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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가 일부 고등학교 교과서에 '인민'이라는 용어가 삽입되어 있다며 문제 삼고 나섰다. '국민'이라는 말을 버리고 왜 북한에서 사용하는 말을 썼냐는 것이다. 숫제 '국민'과 '인민'을 '피아'를 식별하는 기준으로 여기는 셈이다. 해당 출판사는 교육부의 집필 기준을 따른 것일 뿐이라는 해명을 내놓았다.

대체 뭐가 문제라는 걸까. 남과 북이 긴장 완화를 넘어 평화와 통일로 나아가야 하는 시대에 왜 북한에서 사용하는 '인민'이라는 말을 쓰냐며 트집 잡는 건 유치한 몽니다. 나아가 언어에까지 낡은 이념의 잣대를 들이미는 꼴이다.
 
 11월 30일 <조선일보> 10면에 실린 기사 <일부 고교 윤리 교과서에 국민주권 대신 '인민주권'>
 11월 30일 <조선일보> 10면에 실린 기사 <일부 고교 윤리 교과서에 국민주권 대신 "인민주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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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과 중국의 국명에 사용됐으니, 쓰지 말라?
  
따지고 보면 북한 말도 지방의 사투리처럼 소중한 우리 국어의 일부다. 주지하다시피, 가락지빵(도넛)과 얼음보숭이(아이스크림), 살까기(다이어트), 살결물(로션) 등 순수한 한글이 살아 있는 용어가 북한에는 많다. 이는 무분별하게 외래어를 차용해온 우리에게 자못 귀감이 된다.

'불필요한 오해'를 낳는다고 지적하는 '인민'은 한때 '국민'보다 더 널리 쓰인 단어였다. 1948년 제헌 헌법 초안에도 '인민'이 사용되었다. 지금 초등학생들조차 알고 있는 헌법 제1조 2항도 그땐 이랬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인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인민으로부터 나온다.'

해방 직후 전국적으로 조직된 자치 기구의 이름도 '인민위원회'였다. 좌우의 극렬한 대립 속에 중도 세력의 폭넓은 지지를 받은 정당 역시 여운형이 세운 '근로인민당'이었다. 당시 '인민'은 이념의 편견 없이 사람들이 두루 사용한, 그야말로 무색무취한 용어였던 셈이다.

우리에게 '인민'이 사실상 금지어가 된 건, 오로지 북한과 중국 때문이다. 북한의 공식 명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고, 중국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약칭이다. 두 나라의 국명에 나란히 삽입되었다는 이유로, 사람들은 '인민'이라고 하면 공산주의와 나아가 '빨갱이'를 떠올린다.

이는 비단 '인민'만의 문제도 아니다. '노동'도, '민중'도 여전히 사용을 주저하는 용어로 남아 있다. 시나브로 옅어지곤 있지만, '노동자'라고 소개하면 색안경을 끼고 보는 이들이 아직도 많다. 하긴, '근로자의 날'이 '노동절'로 제자리를 찾게 된 건 그리 오래전 일도 아니다.

민중, 노동자, 인민... 단어에 대한 편견
  
노동자, 농민, 빈민 등 2019전국민중대회 개최 문재인 정권 규탄, 자유한국당 해체, 지소미아-방위비분담금인상 강요 미국 규탄, 민중생존권 쟁취, 재벌체제 청산, 한반도 평화 실현 등을 요구하는 2019전국민중대회가 30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민주노총, 전농, 전빈련, 한국진보연대 등으로 구성된 민중공동행동 주최로 열렸다.
▲ 노동자, 농민, 빈민 등 2019전국민중대회 개최 문재인 정권 규탄, 자유한국당 해체, 지소미아-방위비분담금인상 강요 미국 규탄, 민중생존권 쟁취, 재벌체제 청산, 한반도 평화 실현 등을 요구하는 2019전국민중대회가 30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민주노총, 전농, 전빈련, 한국진보연대 등으로 구성된 민중공동행동 주최로 열렸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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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이 창립되었을 때, 주위로부터 가장 많이 들었던 이야기가 '왜 교사 스스로 노동자로 비하하느냐'는 것이었다. 노동자는 '밑바닥 인생'을 상징하는 용어였고, 막 대해도 되는 존재였던 셈이다. 우리 사회의 고정관념은 그렇게 확산되고 고착화 되었다.

'민중'에 대한 거부감도 만만치 않다. 사실 '민중'과 같이 '다수의 사람들'을 뜻하는 용어는 많다. 영어로야 'people' 한 단어면 족할 테지만, 한자어가 많은 우리말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인민과 국민, 민중 외에 대중과 시민 등 비슷한 의미를 지닌 말들이 여럿 사용되고 있다. 

사실 용어마다 뜻의 차이는 크지 않다. 역사적, 법률적으로 해석되는 의미조차 서로 구분하기 쉽지 않다. 사전적 의미를 여기에 잠깐 적어본다. 부러 자사가 발행한 검정 교과서에 '인민' 대신 '국민'을 사용한 교학사의 국어사전을 참고로 했다.
 
인민(人民) : ① 사회를 구성하는 사람 (the people) ② 한 국가를 구성하고 있는 자연인으로, 법제사적으로는 공화국의 구성원을 말함.
국민(國民) : 한 나라의 통치권 아래 같은 국적을 가지고 있는 인민 (nation people)
민중(民衆) : 많은 사람의 무리. 군속(群俗), 민서(民庶) (people)
대중(大衆) : ① 수가 많은 모든 사람 (masses) ② 노동자, 농민 등의 일반 근로 계급 (general public)
시민(市民) : ① 국정에 참여할 지위에 있는 사람. 공민(公民) (people) ② 부르주아를 번역한 말 (bourgeois)

모두 이념이 덧씌워져 있지 않은 평범한 용어들이다. 굳이 차이점이 있다면, '국민'은 국적이 강조된다는 것과, '시민'의 경우에는 참정권의 개념이 내포되어 있다는 게 눈에 띌 뿐이다. '민중'과 '대중'은 서민과 맞바꿀 수 있는 용어로, 지배층의 상대 개념이라 하겠다.

그 중 '국민'은 과거 제국주의 국가에서 애용한 용어로, 현재 쓰는 나라는 많지 않다. 국적이 별 의미가 없는 유럽은 말할 것도 없고, 미국인들조차 스스로를 '국민'이라 칭하지 않는다. '국민의 권리'보다 '시민의 권리'가, '시민의 의무'보다 '국민의 의무'가 자연스러운 이유다.

특히 우리에게 '국민'이란 일제의 잔재로 기억된다. 지난 1994년 국민학교가 초등학교로 이름을 바꾼 것도 일제 잔재 청산 작업의 일환이었다. 주지하다시피, 1941년 일제는 우리 민족정신을 말살하고 황국신민을 길러내기 위해 소학교의 이름을 지우고 국민학교령을 제정했다.

하여 우리에겐 '국민'보다 '인민'이 국적과 계급, 직업 등에 상관없이 사람들을 두루 통칭할 수 있는 보편적인 용어로 적합하다고 할 수 있다. 보통명사로서 북한이 독점한 용어도 아닐 뿐더러, 설령 북한이 먼저 썼다고 해서 굳이 꺼릴 이유도 없다. '민중' 역시 마찬가지다.

지난 수십 년 동안 '국민'과 '대중'만 쓰다 보니 어색한 것일 뿐, '인민'과 '민중'을 백안시할 필요는 없다. 외려 즐겨 사용하면 그만큼 우리말은 다채롭고 풍성해질 것이다. 언어는 사고의 그릇일진대, 철 지난 색깔론으로 겁박할 게 아니라 사람들이 자주 사용하도록 권장할 일이다.

'리'영희, '리'승만... 뭐가 문제인가?
 
 이승만 저택이었던 이화장에서 찍은 이승만 동상. 서울시 종로구 이화동 소재.
 이승만 저택이었던 이화장에서 찍은 이승만 동상. 서울시 종로구 이화동 소재. 동상 아래에는 "우남 리승만"이라고 적혀있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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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성세대에 견줄 바는 아니지만, 요즘 젊은 세대 역시 '인민'과 '노동', '민중'이라는 용어를 불편해 한다. 대부분 노동자로 살게 된다는 말에 왜 자신을 무시하느냐며 발끈하는가 하면, '인민'은 북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고유명사로 여기는 아이도 있다. '어깨동무'와 '길동무'가 각각 어깨와 길, 친구라는 뜻의 순수한 우리말 동무의 합성어라는 것 자체를 놀라워하기도 한다. 동무를 북한말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5.18 민주화운동 40주년을 앞두고 아이들과 함께 국립 5.18 민주묘지를 답사할 기회가 부쩍 많아졌다. 공식 명칭은 '5.18 민주화운동'이지만, 묘역을 상징하는 추모탑에는 '5.18 민중항쟁'이라고 적시되어 있다. 광주시민들은 '민주화운동'보다 '민중항쟁'이라는 용어를 더 익숙해 한다.

답사 때마다 많은 아이들이 둘의 차이를 궁금해 한다. 대한민국의 발전에 기여한 민주화운동이자, 민중들이 불의한 공권력에 맞서 싸운 항쟁이니, 둘 모두 역사적 평가로서 온당하다. 동일한 사건을 진실에 근거해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하고 평가하는 일은 역사학의 본령이다.

5.18 답사를 통해 '민주화운동'과 '민중항쟁'이라는 의미와 의의를 모두 섭렵할 수 있으니, 아이들에겐 그야말로 일석이조다. 묘역에는 '민중'보다 아이들이 더 낯설어하는 말이 하나 더 있다. 이 시대 지식인의 표상이자 '사상의 은사'로 추앙받는 리영희 선생의 묘지석이 그것이다.

선생의 묘 앞에 가면, 아이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묻는다. 북한 사람이 국립묘지에 왜 묻혀 있느냐고. 중년 세대야 저명한 선생의 이름을 모를 리 없지만, 초등학교 때부터 두음법칙의 어법이 몸에 밴 그들에겐 성씨가 '리'라는 건 북한 사람임을 알려주는 증거일 뿐이다.

그리 오래지 않은 과거에 '이'와 '리' 등을 혼용했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지 못한다. 예컨대, 초대 대통령 이승만도 당시 자신의 이름을 '리승만'으로 표기했으며, 영어로도 남들처럼 'Lee'로 하지 않고 굳이 'Rhee'로 적었다. 물론, 당시 그런 표기를 어색해 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

지금도 자신의 성씨를 '리'로 적는다고 해서 법적으로 문제 될 건 없다. 관행적으로 '이'로 표기하는 것일 뿐, 영어로는 여전히 'Lee'이고 한자의 음도 '이'가 아닌 '리'가 맞다. 성씨에 대한 그의 애착을 북한식 표기라고 표현했을지언정 당시 그를 '종북 세력'으로 낙인찍진 않았다.

명색이 보수를 자칭하는 언론이라면, 생뚱맞게 북한 말과 남한 말을 편 갈라 갈등을 부추기지 말고, 차라리 범람하는 외래어에 맞서 순수한 우리말을 지키자는 캠페인을 벌이는 게 낫다. '민족지로서 정의를 옹호한다'는 사훈(社訓)이 부끄럽지 않도록 말이다.

거듭 말하지만, '인민'은 북한 말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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