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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춘은 유신헌법 제정에도 깊이 관여하는 등 역대 독재정권의 기수 노릇만을 계속 해온 사람"
- 변정수 전 헌법재판관 회고록 중 -

1972년 유신헌법 선포 후 박정희는 국민들의 반감이 높아질 때마다 조작간첩사건을 발표해 남북긴장을 조성하고 위기를 넘기려 했다. 중앙정보부(아래 중정)와 보안사 등이 정권유지를 위해 조작해낸 간첩사건은 특히 자기방어 능력이 약한 재일교포를 먹잇감으로 했다.

일제강점기 수백만 명의 한국인들이 일본식민정권에 의해 강제징용으로 끌려갔다. 해방 후 주로 경제적 이유로 고국에 돌아오지 못한 재일교포 2세들은 일본에서 온갖 차별과 설움을 받았다. 하지만 이들은 그 어려움을 이겨내고 정체성을 찾기 위해 20대 초반의 나이에 조국으로 유학 왔다. 그러나 조국은 이들을 따스하게 대해주지 않았다. 일본에서 '조센징'으로 차별받던 이들이 '꿈에 그리던' 모국에서는 한국말이 유창하지 못하다는 죄로 '반쪽바리'로 놀림을 받았다.

또 박정희는, 인터넷도 없던 시절, 재일교포유학생이 '타국'에 가족과 떨어져 있어 필요시 불법체포와 구금이 쉬웠던 터라 정권비판이 심할 때마다 이들을 붙잡아 고문해 '재일교포간첩사건'을 대대적으로 발표했다.

이런 맥락에서 이른바 '재일교포유학생간첩사건'은 1975년 11월 서울대, 고려대, 부산대 등에 재학 중이던 재일교포학생이 간첩혐의로 기소된 사건이다. 유신헌법을 초안하고 검사에서 중정 대공수사국장으로 진급한 김기춘(1939~)은 1975년 11월 22일 갑자기 아래와 같은 발표를 한다.
 
"북괴의 지령에 따라 모국유학생을 가장해 암약해온 간첩들이 국내대학에 침투, 통일혁명당 지도부를 학원 안에 구성했다... 모국유학생 북괴간첩이 한국사회의 자유화와 민주화에 편승해 사회불안을 조성하고 국가변란을 꾀했다." 
 
 1975년 11월 22일 '재일교포 유학생 간첩사건'에 대해 언론에 직접 브리핑을 하는 김기춘 당시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 이 사건으로 간첩으로 몰렸던 유학생들은 40여년만에야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 받는다. 유신시대 대표적인 용공조작사건이다.
 1975년 11월 22일 "재일교포 유학생 간첩사건"에 대해 언론에 직접 브리핑을 하는 김기춘 당시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 이 사건으로 간첩으로 몰렸던 유학생들은 40여년만에야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 받는다. 유신시대 대표적인 용공조작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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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교포유학생의 10%가 '간첩'

언론의 자유가 얼어붙던 시절 주요 신문은 중정의 주장을 1면에 그대로 싣고 '학원침투 간첩 14명'을 사진과 함께 보도했다. 이어서 간첩죄, 간첩방조죄, 반공법위반으로 재일교포 유학생 백옥광, 김오자, 김철현, 허경조, 강종헌, 김동휘, 노승일 외 총 21명이 구속 기소되어 송치되었다.

당시 재일교포유학생이 200~300명인 것을 감안하면, 이들 중 약 10%가 '간첩'으로 구속된 것이다. 그리고 가혹한 고문 끝에 이 '간첩'들은 사형 등 중형을 선고받아 장기수로 '인생의 황금기'를 조국의 좁고, 어둡고, 추운 감방에서 보낸다. 이 사건의 수사책임자가 바로 김기춘인 것이다.

이 발표가 있기 약 한달 전 재일교포 유학생 김동휘(1954년생, 21세), 백옥광, 강종헌 등은 1975년 10월 7일부터 10월 31일 사이에 중정에 체포되어 가혹한 고문조사를 받고 간첩, 회합·통신, 잠입·탈출, 고무·찬양, 금품 수수 등 국가보안법, 반공법 위반혐의로 기소되었다.

그리고 서울형사지방법원은 백옥광에 대해 사형을 선고하고, 김동휘를 비롯한 나머지 강종헌 등에 대해 징역 10년부터 징역 5년 및 각 자격정지의 판결을 선고했다. 서울고등법원은 피고인 백옥광의 항소를 기각하고, 나머지 피고인들에 대해 징역 5년에서 징역 3년 6월 및 각 자격정지의 판결을 선고했으며, 이 판결은 대법원의 상고기각 판결로 확정되었다. 김동휘에 대해 확정된 형은 징역 4년에 자격정지 4년이고, 백옥광에 대해 확정된 형은 사형이다. 그러나 백옥광은 특별사면으로 감형되어 몇 십 년을 복역한 후 출소한다.

"옷을 모두 벗겨놓고 마구 때렸다"

훗날 김동휘는 진실화해위원회(아래 진실위) 조사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중앙정보부 수사관들은 지하실로 데리고 가자마자 '너의 죄에 대해 말해. 너는 여기 온 이유를 알고 있지? 우리한테 할 말이 있지 않냐'고 해서 제가 없다고 하자, '거짓말하지 말라'고 하면서 종이와 펜을 주면서 쓰라고 했다. 2일 정도 계속 추궁 당했고, 3일 동안 잠을 재우지 않고 24시간 계속 조사를 했다. 옷을 모두 벗겨놓고 무릎을 꿇게 한 뒤 방에 있던 침대에 끼워진 각목을 꺼내 무릎 뒤에 넣고는 위에서 밟아댔다. 오랫동안 엎드려뻗쳐를 시켜놓고 힘들어서 쓰러지면 그 각목으로 마구 때렸다... 2명이 번갈아 가면서 가혹행위를 했는데, 한 사람은 20대에 키는 175cm 정도에 성은 유씨였고 이름은 모르겠고 다른 사람은 40대의 대머리였다. 그리고 상사인 계장이라는 사람이 가끔 들어왔는데 이름은 모르겠다." 

김동휘는 검찰조사와 관련해, "중앙정보부에서 고문과 폭행으로 내가 하지도 않은 일을 허위 자백했다고 하니 검사는 들은 척도 않고 기록을 보더니 무인을 찍으라고 했다. 안 찍겠다고 하니 검사가 기록 뭉치로 머리를 후려치며 '악질새끼'라고 하면서 중앙정보부에 연락했다. 그날 밤 중앙정보부 직원 두 명에게 남산으로 다시 끌려가서 새벽까지 두들겨 맞으면서 협박당했고 다음날 새벽에 구치소로 돌아왔다. 당시 20살로 한국말도 서툴렀던 내가 극심한 폭행과 강압적인 분위기를 견디기에는 너무나도 힘들고 무서웠다. 아무도 나를 믿어주는 사람이 없었고 믿을 사람이 없다는 생각만 들어 모든 걸 체념하게 되었고 결국 그들이 하라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고 진실위에서 진술했다.

또한 김동휘는 재판과 관련해, "1심 재판에서 조사 도중 고문 받은 사실이 없다고 했는데 당시 중앙정보부의 협박이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1심 때 재판정에 중앙정보부직원이 방청석에 앉아서 지켜보는 것을 보니 부인하면 다시 끌려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운 생각에 진실을 말할 수 없었다. 변호사도 기소된 이후 처음 만났고 가족들은 1심 끝난 후에 처음 봤다. 당시 누나도 함께 한국에 유학 중이었지만 중앙정보부의 감시로 일본의 부모님께 연락을 드리지 못했다고 했고, 구치소에서도 2심이 끝날 때까지 독방에 있었다"고 진실위에서 주장했다.

또 김동휘는 재판에서 "고문이나 가혹행위를 입증할 수 있는 증거를 제출하지 않으면 허위자백 한 것을 밝힐 수 없다고 하는데 대체 어떻게 입증자료를 찾을 수 있겠는가. 모든 혐의사실이 나의 자백 외에는 입증할 수 있는 증거자료가 없으니 이것이 조작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라고 진실위에서 진술했다.

김동휘는 2심 항소이유서에서는 "원심에서 인정된 증거도 중앙정보부와 검찰의 피신조서와 진술조서뿐이므로 이 모든 것은 수사과정에서 허위로 조작된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당시 1심은 그에게 10년, 2심은 4년을 선고했고 대법원은 그의 상고를 기각한 것이다.

허경조는 진실위 조사에서 "여기서 일어난 것은 절대로 말하지 말라는 협박을 받았고, 벽에 기대어 세워놓고 엉덩이와 복부 밑 부분을 사정없이 구타했다. 특히 허리 끝 요추 부분을 맞았을 때는 정신이 없고 마비되는 것 같았다. 시퍼렇게 온 몸이 멍이 들었고 그 멍이 사라질 때까지 중앙정보부에 있었다"고 진술했다.

"성고문 끝에 결국 간첩이라고 거짓 자백"

당시 여대생 김오자씨는 "한국사회의 민주화에 도움이 될 공부를 하고 싶어서 일본에서 조국 부산대로 유학을 왔다"가 가혹한 고문 끝에 간첩으로 조작되었다. 어느 날 갑자기 영장 없이 중정 지하실에 끌려간 그는 수사관들의 폭력과 협박 그리고 성고문 끝에 결국 간첩이라고 거짓 자백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1심에서 사형, 2심에서 무기형을 선고받고 감옥살이 9년 후 가석방되었다. 그는 재심을 통해 지난 2019년 8월 22일 44년 만에 무죄를 선고받았다.

재판부는 이날 고문후유증으로 귀가 어두워진 그를 위해 청각보조 장치를 제공하고 앉아서 다음과 같은 무죄 선고 주문을 듣도록 했다.
 
"김(오자)씨가 영장 없이 수사기관에 연행돼 상당기간 불법 구금돼 있었고, 그 과정에서 폭행과 협박을 당해 정신적, 신체적 고통을 입어 우리 법원도 대단히 안타깝게 생각한다. 앞으로 그런 일은 다시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 우리(국가)가 피고인에게 가혹행위를 한 데 대해선 정말 많이 반성해야 한다고 판단한다... 당시 피고인이 자백한 진술은 위법한 상태 또는 폭행, 협박으로 심리적으로 불안한 상황에서 이뤄졌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유죄 근거로 제출된 각종 압수물은 불법 구금 상태에서 김씨가 가혹행위를 당할 때 임의로 제출된 것이라 불법 수사 과정에서 강제로 얻어진 것으로 보인다." 

김오자는 "10년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가 고생을 가장 많이 하셨습니다. 어머니와 가족들에게 소식을 알리고 싶습니다"라고 법정에서 소회를 밝혔다. 하지만 망가진 그의 20대의 삶에 대해서는 누가 어떻게 보상해 줄 것인가! 

강종헌은 재일교포유학생으로 서울대 재학 중이던 1975년 어느날 갑자기 보안사 수사관에게 연행되어 서광태, 박종렬 등과 함께 1976년 2월 23일 국가보안법 등 위반혐의로 기소되었다. 1976년 7월 7일 그는 서울형사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항소했으나, 같은 해 11월 16일 서울고등법원에서 기각되고, 1977년 3월 15일 대법원에서 상고 기각되었다. 그는 복역 중 1982년 3월 3일 무기징역으로, 1984년 8월 14일 징역 20년으로 감형되고, 1988일 2월 27일 징역 7년이 감형되어 1988년 12월 20일 가석방되었다.

강종헌은 훗날 진실위 조사에서, "(보안사에 끌려온) 첫날은 막대기를 들고 구부정하게 세워놓는 벌을 세우더니 이틀째부터는 무자비한 폭행이 시작되었다. 조사실에 있던 군용침대에 끼워진 각목을 꺼내 마구 패기 시작했다. 목뒤부터 종아리까지 보이지 않는 곳만을 교묘하게 때렸다. 그렇게 며칠을 맞았더니 그들 앞에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중앙정보부 조사에서 '너는 5년만 살면 된다. 검찰에 가서 부인하면 다시 끌고 오겠다'고 협박했다... 검찰에 송치되어 구치소에 수감 중일 때 세면장에서 씻으려고 옷을 벗었더니 목뒤부터 발뒤꿈치까지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재소자들과 교도관들이 보고 놀랐을 정도인데도 검찰은 가혹행위가 있었는지 물어보지도 않았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보안사는 민간인 신분이었던 강종헌 등 관련 피고인에 대한 국가보안법위반이나 형법상 간첩혐의에 대한 수사권을 갖고 있지 않았다.

강종헌은 '항소이유서'와 '상고이유서'에서 보안사의 수사과정에서 고문 등 가혹행위를 받은 사실에 대해 "보안사령부 공작처에 체포된 이래 서울구치소로 이송되기까지 무려 50일간, 온갖 고문과 갖은 협박, 기만 밑에서 수사를 받았다. 그 결과 본인의 의사가 무시된 채, 강요된 내용의 자필 진술서를 쓰게 되었으며, 2회 이상의 자술서는 공범들의 조서와 일치되게끔 억지로 작성된 것으로 사실이 아니다... 보안사 수사에서 취조는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심한 고문과 온갖 공갈, 협박, 회유를 써가면서 진행됐으며 계속 가해지는 육체적 및 정신적인 고통을 면하기 위해서는 오로지 조사관이 하라는 대로 하고 쓰라는 대로 진술서를 쓰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고 주장했다.

강종헌은 서울고등법원 공판에서 "고문에 못 이겨서 (북한에) 갔다 왔다고 허위진술하게 된 것"이며, "계속 가해지는 고문과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면하기 위해서는 수사기관에서 하라는 대로 하고 쓰라는 대로 쓰는 도리밖에 없었고 고문에 못 이겨서 그 부분에 대해서는 수사기관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50일 동안이나 지칠 대로 지쳤고 또 수사기관에서 한 것을 검찰에서 부인하면 다시 수사기관에서 재조사를 하게 된다는 생각을 하니까 부인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못했다. 또 1심 재판과정에서 공소사실 이유를 부인했다고 해서 구치소에 수감 중인데도 불구하고, 수사기관에서 붙들어가 가지고 다시 고문을 받고, 앞으로는 절대로 재판에서 부인을 하지 않겠다는 각서까지 쓰라고 해서 썼다... 담뱃불로 지지고, 약도 먹였다. 또 뭔지 모르지만 몽롱해지는 주사를 맞았다"고 고문사실을 폭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1심에서 사형, 2심에서 무기징역 등을 받은 것이다.

강종헌은 사건발생 39년 만인 지난 2014년 9월 26일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그의 잃어버린 세월은 어떻게 보상받을 수 있을까?

"핏물을 마시게 했다"

서광태는 '상고이유서'에서 "서울역 부근의 모처 지하실에 도착 즉시 무수한 폭행에 얼굴은 피투성이가 되고, 이를 씻은 핏물을 마시게 하는 등 무시무시한 공포분위기", "무릎을 꿇고 앉혀놓고 그 아래에 박달나무 곤봉 같은 나무를 넣고는 수없이 많은 사람이 번갈아가며 워커발로 허벅지 위를 짓밟은 통에 기절했음은 물론 정강이 아래는 피투성이가 되고, 나무마저 부러졌습니다. 손가락 사이에 볼펜을 끼워 누르는 등의 무수한 육체적 고문이 가해졌으나 그 중에서도 제일 참기 어려웠던 괴로움은 무수히 많은 수사관님들이 교대로 들어와서 감시하는 통에 계속해서 한 주일 이상을 거의 자지 못한데서 오는 불면의 고통과 '면도칼로 살껍데기를 벗기겠다. 빨갱이는 삼족을 멸하니 너 하나쯤이야'라는 그 지하실의 분위기에 어울리는 전율할 만한 말들이었습니다"라고 주장했다.

또 훗날 진실위 조사에서 서광태는 이렇게 진술했다.
 
"무수한 폭행에 피투성이가 된 얼굴을 하고 화장실에 가니, 또 다른 나의 벌건 선혈이 뚝뚝 한 바께쓰(양동이) 채 가득 기다립니다. 얼핏 거울을 보니, 피에 뜯긴 해골이 짓이겨 있습니다. 아무리 맞고 차여도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수직으로 거꾸로 서서 팔굽혀펴기 운동을 시킵니다. 못 먹고 잠도 못 잔 해골에 피가 몰려 쓰러지면 기다리는 것은 정다운 발길질 입니다... 병원에 끌고 가서는 큰 주사기에 소바늘 만 한 바늘을 끼고는 왼쪽 혈관에다 직각으로 꼽고 쑤셔 넣기 시작했습니다. 주사를 놓기 전에 그들은 터무니없이 Arrhythmia(부정맥)라고 진단을 내려놓았습니다...(공판 진행 중) 수도통합병원에서 정신과 치료 명목으로 감금되었는데 말이 '치료'이지 사실상 새로운 고문이 가해졌습니다." 

박종렬은 진실위 조사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보안사 수사관들은 무릎사이에 각목을 넣고 꿇어 앉혀 위에서 허벅지를 밟는 고문을 했는데, 워카발에 허벅지를 밟히게 되면 입이 쩍 벌어지는데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런 구타를 수차례 당했다... 남영동에 연행되어 수사관이나 사병이 6일 동안 한숨도 자지 못하게 해 몽롱한 상태에서 조사를 받았고, 잠을 못 잔 상태에서 구타를 당하게 되자 모든 것을 포기했다. 나중에 서빙고로 넘어왔을 때는, 수사관들이 말하는 대로 인정하게 되었다... 자술서 내용을 강요해, 똑같은 내용을 수없이 계속 쓰다 보니 자신이 실제로 그런 일을 했던 것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조사 중 너무 괴로워 수사관들이 잠시 자리를 피한 사이에 주먹으로 벽을 때린 적이 있는데, 하얀 벽에 온통 피가 튀었는데 그것을 본 보안사 수사관이 '이 미친놈, 세계챔피언이나 하지'라고 했다... 당시 너무 억울해서 일체 밥을 먹지 않았는데, 나중에는 귀에서 고름이 흘러나왔고, 귀가 거의 안 들리게 되자 수사관들이 온갖 욕을 하면서 조사를 했으며, 나중에 교도소에 가서 5개월 정도 기억상실 상태가 되기도 해, 신경쇠약, 중이염, 소화불량, 불면증이 와서 감기약, 소화제 등을 달고 살았다."

"네가 보는 앞에서 네 여자를 겁탈하는 것을 보고 싶냐?"

당시 또 다른 피의자 재일교포유학생 이철은 "팬티까지 발가벗기고 무조건 패기 시작했습니다. 성기까지 붙잡고 꼼짝 못하게 하고 담뱃불로 지지려했습니다. '네가 보는 앞에서 네 여자(약혼녀)를 겁탈하는 것을 보고 싶냐. 장모까지 하려고 한다.' 그래서 사정을 했습니다. 모든 말을 들을 테니까 그렇게 하지 마시오"라고 훗날 진술했다.

일본에 살던 그의 아버지는 그가 구속된 날 쓰러져 53살의 나이에 돌아가셨고 3년 후 감옥에 있는 그를 그리워하며 그의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약혼녀도 간첩을 신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당시 구속됐다. 사건 발생 39년 후인 지난 2014년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은 그는 "당연히 무죄인데 이 소리를 들을 때까지 40년이 걸렸습니다"라고 그 소회를 밝혔다.

황혜헌은 훗날 진실위 조사에서 "처음 남영동에 연행되자마자 수사관들이 구타를 했는데 엎드리게 해 몽둥이를 이용해 구타했고, 2명의 수사관에게 큰 각목으로 40~50대 정도를 맞아 엉덩이쪽에 멍이 들어 걷지 못했다. 수사관들이 '여기는 간첩 잡는 방첩대이다', '너 하나 물에 빠트려도 아무 일이 없다'는 협박과 옆방에서 들려오는 구타소리, 비명을 계속 듣게 되자 수사관들이 말하는 것을 거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진술했다.

당시 보안사 수사관 손○○은 진실위 조사에서 "당시 어느 정도의 가혹행위는 있었다. 수사관에 따라서 과격한 조사를 하는 사람이 있었으며, 피의자가 외상이 나지 않도록 특별히 (상부에서) 지시가 내려오기도 했다"고 하고 "보안사 지하실은 옆방에서 나는 소리가 들릴 수 있는 구조로 일부러 비명을 내서 겁을 주기도 했다"고 진술했다.
 
 김기춘
 김기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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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는 있지만 가해자는 없는 대한민국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1975년 11월 22일 이른바 '재일교포유학생간첩사건'은 당시 중정 대공수사국장이었던 김기춘이 주도했다. 김기춘은 박근혜 정권에서 대통령비서실장, 노태우 정권에서 검찰총장과 법무부장관을 역임했다. 이 사건을 비롯한 다수 공안사건의 '성과' 덕분에 김기춘은 탄탄대로를 걸었다. 1990년 검찰총장으로 재직하던 김기춘에게 수여된 5.16민족상의 수상이유를 보자.
 
"김기춘 검찰총장은 61년 검찰에 투신한 이래 각종 범죄와 부조리 척결에 모범을 보인 것은 물론, 공안사범 등의 수사에 헌신, 자유민주 체제수호와 국가안보에 이바지해왔다. 특히 70년대 중반 이후 급증한 북한의 우회침투간첩 색출에 수사력을 집중, 75년 국내대학 유학생으로 위장 침투, 학원시위를 배후조종한 재일교포유학생 간첩단 19명을 검거하고 77년에는 재일교포간첩 강모 등 지금까지 간첩 58명과 반국가안보위해사범 2백40명을 검거, 북한의 대남공작역량을 분쇄하는 데 공헌해 왔다." 

2010년 진실위는 이 사건을 조작사건이라고 결론을 내렸고, 2011년 피해자들은 재심을 청구했으며, 2014년 재심에서 무죄 판결이 났다. 더욱이 사건의 피해자 노승일은 2003년 6월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로부터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피해자는 있지만 가해자는 없는 대한민국에서 지난 2004년 SBS의 <그것이 알고 싶다>에 출현한 김기춘은 이 사건의 수많은 피해자들에게 한 마디의 사과도 하지 않았다. 김기춘은 오히려 "인권침해 해서 간첩 잡았으면 (내가 오늘)이 자리에 있을 수 없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그 후 이 사건의 피해자들은 재심에서 잇따른 무죄판결을 받았다.

그럼에도 박근혜는 대통령이 된 후 김기춘을 대통령비서실장으로 임명했다. 아직껏 김기춘은 과거 간첩조작사건과 관련해 어떤 처벌도 받은 적이 없다. 최근 재심에서 이 사건에 대한 무죄판결이 잇따르자 김기춘은 "나와 관계없는", "기억에 없는 일"이라고 했다.

지난해 10월 5일 김기춘은 이 사건이 아닌 박근혜 정권 '화이트리스트' 사건 1심에서 법정 구속되었다. 하지만 재수감된 지 425일 만인 지난 12월 4일 출소했다. 출소한 김기춘을 따듯하게 맞이한 민경욱 자유한국당 의원은 이날 자신의 페이스북에 "김기춘 비서실장께서 마스크를 쓰고 걸어나오셨다... 건강은 어떠시냐고 물었더니 괜찮은 편이라고 하셨다"고 적었다.

한편, 지난 6월 문재인 대통령은 재일교포간담회에서 과거의 재일교포유학생 간첩조작사건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를 위해 소중한 자료를 제공해준 반헌법행위자열전편찬위원회 정진태 조사실장님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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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국민권익위윈회 청렴포럼위원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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