아올 때마다 손 흔드는 부모님의 모습이 쓸쓸해 보여 무거웠던 내 마음을 가볍게 만들어 주는 구절이다.

가을에서 겨울로 이어지는 계절에는 잔 할머니도 조금은 외로움, 한적함을 느끼지만 주체적인 삶, 여자로서의 삶을 씩씩하게 이어간다. 한 번도 방문해보지 않은 나라 프랑스의 시골마을에서의 일 년을 마치 잔 할머니와 같이 살아본 경험이 생겼다.
 
여유로운 아침 가족여행 중에 숙소에서 여유로움 아침을 맞고 있는 어머님
▲ 여유로운 아침 가족여행 중에 숙소에서 여유로움 아침을 맞고 있는 어머님
ⓒ 신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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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또 다른 할머니가 있다. 이름은 최정임, 나이는 일흔 여섯, 한국의 부안이라는 지역에서 남편과 같이 살고 있다. 바로 나의 시어머니이다. 잔 할머니의 생활 모습이 머릿속에서 구현될 때마다 시어머니의 모습이 겹쳐서 나타났다.

한국의 할머니는 친구들과 와인을 마시거나 카드놀이를 하지는 않는다. 같은 점은 시골동네에 친구처럼 지내는 이웃이 있다. 그들은 비슷한 생활 습관을 가지고 있으며 서로의 모습이 뜸하면 안부를 물어온다. 노인회관 또는 그들 각자의 집에 모여 요리솜씨를 뽐내며 음식을 나누어 먹는다. 그들과의 대화에서 즐거움을 찾고 유용한 정보를 얻기도 한다.

내가 주체적인 삶을 살아온 잔 할머니를 보며 시어머니를 떠올린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직장생활을 하지는 않았지만 농사를 짓고 동네에서 품앗이로 일을 하기도 한다. 누가 시켜서 하는 일들이 아니다.

젊은 시절엔 모진 시집살이를 겪고(잔 할머니도 평범하지 않은 시어머니를 모셨다) 자녀를 양육하기 위해 이런 일들을 했지만 어머님은 신세한탄에 빠져있지도 다른 사람을 탓하지도 않았다. 모든 일들을 능동적으로 해냈다.

지금도 그렇다. 어머님 아버님이 드실 쌀을 비롯한 각종 곡류와 야채, 과일을 직접 농사짓고, 나와 남편을 비롯한 다른 자녀들 역시 그 수확물을 아기 새처럼 받아먹는다. 일흔 여섯의 나이에 아직도 건강하셔서 마을에서 품앗이 손길이 필요할 때마다 인기가도를 달리고 있다. 이 모든 일을 억지로 하거나 고통스러워하지 않는다.

노년의 일상을 일만 하지는 않는다. 어머님은 새로운 것을 시도해보고 낯선 음식을 먹어보고 다른 지역(심지어 다른 나라)에 방문하는 일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젊은 나보다도 더 용기 있게 다가간다. 시가에서 여자들만 모여 여행을 하는데 어머님은 여행 내내 선두에 서있다.
 
무주 산골영화제에서의 시어머님 영화보기, 공연보기를 좋아하시는 시어머님, 무주에서 개최한 산골영화제도 즐기셨다.
▲ 무주 산골영화제에서의 시어머님 영화보기, 공연보기를 좋아하시는 시어머님, 무주에서 개최한 산골영화제도 즐기셨다.
ⓒ 신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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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두 늙은 여자>, <나이듦, 그 편견을 넘어서기>를 읽고 내가 마주하게 될 노년시절을 막연하게나마 그려볼 수 있었다. 소설 속 잔 할머니와 현실에서의 시어머니. 이 두 할머니에게서 나는 구체적인 노년 시절을 대하는 여러 방식을 배웠다.

사람은 누구나 나이가 든다. 어릴 때는 빨리 어른이 되기를 바란다. 그래야 할 수 있는 일들이 늘어나니까. 성인이 되고 점점 나이 들어 중년이 되고 노년이 되면 쏜살같이 지나가는 시간을 잡고 싶어진다. "내가 젊었을 땐 말이야"로 시작하는 말을 많이 한다.

이 두 할머니는 멋지게 늙어가는 방식을 몸소 보여준다. 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신세한탄을 하며 시간을 보내지 않는다. 육체는 힘을 잃어도 젊었을 때부터 몸소 익힌 기술과 지혜는 남아있다.

지금 상태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내어 그 순간을 열심히 즐기면서 살기. 이것이 내가 다가오는 노년을 준비하는 대비책이다. 그 대비책은 막연한 두려움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중이다. 나는 그 모습에서 긍정적인 측면이 먼저 보인다.

덧붙이는 글 | 브런치에 실을 예정입니다.


체리토마토파이

베로니크 드 뷔르 (지은이), 이세진 (옮긴이), 청미(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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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둥이 아들을 키우고 있는 평범한 아줌마입니다.아이부터 어른까지 온 가족이 다같이 읽을 수 있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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