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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초당 정약용 선생이 유배하며 기거하시던 곳
▲ 다산초당 정약용 선생이 유배하며 기거하시던 곳
ⓒ 이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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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은 강진에서 그 지역 농민들의 참상을 지켜보면서 사회시를 자주 지었다.

「애절양(哀絶陽)」은 삼정(三政)의 문란으로 군보(軍保)는 농민들로 하여금 자기의 생식기를 자르게 하는 비극을 그리는 내용이다.

 갈밭마을 젊은 여인 울음도 서러워라
 현문(懸門)향해 울부짓다 하늘 보고 호소하네

 군인남편 못 돌아옴은 있을 법도 한 일이나
 예부터 남절양(男絶陽)은 들어보지 못했노라

 시아버지 죽어서 이미 상복 입었고 갓난아인 배냇물도 안 말랐는데 삼대(三代)의 이름이 군적에 실리다니
 달려가서 호소하나 동헌 문엔 호랑이요
 이정(里正)이 호통하여 단벌 소만 끌려갔네

 칼을 갈아 방에 들자 자리에 피가 가득
 스스로 한탄하네. 아이 낳아 닥친 곤액

 (…)

 부자들은 한평생 풍악이나 즐기면서
 한알 쌀, 한치 베도 바치는 일 없으니

 다 같은 백성인데 이다지 불공한고
 객창에서 거듭거듭「시구편(鳲鳩篇)」을 읊노라. (주석 4)

 
박봉양 토비 사적비 김개남이 이끄는 동학농민군과 맞서 싸워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로, 오른편 위 모서리가 떨어져나간 것은 동학농민전쟁이 역사적 정당성을 얻게 되면서 한때 수난을 당한 흔적입니다.
▲ 박봉양 토비 사적비 김개남이 이끄는 동학농민군과 맞서 싸워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로, 오른편 위 모서리가 떨어져나간 것은 동학농민전쟁이 역사적 정당성을 얻게 되면서 한때 수난을 당한 흔적입니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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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익한은 「애절양」의 배경을 풀이한다.

다산이 유배하던 전라남도 강진의 노전(蘆田)이라는 농촌에 한 빈민이 있었는데 그의 아버지가 늙어 죽은 지 이미 3년이나 되었으며 군보(軍保) 명부에 제명되지 않고 군포를 계속 납부하며 또 그가 사내아이를 낳자 관리는 벌써 군보의 명부에 기입하여 성인 군정(軍丁) 하나로 간주하고 군포를 바치라고 독촉하니 그 가난한 농민은 한 몸으로서 3대의 군포를 물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과중한 부담을 도저히 응할 수 없으므로 이정(里正)은 그 농민의 단벌 재산 - 어느 의미에서는 자기 자식보다도 애중히 하는 농우(農牛) - 를 군포의 대가로 빼앗아갔다. 아이 아버지는 기가 막혀서 "이 놈의 것이 있기 때문에 이 원수인 군포의 대상자 아이를 낳았구나!" 하고 그만 칼로 자기의 생식기를 베어 버렸다.

그러니까 아이 어머니는 놀라서 아우성을 치며 유혈이 임리(淋漓)한 자기 남편의 살점(벌써 생식기는 아니다)을 싸가지고 관아에 달려가서 하소연하려 하였으나 관아 문지기에게 완강히 거절을 당하여 다만 땅을 치고 울부짖을 뿐이었다. (주석 5)

 
갑오년 농민 전북 정읍군 덕천면 황토재 동학혁명기념탑에 세워진 부조
▲ 갑오년 농민 전북 정읍군 덕천면 황토재 동학혁명기념탑에 세워진 부조
ⓒ 민종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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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개남 등이 주도한 동학혁명은 이와 같은 처참한 시대에 광제창생과 보국안민, 척왜척양의 기치를 내걸고 전개되었다. 그리고 관군과 왜병에 의해 처절하게 학살ㆍ진압되고 말았다.

동학혁명이 일어나고 120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 이 혁명의 3대 지도자인 김개남은 왜 묻혀지고, 연구서의 한 귀퉁이에 이름 석 자가 나올 뿐일까. 앞으로 정리해 나가겠지만, 한 연구자의 기록에서 많은 것을 유추하게 된다.

전봉준으로 대변되는 일부 지도자는 당시 조선왕조의 대내외적 위기 상황이 민씨척족의 세도정치에 기인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따라서 이 집단은 민씨 척족세력을 축출하고 대원군을 추대하는 것을 핵심내용으로 하는 정치적 구상을 추진하였다.

하지만 이 집단은 대원군을 추대하여 집권한 후 보국안민 실현을 위한 이상적인 권력구조로, 몇 사람의 명망가의 합의정치를 실현하려 하였다. 즉 이들은 조선시대 사림파가 추구하려는 사림정치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정치운영 구조인 군신공치(君臣共治)를 구상하였다.

김개남 등 일부 지도자는 조선왕조를 전복하고 새 왕조를 건설하려는 구상을 지니고 있었다. 이들은 전봉준, 최시형 등의 조선왕조의 국법에 준하는 폐정개혁 등의 활동 요구, 즉 집강소 체제하에서의 활동 요구를 거부하고 더욱 급진적인 폐정개혁 등의 활동을 추진하였다.

이처럼 동학지도자들은 조선왕조 질서 내에서의 개혁을 통한 보국안민 실현, 조선왕조를 전복하고 새 왕조 건설을 목표로 하는 구상을 지닌 지도자로 나누어져 있었다. 이로 인해 동학지도자들은 1894년 농민봉기 시기에 통일적인 지휘체계를 확립하지 못하고 분열ㆍ대립하였다. (주석 6)


주석
4> 정재소, 『다산 시 연구』, 95~96쪽, 창비, 2014 (개정 증보판).
5> 최익한, 앞의 책, 507~508쪽.
6> 이희근, 「1894년 동학지도자들의 시국인식과 정국 구상」, 『한국근현대사연구』, 1998년 제6집, 97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동학혁명과 김개남장군‘]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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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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