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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학혁명 상상화. 서울 광화문광장 동편의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동학혁명 상상화. 서울 광화문광장 동편의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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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성장하는 동안 나라 사정은 점차 어지러워갔다.

왕조 말기의 사회경제적 모순과 신분간 대립, 정치적 부패와 탐관오리의 수탈, 기존가치 질서의 붕괴와 천주교 전래와 민족종교 동학창도, 자본주의 서구열강의 침투와 이로인한 사회불안 등이 겹치면서 전국 각지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민란은 농민항쟁의 수준으로 이어졌다.

그 중심에 동학이 깊숙이 배어들었다. 사학자이면서 독립운동가인 박은식의 진단이다.

동학의 발단은 매우 미미했으나 그 결과는 매우 컸다.
조그마한 불씨가 들판을 불태우는 데까지 미치고 떨어진 물방울이 흘러서 강과 바다를 이루었으니, 한국의 대란과 중ㆍ일 대전이 이로 말미암아 일어났다. 철종 때 경상도 경주 사람 최복술(崔福述)이 있었는데, 그는 지체가 낮은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스스로 서교(西敎)에 대칭하여 동학이라 불렀으며, 그 종지(宗旨)는 유교ㆍ불교ㆍ도교를 혼합한 것이었다. 주문(呪文)은 '시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 13자였다. '붓을 잡으니 신이 강림했고 칼춤을 추니 공중에 뛰어오른다'는 따위는 매우 괴이했다.

동학의 무리들은 밤이면 반드시 깨끗한 물을 떠놓고 보국안민(輔國安民)을 기도하였고, 밥을 지을 적마다 쌀 한 숟가락씩을 떼어 놓아 성미(誠米)라고 부르면서 저축하여 교주의 봉양미로 삼았고 최복술을 받들어 신사(神師)로 삼아 서교(西敎)의 예수기독과 같이 섬겼다. (주석 3)

 
 정읍 황토현 전적지에 세워진 동학혁명기념탑. 동학농민혁명의 구호였던 ‘제폭구민’과 ‘보국안민’이 새겨져 있다.
 정읍 황토현 전적지에 세워진 동학혁명기념탑. 동학농민혁명의 구호였던 ‘제폭구민’과 ‘보국안민’이 새겨져 있다.
ⓒ 권경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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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독립운동가이며 사학자인 장도빈의 견해도 소개한다.

조선 말세의 대세는 마치 쇠한 나무에 좀이 생기듯 썩은 고기에 벌레가 생기듯 천하만사가 날마다 부패쇠망에 들어간 원인은 대개 문약정치(文弱政治)와 사색당쟁(四色黨爭)에 돌릴 것이다. 문약정치는 물론 이조 초엽부터이거니와 사색당쟁은 선조시대부터였다.

김개남이 12살 때인 1865년 전봉준이 아버지 전창혁을 따라 동곡리 하지금실로 이사를 왔다. 김개남 보다 두 살 아래인 10살 때이다. 이웃 마을이다보니 이들은 자주 어울렸다. (주석 4)


김개남의 아명은 김기선(金琪先)이고 20대에는 기범(箕範), 족보에는 영수(永疇)로 올렸다. 김개남이란 이름을 동학혁명을 시작하면서 "한반도의 남쪽부터 해방한다"는 뜻으로 작명한 것으로 전한다. 여기서는 김개남으로 호칭한다.
 
 김개남 장군
 김개남 장군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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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김개남은 김기선(金琪先)이라 불리며 전봉준보다 두 살 더 많은 열두 살이었고 상지금실의 유복한 가정환경 속에서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떼고 병서를 읽으며 군사놀이를 즐겼다.
 
병정놀이를 할 때는 근동 마을 아이들이 모두 모여들었다. 김기선(개남장)이 언제나 대장 노릇을 하였고 나이 많은 큰아이들까지도 김기선(김개남)을 대장이라 부르는 것을 보고 전봉준은 다른 고을에서 이사 온데다가 나이도 두 살이나 아래인지라 김개남을 적절하게 대장이라고 부르면서 따라다녔고 더 다정하게 가까워졌을 때는 형이라고도 부르며 함께 어울렸다고 한다. (주석 5)


동학혁명의 두 영웅 전봉준과 김개남은 10대에 어울리면서 벗이 되고 얼마 뒤에는 동학의 교도로서 뜻을 함께하게 되었다. 일부 기록에는 이 무렵에 의형제를 맺었다고 하는데, 입증할 기록은 없다. 김개남의 후손(손자) 김환옥의 증언을 통해 김개남의 소년시절의 삽화를 들어본다.

소년 김개남은 무척 개구쟁이었던 모양이다. 고만한 또래의 아이들을 데리고 '서리'를 하는데 여느 아이들과 달리 닭서리, 참외서리, 콩서리보다 '돼지서리'를 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할 적에 환옥은 아주 은밀스런 표정을 지었다. 아무튼 "우리 할아버지가 남원에서 도지사했다며. 전봉준이가 뭐 알아, 우리 할아버지가 앞장서라고 시킨대여"라고 말했다. (주석 6)


주석
3> 박은식, 『한국통사』, 「갑오동학의 난」, 서두.
4> 장도빈, 『갑오동학란과 전봉준』, 1쪽, 덕흥서림, 1945.
5> 김기린, 앞의 책, 53쪽.
6> 정리, 이이화, 「농민군 3대 장군 김개남 손자 환옥」, 『다시 피는 녹두꽃』, 176쪽, 역사비평사, 1994.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동학혁명과 김개남장군‘]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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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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