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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 5월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을 했던 박관현 열사의 묘도 보입니다(신묘역 이장). 그 해 5월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을 했던 박관현 열사의 묘도 보입니다(신묘역 이장).
▲ 그 해 5월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을 했던 박관현 열사의 묘도 보입니다(신묘역 이장). 그 해 5월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을 했던 박관현 열사의 묘도 보입니다(신묘역 이장).
ⓒ 최향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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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ㆍ18 당시 전남대총학생회장으로 시위를 주도했던 박관현은 1982년 10월 12일 광주교도소에 갇혀,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으로, 교도관들의 폭력에 대한 항의로, 2주일의 단식을 결행하고 끝내 숨졌다. 운명하기 전 뼈만 남은 앙상한 모습으로 법정에서 최후진술을 남겼다.

언젠가 역사는 이 정권을 심판할 것입니다.
우리 시민들이, 아니 항쟁의 거리를 빠져나간 부끄러움을 간직한 제가 시민들과 함께 심판할 것입니다. 구천으로 떠나가 아직도 너무 원통해 두 눈을 감지 못하고 있을 내 동포, 내 형제의 영령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분명히 우리는 정확히 심판해야 할 것입니다.
   

5ㆍ18 때 시위에 참가했다가 계엄군의 총탄에 숨진 박용준은 마지막 날 일기에 이렇게 썼다.

 우리의 피를 원한다면
 이 조그마한 한 몸의 희생으로
 자유라는 대가를 얻을 수 있다면
 희생하겠다.
 헬기 소리, 또 총소리
 싸우다 쓰러져 간 학우
 그리고 광주시민
 나도 부끄럽지 않게 일어서리라.

 
 서강대 안 노고산 입구에 있는 김의기 열사 추모비.
 서강대 안 노고산 입구에 있는 김의기 열사 추모비.
ⓒ 김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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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가 계엄군에 진압당하고 4일 뒤인 5월 30일 기독교회관 6층에서 서강대생 김의기는 투신사망하였다. 몸을 날리며 뿌린 「동포에게 드리는 글」이다.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무장한 살육으로 수많은 선량한 민주시민들의 뜨거운 피를 뜨거운 5월의 하늘 아래 뿌리게 한 남도의 봉기가 유신진당들의 악랄한 언론탄압으로 왜곡과 거짓과 악의에 찬 허위선전으로 분칠해지고 있는 것을 보는 동포여, 우리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80년 5월 당시 전남도청 앞에서 궐기대회를 하고 있는 광주 시민들. 이같은 궐기대회는 목포 등 전남 지역으로 급속히 번져갔다.
 80년 5월 당시 전남도청 앞에서 궐기대회를 하고 있는 광주 시민들. 이같은 궐기대회는 목포 등 전남 지역으로 급속히 번져갔다.
ⓒ 5.18기념재단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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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23일 제1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가 도청 앞 광장에서 열렸다. 오후 3시경 15만 명의 시민이 모인 대회에 고등학생 최치수가 연단에 올랐다.

고등학생 여러분! 제가 이 자리에 올라온 것은 고등학생 여러분에게 데모를 하자거나 누구를 쳐부수자고 선동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이런 일은 어른들에게 맡겨두고 우리는 거리를 정리하는 등 고등학생들이 할 수 있는 일을 합시다. 제 말에 공감하시는 분들은 도청 민원실 앞에 모여주십시오.
 
 사진은 1987년 9월 8일 광주 망월동 묘역에서 김대중이 유가족과 함께 통곡하는 모습.
 사진은 1987년 9월 8일 광주 망월동 묘역에서 김대중이 유가족과 함께 통곡하는 모습.
ⓒ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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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신기자 (당시 『뉴욕타임스』 서울주재기자 심재훈)는 증언하였다.

나는 5ㆍ18광주항쟁이 아시아의 타 지역에서 발생한 여느 봉기와 다르다는 점을 발견했다. (중략)

그러나 광주는 달랐다. 탄압을 뚫고 진상 규명을 이뤄냈으며 그 불길이 아직도 타고 있다. 특히 아시아 지역의 현대사에 민중이 자발적으로 무장하여 독재 정권에 항거한 사건은 광주 한 군데뿐이다. 내가 아는 한 어느 나라에서도 광주와 같은 경우는 없었다.

  
DJ3 87년, 광주망월동묘지를 찾았을때, 묘지 참배 도중에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있는 모습
▲ DJ3 87년, 광주망월동묘지를 찾았을때, 묘지 참배 도중에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있는 모습
ⓒ 이경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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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선고와 옥고, 미국 망명 후 귀국한 김대중은 1986년 5월 18일 광주항쟁 6주년을 맞아 광주에 가서 망월동 묘지를 참배하고 유족들을 만나 위로하고자 했으나 새벽부터 경찰 수백 명이 동교동 자택을 겹겹이 포위하여 성사되지 못했다.

대신 부인과 장남을 보냈다. 그가 직접 망월동을 방문한 것은 9월 8일, 5ㆍ17 사태 이후 7년 만이었다. 통한의 추도사를 읽었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영령들이여!
한없이 한없이 사모하는 영령들이여!

김대중이가 여기 왔습니다. 꼭 죽게 되었던 내가, 하나님과 여러분들의 가호로 죽지 않고 살아서 7년 만에 여기 망월동의 영령 앞에 섰습니다.

광주! 무등산! 망월동!
감옥에서, 미국 땅에서, 그리고 서울 하늘 아래서 얼마나 많은 피눈물을 자아내고 가슴을 떨리케 한 이름이었던가!

이제 나는 그토록 그립고 그토록 외경스러웠던 광주와 무등산과 망월동에 오니, 한편으로는 어머니 품에 안긴 안도감을 느끼고, 한편으로는 준엄한 심판대에 선 것 같은 두려움을 아울러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죽음에 대한 전 세계적인 관심과 동정의 도움으로 구자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지만, 나는 과연 여러분과 여러분의 유가족을 위해 무엇을 했단 말입니까? 그리고 무슨 염치로 오늘 여기에 감히 나타날 수 있단 말입니까.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오직 죄책감에 몸 둘 바를 모르는 심정입니다.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5ㆍ18광주혈사’]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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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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