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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애가 스마트폰을 접신하면서 가장 먼저 빠진 게 웹툰이었다. 그냥 만화려니 했다, 그 위해함(주변화되고 대상화되는 여성성, 욕받이용 또는 징벌성 여성 캐릭터, 서비스 컷으로 제공되는 여체 노출 등)을 알고 기함했다. 분명 딸애도 즐겨봤을 그 웹툰을 페미니즘의 관점으로 하나하나 해부해낸 책을 만났다.

탱알이 쓴 <다 된 만화에 페미니즘 끼얹기>다. 저자가 웹툰의 핵심 서사를 명료하게 안내하기에, 웹툰을 즐기지 않는 독자라도 문제없이 읽을 수 있다. 저자는 페미니즘 렌즈로 들여다본 만화에 아주 제대로 페미니즘을 끼얹는데, '앗 뜨거' 혹은 '어 시원해'로 갈릴 듯하다. 직접 맛 보시라.
 
 탱알 지음 '다 된 만화에 페미니즘 끼얹기'
 탱알 지음 "다 된 만화에 페미니즘 끼얹기"
ⓒ 산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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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된 만화에 페미니즘 끼얹기>는 열 개의 소명제에 웹툰을 배치한다. 각각의 화두를 페미니즘으로 해체 조립하며 각개 혁파한다. 탈가정, 탈코르셋, 비혼, 나쁜 남자 신드롬, 여성이 겪는 마이크로어그레션, 맘 카페에서의 위장, 여자 퀴어, 여성 학대와 혐오, 고전 속 여성 서사에 은폐된 여성 학대와 혐오, 그리고 마침내 여성연대에 이르기까지, 어느 하나도 결코 우연하거나 사소하지 않은 서사임을 촌철살인으로 분석해 낸다.

우리는 '탈가정'할 수 있을까... <단지>를 통해

탈 가정한 '단지'는 집을 떠나 독립 주거를 시작하긴 했지만, '좋은 딸' 노릇까지 분리해내지는 못했다. 결혼 전 독립했거나 결혼 후 출가했다고 딸 노릇까지 원 가정으로부터 싹둑 잘라내지는 것은 아니다.

자라면서 받았을 아들딸 차별은 탈 가정 이후에도 유구히 이어지게 마련이다. 단지가 겪는 불완전 독립 서사는 딸 노릇이라는 젠더화된 여성성이 탈 가정에서도 끊임없이 변주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여성에게 탈 가정이 결혼이 아니고서는 가능하지 않은 시절이 있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것은 물론이고 사회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쉽지 않았다. 여자 혼자 산다는 것은 그 자체로 결함이기 때문이었다.

결혼 계획이 없어 서른 되기 전에 독립하겠다고 했을 때 내가 맞닥뜨린 가족의 저항은 강렬한 가부장을 각인시켰다. 무엇보다 엄마가 보여준 염려를 앞세운 저항은 "피해와 가해 속에서 서로의 심정적 인질이 되고 마는 딸과 엄마의 지리멸렬한 관계"(44)를 노출시키고 말았다.

편하다는 이유로 딸을 함부로 대하며 엄마는 딸 아들 차별을 은폐했다. "가부장제 집단에서 가장 낮은 계급을 지키고 있던 엄마에게 딸은 최초의 그리고 유일한 식민지"(40)이기 때문이다. 딸들을 가사와 돌봄 노동에 유용하게 써먹으면서도 부모는 언제나 말뿐인 보상에도 인색했다.

이런 부모를 떠날 수 있는 방법이 결혼밖에 없었던 역설은, 소나기를 피하려다 해일에 휘말리는 수난사를 반복하게 한다. 차별받은 딸들이 결혼 후까지 요구되는 돌봄 감정 노동은 '딸 밥은 앉아서 먹고 아들 밥은 서서 먹는다'는 염치없는 문구로 적나라하게 드러내지 않던가. 딸들이 구조적으로 제공하도록 요구받는 돌봄 감정 노동을 사회는 '효심'이라는 미사여구로 포장해 왔다.

'코르셋' 밖으로... <내 ID는 강남 미인> <화장 지워주는 남자>를 통해

러네이 엥겔른의 <거울 앞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다>는 여성의 젠더화된 노동인 '꾸밈'이 과연 어떤 욕구의 발로였을지를 고민하게 했다. 여성에게 꾸밈은 노동인 동시에 소비다. '핑크택스'로 불리는, 남성은 전혀 혹은 거의 지불하지 않는 소비에 여성들은 막대한 돈을 쏟아붓지만, 그 비용은 회수되지 않는다.

중고등은 물론 초등부터 화장품 비용을 지출하고, 화장을 하지 않으면 내부에서 배제당하는 괴이한 하위문화를 만들어내기에 이른다. 전혀 화장을 하지 않던 딸애가 화장에 눈을 뜬 것은 중학교 3학년 때였다. 이전까지만 해도 화장하는 것을 터부시하던 딸애가 왜 화장하게 되었는지 당시에는 몰랐다.

몇 년 후, 화장이라는 소녀들의 문화에 편입하지 않고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배제를 벗어나기 어려웠다는 고백을 들었다. 화장을 한 후 확연히 달라지는 외모로 호감을 받는 경험은 야릇하고 짜릿했다고 했다. 화장을 한 후 타인이 보이는 반응은 단지 예쁘다는 평가 외에도 상당히 다른 매너를 보였는데, 화장을 한 후 보다 존중받는다는 이해 불가한 현상이었다고 했다.

딸애를 미묘하게 헷갈리게 한 이 경험은, 이후 딸애가 '탈코르셋'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화장한 여성이 어떻게 다르게 대접받는가 하는 경험은, 화장이 정말 '자기만족'일 뿐이라는 '안티 코르셋' 주장을 수용하기 힘들게 했다.

처음엔 소녀 문화에 적극 가담 동화하기 위한 화장이 다른 취급을 받는 짜릿한 경험으로 수렴된 후, 그저 자기만족이기만은 어렵다는 깨달음에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딸애는 이 다른 대접의 욕구를 완전히 탈각하지 못한 채, 그럼에도 불구하고 '탈코르셋'을 지지한다. 내 욕망이라고 생각했던 그것이 정말 온전히 내 욕망이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아채가는 중이다.

저자는 '탈코르셋' 논쟁이 처음 펼쳐진 '경제성, 실용성'을 비껴가, '꾸밀 자유'로 분기되며 불필요한 갈등으로 심화된 것을 안타까이 여긴다. 화장으로 표상되는 '미적인 존재'로서의 여성성이 무의식적인 젠더 스테레오 타입으로 고착화되는 기능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저자는 외모에 대한 여성의 욕망의 실체를 끊임없이 회의해 볼 것을 제안한다. 당신의 꾸밈 노동은 당신의 욕망인가, 남성이 욕망에 부응하려는 욕망인가.

헬조선이냐 탈 조선이냐... <데일리 프랑스>를 통해

저자는 현재 이주민 여성으로 호주에서 살아가고 있다. 임신 후 이주했고 그곳에서 아이를 낳아 키우고 있다. 저자가 경선의 <데일리 프랑스>를 통해 이주민 여성이 겪는 '마이크로어그레션'(소수 집단에 가해지는 언어적 비언어적 차별을 일컫는다)을 경유할 수밖에 없던 이유가, 자신 또한 이주민 여성으로서 삶을 관통하고 있기 때문일 터다.

<데일리 프랑스>는 프랑스에 거주하는 동양 여성이 미묘한 차별을 겪은 일화들을 엮었다. 경선이 '친절한 아시아 여자애'로 재현되기를 바라는 서양 남자들의 터무니없는 기대가 '아시안 페티쉬'로 연결되는 지점을 예리하게 포착해낸다.

아시아 여성들은 이렇겠지 또는 이랬으면 좋겠다는 편견이 뽑아낸 속성들(윤기나는 검은 머리카락, 검은 눈동자의 이색적 외모, 순종, 헌신, 근면한 내면성에, 침대에선 요부가 되는 성적인 욕망까지)은 동양인 애인 또는 와이프로 대상화되어 변태적인 욕망으로 드러난다. 마침내 이 욕망이 가시화될 때 위험한 폭력을 낳고 동양인 여성의 안전은 위협받는다.

해외에서 학업 중인 딸애도 이런 종류의 불쾌한 '옐로 피버'를 겪는다. 동양인이라는 이색성을 좋아한다며 호감을 보이는 남자아이를 대면하거나, 동양인의 외모를 비웃으며 조롱하는 비하를 면전에서 겪기도 했다.

선망이든 비하든 얼굴을 달리한 '마이크로 어그레션'일뿐이라는 걸 깨닫는 데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차별감이 명확할 때는 반격할 수 있고 반격의 변도 명백할 수 있지만, 마치 이주민에게 배려하는 듯 벌어지는 미묘한 차별적 상황은 "그 확신이 생길 때까지는 나조차 나의 감각을 의심하고 부정하게"(149)되기에 그렇다.

"이주 여성의 전방위적 고립은 인종이라는 문제, 여성이라는 문제, 언어라는 문제가 복잡하게 뒤엉킨 사건이다. 그리고 상상이상으로 위험하다. 의존할 기반이 파트너뿐인 환경에야말로 데이트 폭력, 혹은 가정폭력이 가장 손쉽게 침투하기 때문이다."(162) 이는 비단 '탈조선'을 감행한 여성들에게만 해당하지 않는다. 얼마 전에도 이주민 아내를 '홧김에' 살해하고 암매장했다는 한국 남성의 범죄를 접하지 않았던가. 지금 여기서 벌어지는 이주민 여성의 '헬조선'의 반인권 현실은 바로 '탈조선'한 한국 여성의 현실과 맞닿고 있다.

저자는 <계룡 선녀전>과 <그녀의 심청>을 제시하면서 고전이 재해석되어 새롭게 재현되어야 하는 이유가 왜 중요한가를 설득한다. 선녀(여성)의 옷을 탈취한 후 겁박으로 결혼해 억류시킨 폭력을 아름다운 옛이야기로 여전히 기능시킨다면, 여성폭력 정당화를 지속적으로 학습시키는 효과를 낳을 수밖에 없다.

아버지가 자신의 안위를 위해 어린 딸을 인신매매한 폭력 서사를 지극한 효심으로 기억하게 둬서도 안 된다. 바리공주가 겪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난사를 읽으며 끓어오르는 울분을 누를 수 없는 데엔 이유가 있다. 무소불위 남성의 권력이 여성을 학대, 희생시키고 죽이는 서사를 비윤리적으로 상상하고 유희했기 때문이다. 이 분노를 더 이상 누르고 있을 무슨 이유가 있겠는가.

여성 서사 웹툰의 종착지가 마침내 '여성 연대'여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남성적 욕망의 렌즈로 투과된 여성의 취약한 현실은 매우 반여성적인 서사로 거듭나왔다. 이제 여성은 알고 있다. 질시, 가식, 모함 등의 여성적 편견에 물대는 서사가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프레임을 만들어 여성이 공감하고 가세하게 해 왔다는 것을.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닮았다는 이유로, 여성의 증오는 너무 쉽게 여성을 겨눠왔"(315)지 않은가.

덧붙이는 글 | 개인 블로그 게시


다 된 만화에 페미니즘 끼얹기 - 여성 서사 웹툰 읽기

탱알 (지은이), 산디(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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