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분황사 정문 아담한 기와지붕 아래에 분황사 현판과 붉은 칠을 한 세 개의 문이 달려 있다.
▲ 분황사 정문 아담한 기와지붕 아래에 분황사 현판과 붉은 칠을 한 세 개의 문이 달려 있다.
ⓒ 배남효

관련사진보기

 
경주의 신라유적이 많은 대릉원을 거쳐 보문단지 쪽으로 가다 보면, 원효대사가 머물며 공부했다는 분황사(芬皇寺)가 나온다. 시내를 조금 벗어나는 곳이라 넓은 들이 열리면서 시원한 경관이 펼쳐지고, 아담한 규모로 한적하게 자리잡아 아늑한 분위기를 더해주고 있다.

분황사 앞의 넓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정문 앞으로 가면, 기와지붕으로 된 붉은 색의 아담한 대문이 방문객을 편안하게 맞이해준다. 정문은 중간 문과 양쪽 문의 3개로 되어 있는데, 중앙에 걸린 분황사라는 현판의 글씨가 자그맣고 예쁘게 눈에 들어온다. 
 
분황사 현판 선덕여왕을 뜻하는 분황의 분자를 곱게 날려서 써 향기로움을 느끼게 한다.
▲ 분황사 현판 선덕여왕을 뜻하는 분황의 분자를 곱게 날려서 써 향기로움을 느끼게 한다.
ⓒ 배남효

관련사진보기

 
분(芬)자를 날린 글자로 써 놓아 멋을 부리는 모습을 하고 있는데, 그냥 봐서는 분자로 알아보기 어렵지만 글자의 뜻대로 향기로운 운치를 느끼게 해준다. 절 이름 분황사를 유추해보면 분황은 향기로운 임금이라는 뜻이니, 선덕여왕이 즉위하고 여왕을 기리는 뜻에서 창건하여 그렇게 이름을 붙인 것으로 보인다.

정문의 오른쪽 담옆에는 분황사를 소개하는 안내판이 서 있고, 분황사 절내의 유적 위치를 알려주는 소개도도 같이 붙어 있다. 주요 유적을 살펴보면 국보 제30호로 지정된 모전석탑을 비롯하여, 화쟁국사비 비석대, 석정, 보광전, 석가여래입상, 석조, 초석, 대석 등이 있다고 나와 있다.

먼저 분황사에 안내판에 나와 있는 설명을 그대로 옮겨본다.

"분황사는 신라 선덕여왕 3년(634년)에 창건된 이래 지금까지 법등을 이어온 유서갚은 사찰이다. 분황사 창건 직후에는 당대의 명승 자장율사와 원효대사가 주석(駐錫)하였다.

분황사에는 솔거가 그렸던 관음보살상 벽화와 경덕왕 14년에 강고내말이 구리 307,600근으로 주성하였던 약사여래상 등이 있어 사격(寺格)을 높였다.

분황사에는 당간과 지주, 중문, 석탑, 3금당, 강당, 회랑을 갖춘 대가람이었으나, 고려시대 고종 25년(1238년) 몽고침입과, 조선왕조시대의 임진왜란 정유재란을 차례로 겪으면서 대부분 전각이 소실되어 버리고 광해군 원년에 중창하고 새로 주조한 보광전과 약사여래입상 등이 사역을 지키고 있다.

현재 분황사 경내에는 신라의 석탑 중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것으로 알려진 모전석탑, 원효대사의 비석을 세웠던 화쟁국사비부, 구황동 당간지주, 신라 호국룡의 설화가 깃들어 있는 석정 등의 석조 문화재가 남아 있다."

 
분황사 모전석탑 신라시대 건축한 모전석탑으로 당시는 9층탑이었으나 지금은 3층만 남아 있고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 분황사 모전석탑 신라시대 건축한 모전석탑으로 당시는 9층탑이었으나 지금은 3층만 남아 있고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 배남효

관련사진보기

 
분황사를 입장하는 표를 사서 정문을 들어가면, 그렇게 넓지 않은 절마당이 조용하여 아늑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절마당의 정면에는 검은 색의 3층 석탑이 자리잡고 있으면서,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하여 예사 절이 아니라는 느낌을 준다.

모전석탑(模塼石塔)이라 이름붙어 국보로 지정받은 유서가 깊은 탑인데, 높지는 않으나 사각으로 넓으면서 단단한 느낌을 주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신라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걸작품으로,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올린 9층탑이었는데 지금은 3층만 남아 있다. 
 
모전석탑 돌사자상 네 모퉁이마다 화강암으로 조각된 씩씩한 돌사자상이 한 마리씩 앉아 있다
▲ 모전석탑 돌사자상 네 모퉁이마다 화강암으로 조각된 씩씩한 돌사자상이 한 마리씩 앉아 있다
ⓒ 배남효

관련사진보기

 
탑의 바닥 기단은 넓직하게 자연석으로 이루어져 있고, 네 모퉁이마다 화강암으로 조각된 씩씩한 사자상이 한 마리씩 앉아 있어 눈길을 끈다. 탑신은 회흑색 안산암을 작게 벽돌모양으로 잘라 쌓아올렸는데, 1층 몸돌은 거대하고 2층과 3층은 낮게 줄어드는 모습을 하고 있다. 
​ 
모전석탑 인왕상 몾너석탑 몸돌의 네 면에 모두 문을 만들고, 양쪽에 불법을 수호하는 인왕상을 조각해 놓았다.
▲ 모전석탑 인왕상 몾너석탑 몸돌의 네 면에 모두 문을 만들고, 양쪽에 불법을 수호하는 인왕상을 조각해 놓았다.
ⓒ 배남효

관련사진보기

 
탑을 살펴보면 1층 몸돌에는 네 면에 모두 문을 만들고, 양쪽에 불법을 수호한다는 인왕상을 조각해 놓아서 매우 인상적이다. 인왕상은 씩씩하면서도 섬세하게 잘 조각되어 있어, 당시 7세기 신라의 조각 양식을 살피는 데 좋은 자료가 된다고 한다.
 
화쟁국사비부(和諍國師碑趺) 원효대사의 비문을 세우는데 썼다고 한다.
▲ 화쟁국사비부(和諍國師碑趺) 원효대사의 비문을 세우는데 썼다고 한다.
ⓒ 배남효

관련사진보기

 
석탑을 오른쪽으로 지나면 바로 옆에 원효대사의 비문을 세우는 데 썼다는 화쟁국사비부(和諍國師碑趺)가 보이는데, 돌의 중간이 네모지게 길게 파여 있어 그 흔적을 엿볼 수 있다.

그 연원을 보면 고려 명종이 원효대사를 위한 비석이나 시호(諡號)가 없음을 애석하게 여겨, 대성화쟁국사(大聖和諍國師)라는 시호를 내리고 비석을 세우게 하였다. 그후 오랫동안 방치 훼손되어 오다가 추사 김정희가 절 근처에서 발견하여, '此和靜國師之碑趺'라고 확인하는 글귀를 받침돌에 새겨두었다고 한다.
 
분황사 석정 절마당에 돌로 만든 팔각형의 자그마한 우물
▲ 분황사 석정 절마당에 돌로 만든 팔각형의 자그마한 우물
ⓒ 배남효

관련사진보기

 
석탑 바로 뒤에는 절마당에 돌로 만든 팔각형의 자그마한 우물이 있는데, 석정(石井)이라 하여 신라시대 때부터 내려오는 가장 크고 좋은 우물 유적이라고 한다. 석정(石井)은 바위 틈 사이로 솟거나 흐르는 물을 고이게 바위를 옴폭하게 파고, 그 위에 다시 시설(施設)을 해서 만든 우물의 형태라고 한다.

이 우물은 호국룡(護國龍) 변어정(變魚井)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여기에 따른 재미있는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

분황사의 석정과 서라벌 동북쪽 금학산(琴鶴山)의 동천사(東泉寺)에 있는 동지(東池)와 청지(靑池)라는 두 우물에는 신라를 지키는 호국룡이 살고 있었다. 원성왕(元聖王) 때 신라에 온 당나라 사신이 이 용들을 3마리의 물고기로 변신시킨 뒤 잡아가지고 길을 떠났다. 하루 뒤 두 여인이 원성왕 앞에 나타나 이런 사실을 알리고 그들을 찾아 줄 것을 호소하였다. 왕이 사람을 시켜 당나라 사신을 쫓아가 그가 가지고 가던 물고기를 되찾아서 각각의 우물에 놓아주고 다시 살게 하였다고 한다.

또 이 우물에는 조선시대에 있었던 슬픈 이야기도 같이 전해져 오는데, 불교억압책에 따라 사찰내의 모든 돌부처의 목을 잘라 이 우물에 넣었다고 한다. 우물 안을 한번 들여다 보려 했는데 나무 두껑으로 덮어 놓아 볼 수가 없었는데, 목이 잘렸다는 돌부처들이 떠올라 가슴이 아팠다. 
 
보광전 약사여래입상 보광전 안에 동 5360근으로 만든 약사여래입상이 서 있다
▲ 보광전 약사여래입상 보광전 안에 동 5360근으로 만든 약사여래입상이 서 있다
ⓒ 배남효

관련사진보기

 
절마당을 안으로 조금 더 들어가면 아담한 법당이 나오는데 보광전이라 현판이 붙어 있고, 처마가 낡고 단청이 벗겨진 채 고풍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보광전 안에는 중생의 질병을 구제한다는 약사여래입상이 보관되어 있는데, 원래는 무게 30만 6700근의 동으로 만든 신라 최대의 불상인 약사여래좌상이 있었다고 한다.

​1998년에 보광전을 고쳐 짓기 위해 해체하던 중 기록을 발견하였는데, 분황사는 임진왜란 때 불탔고 현재의 불상은 1609년에 동 5360근으로 만들었고 보광전은 1680년 5월에 다시 지었다고 한다. 불상의 얼굴은 둥글고 몸매도 통통하여 익살스러운 느낌을 주기도 하는데, 손에는 약그릇을 들고 있어서 약사불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분황사 대종각 방문객들이 천원을 시주하고 종을 치고 있다.
▲ 분황사 대종각 방문객들이 천원을 시주하고 종을 치고 있다.
ⓒ 배남효

관련사진보기

 
절마당의 왼쪽 가장자리에는 아담한 기와지붕으로 된 대종각이 있고, 커다란 쇠종이 달려 있는데 방문객들이 종을 쳐서 종소리가 그윽하게 들려 왔다. 가까이 가서 보니 종각 앞에 있는 자비함에 천원을 넣고 칠 수 있게 되어 있는데, 사람들이 돌아가며 돈을 넣고 종을 치면서 좋아 하였다. 아마도 종을 친 사람들은 분황사의 종소리를 좋은 추억으로 간직할 것 같다.

분황사의 경내는 그리 넓지 않아 천천히 둘러볼 수 있었는데, 다양한 석조물들이 담벼락 큰 나무 아래에 여기저기 늘려 있어 인상적이었다. 아마 절에 있었던 여러 가지 석조물들이 손상되고 남은 유물들을 모아 놓은 것 같은데, 분황사의 깊은 역사와 특이한 분위기를 엿볼 수 있었다.

 
분황사 보광전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 분황사 보광전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 배남효

관련사진보기

 
분황사를 다 둘러보면서 드는 느낌은 신라의 이름난 절임에도 불구하고, 크고 화려하지 않고 아담하고 소박하다는 인상을 받을 수 있었다. 분황이라는 말에서 선덕여왕의 아름다운 향기로움이 저절로 다가오고,  모전석탑, 석정, 보광전, 약사여래입상 등 유적들도 소박하고 친근한 느낌을 준다.

무엇보다 이 절에서 원효대사가 머무르며 공부를 했다고 하여, 절마당을 둘러보면서 대사를 생각하게 되어 좋은 것 같다. 또 연사(戀事)를 일으킨 요석공주의 궁과 월정교와도 그리 멀지 않은 위치에 있어, 대사와 공주 두 사람의 사연이 떠올려지기도 한다. 보광전 앞 불당에는 오래된 원효대사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구황동 당간지주 깃대를 세우는 받침대로 쓰이는데 분황사의 당간지주로 추정된다.
▲ 구황동 당간지주 깃대를 세우는 받침대로 쓰이는데 분황사의 당간지주로 추정된다.
ⓒ 배남효

관련사진보기

 
분황사를 나오니 앞에는 깃대를 세우는 받침대로 쓰이는 당간지주(幢竿支柱)가 서 있는데, 구황동 당간지주라 부르지만 분황사의 당간지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 ​옆에는 아주 넓은 들판이 좌우로 멀리까지 시원하게 펼쳐지고 있는데, 황룡사터를 발굴하고 조성하는 공사가 한창 진행중이다.

황룡사는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신라시대의 가장 크고 화려했던 절로, 주로 왕족과 귀족들이 다닌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라유적 복원의 최대사업인 황룡사가 다 복원이 되면, 분황사를 찾는 방문객도 더 많이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북촌학당에서 인문학 공부를 하고 있음 저서는 '사기(史記)의 인간학'이 있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