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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안 남았어, 파이팅!", "조금만 더 힘내자! 달려!"

궂은비가 내리던 11월 17일, 비에 젖은 기합소리가 가득 찬 마라톤 대회장에선 2019 손기정 평화 마라톤 대회가 한창이었다. 매주 러닝 대회에 참여한다는 러닝 전도사 안정은(28)씨를 만나기 위해 직접 잠실 종합 운동장을 찾았다. 진솔한 이야기를 듣기엔 다소 부적합한 장소이지 않을까했던 걱정은 기우였다. 곳곳에서 들려오는 러너들의 우렁찬 기합과 젖은 트랙의 냄새는 그녀의 삶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트레이드 마크인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러닝 전도사 안정은씨.
▲ 러닝전도사 안정은 트레이드 마크인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러닝 전도사 안정은씨.
ⓒ 방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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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와 스승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컴퓨터 공학과에 진학했던 그녀는 승무원이라는 오랜 꿈을 간직하고 있었다. 하지만 여느 사람과 다르지 않게 전공 관련 업무로 사회에 첫 발을 뗐다. 현실에 떠밀렸던 결정 때문이었을까. 자신의 길이 아니라고 생각한 끝에 6개월 만에 사직서를 냈다.

결국 오랜 꿈이었던 중국 항공사 승무원 시험에 합격하지만 비자 문제로 약 1년의 기다림을 견뎌야 했다. 한국과 중국의 사드 갈등 때문이었다. 합격자 200명 중 비자가 나오지 않은 마지막 한 사람이었던 기억은 지금 떠올려도 힘든 시간임이 분명하다. 대인기피증까지 겪었던 안씨는 1년 만에 세상 밖으로 나왔고, 발을 내딛자마자 눈물이 흘렀다고 한다. 그녀는 흐르는 눈물을 땀처럼 보이기 위해 미친 듯이 달렸다.

"작은 성공이라도 매일 하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그때 우연히 마주하게 된 달리기가 그의 성공의 기준을 바꿔놓은 것이 아닐까. 건강한 달리기 문화를 알리는 러닝전도사로 활동 중인 안씨는 그녀의 달리기가 처음부터 100km 마라톤, 철인 3종 경기처럼 거창한 도전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고등학생 때 기흉 판정을 받았던 그는 5분 달리기부터 시작해 한 시간 쉬지 않고 달리기와 같은 시도가 쌓이다 보니 도전할 수 있는 범위 자체가 커졌다고 담담하게 설명했다.

이렇게 작은 성공들을 쌓아나가는 것을 그는 '성공의 습관화'라고 불렀다. 성공이라는 단어를 무겁게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성공의 기준을 낮춰야 하는 건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성공이라고 해서 거창할 필요는 없어요. 5분 달리기, 친구 세 번 칭찬하기. 이런 것들도 성공이거든요. '오늘도 성공했구나' 하면 그 성공의 기억이 내일 또 목표를 넓혀 나갈 수 있게 해요. 내일도 성공하고 내일 모레도 성공하면 자연스럽게 성공의 법칙을 알게 되더라고요."

마라톤의 피니시 라인, 즉 결승선은 후련함의 상징이 되곤 한다. 그런 피니시 라인에서 신발을 벗어 던지기 보단 다시 고쳐 신는다는 안씨가 또 어떤 목표를 세웠는지 궁금했다. 목표를 묻자 그녀는 자연스레 마라톤에 비유했다. 대화 내내 그녀의 목에 걸려있던 2019 손기정 평화 마라톤 대회 메달이 새삼스레 눈에 들어왔다.

"인생이 보통 마라톤이라고 하잖아요. 그 마라톤이 보통 42.195km고요. 인생을 42.195km라고 했을 때 저는 이제 막 5km정도밖에 안 온 것 같아요. (중략) 제 꿈은 문화체육부 장관이거든요. 그래서 아직 가야할 길도 멀고 공부할 것도 많고 또 실패도 여러 번 해야 하고..."
 
안정은씨 뒤로 2019 손기정 평화 마라톤 대회 참가자들이 달리고 있다.
▲ 러닝전도사 안정은 안정은씨 뒤로 2019 손기정 평화 마라톤 대회 참가자들이 달리고 있다.
ⓒ 방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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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높은 목표를 향해 이미 새로운 실패를 맞닥뜨릴 준비를 하고 있다는 안씨가 이루고 싶은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그녀가 꿈꾸는 세상을 묻자 인터뷰 장소 바로 뒤에서 달리고 있는 러너들을 가리켰다.

지금 달리고 있는 사람들은 거의 건강한 사람밖에 없다며 아쉬운 미소를 지었다. 장애인, 아이, 임산부, 노인들도 함께 달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며 그제야 환한 미소를 보였다. 모든 사람이 제한 없이 달릴 수 있는 세상을 꿈꾼다는 말의 한 켠에는 실패에 관대한 사회를 만들고 싶은 소망이 자리하고 있었다.

대화를 마치며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녀가 마주했던 실패들을 다시 마주하고 싶은지 궁금해졌다.

수많은 실패들이 인생에 함께했고, 죽고 싶을 만큼 힘들었지만 그는 자신의 인생에서 후회되는 것이 하나도 없다고 단호히 말했다. 다시 돌아간다 해도 모든 실패들을 똑같이 경험하고 싶다며 지어보인 그녀의 트레이드마크, 환한 미소가 새로운 피니시 라인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종합운동장에 설치되어있는 손기정 선수의 동상.
▲ 손기정 선수 동상 종합운동장에 설치되어있는 손기정 선수의 동상.
ⓒ 방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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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학생(koreanischer student)이 세계의 건각들을 가볍게 물리쳤습니다. 타는 듯한 태양의 열기를 뚫고, 거리의 딱딱한 돌 위를 지나 뛰었습니다. 그가 이제 트랙의 마지막 직선코스를 달리고 있습니다. 우승자 '손'이 막 결승선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독일 역사 박물관 독일 방송기록보관실 자료, 네이버 지식백과)

태그:#안정은, #러닝전도사, #마라톤, #러닝,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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