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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례1. 피해자의 외도를 의심한 가해자가 집안에 폐쇄회로(CC)TV를 설치하고 피해자의 목걸이에 추적장치를 달아 감시했다. 

#사례2. 피해자가 가정폭력 피해자 보호시설(쉼터) 근처에서 사용한 카드 사용내역을 보고 가해자가 쉼터로 들이닥쳤다. 한밤중 경찰이 출동하고 피해자가 다른 쉼터로 피신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사례3. 가정폭력 피해자가 피신하자 가해자가 피해자의 포털사이트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이용해 택배 서비스의 최근 배송지를 조회, 피해자를 추적했다. 피해자는 결국 가해자에게 살해당했다.

#사례4.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을 통해 비공개 전학을 한 가정폭력 피해 자녀의 학교에 가해자가 찾아왔다. 가해자의 연말정산자료에 피해 아동이 사용한 스쿨뱅킹(학교에 내는 각종 납부금을 학부모 계좌에서 학교 수납계좌로 자동이체되도록 만든 시스템) 정보가 그대로 드러나 피해 아동이 다니는 학교가 노출된 것이다. 

#사례5. 행복e음(복지서비스를 받은 이력을 개인별·가구별로 관리하고, 복지대상자 선정을 위한 소득·자산 조사를 담당하는 행정폐쇄방)의 자산 조사로 인해 보험사가 쉼터 소재지의 구청이 피해자의 개인정보 조회를 했다는 알림을 가해자에게 전달하면서 피해자가 머무는 쉼터 위치가 노출됐다.

위 사례들은 국내에서 실제로 일어난 가정폭력 사건들이다. 해당 사례들에서 알 수 있듯이 휴대폰과 전자장비의 대중화·소형화, 다양한 소셜 네트워크 플랫폼 등 정보통신기술(ICT)의 발달로 ICT를 이용한 가정폭력이 더욱 공세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ICT 매개 가정폭력은 신체에 대한 직접적 폭력 행사는 아니지만 시공간을 넘어선 '감시'와 '폭력'으로 피해자가 느끼는 무력감과 모욕감, 좌절감, 고립감 등은 매우 심각한 수준이다. 이에 대한 입법과 정책이 선제적으로 마련되고 수사·사법기관의 대응도 긴급한 실정이지만 관련기관 종사자의 인식은 현실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전문가 의견이 나왔다. 

정보통신발달, 피해자의 안전 거리 빼앗아
  
지난 20일 서울 중구 LW컨벤션에서 '물리적 공간을 넘어선 정보통신기술(ICT) 매개 가정폭력' 정책토론회가 열렸다.
 지난 20일 서울 중구 LW컨벤션에서 "물리적 공간을 넘어선 정보통신기술(ICT) 매개 가정폭력" 정책토론회가 열렸다.
ⓒ 신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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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일 서울 중구 LW컨벤션에서 여성가족부가 후원하고 한국여성인권진흥원이 주최한 '물리적 공간을 넘어선 정보통신기술(ICT) 매개 가정폭력' 정책토론회가 열렸다.

주제발표자로 참석한 김성이 시민건강연구소 상임연구원은 "전자통신장비가 대중화되면서 가정폭력 가해자의 피해자에 대한 통제력을 높이고 피해자는 어느 곳으로도 피할 수 없는 '안전 거리'를 빼앗기는 상황은 더욱 빈발할 것으로 예상됨에 따라 이에 대한 대책도 긴요해졌다"고 말했다. 

최선혜 한국여성의전화 여성인권상담소 소장은 "경찰에 신고하면 피해자가 요구받는 것은 '네가 조심했어야지'라는 스스로 조심하란 메시지"라며 "여타 젠더 폭력 사건과 마찬가지로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경향이 있다. 기술 발달이 피해자에게 어디까지 조심을 요구해야 하는지 고민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최 소장은 "가해자의 위치 추적을 막기 위해 관계 기관에 가해자의 피해자 주민등록 열람 제한 신청을 간소하게 해달라고 요청하면 '가해자의 민원이 너무 많다, 누가 가해자고 누가 피해자인지 우리가 어떻게 구분하는가'라는 답변이 돌아오곤 한다. 이것이 한국사회에서 가정폭력을 바라보는 인식"이라며 "가해자는 '같은 가족인데 내가 불편하다'고 민원을 제기한다. (관계기관이) 피해자의 생존권과 가해자의 권리를 같은 수위에 두는 것이 문제"라고 제기했다. 

여전히 가해자 위주서 생각... 검경에 개입 의지박약

마찬가지로 이날 발표자와 토론자들 사이에서 가정폭력 사건에서 수사기관이 적극적으로 개입해 뭔가 하려는 의지를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문제 제기가 많이 나왔다.

이에 대해 추지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구체적 위해가 발생하지 않았다거나 가해자가 특정되지 않았다는 등의 이유로 사건 접수를 거부하는 관행이 있다"면서 "통신비밀보호법 제3조, 형사소송법 195조, 196조 등을 적용하면 수사기관이 새로운 법이 없어도 기존 법으로도 적극적으로 일을 할 수 있다"고 밝혔다.

추지현 교수에 따르면 현행 가정폭력처벌법이 규정하는 긴급·임시 조치로서 가해자의 접근금지, 전기통신을 이용한 접근금지 제도를 활용할 수 있다. 또 법원은 '피해자보호명령'을 결정할 수 있다. 검경은 피해자에게 '폭력이 발생해야 수사 개시를 할 수 있다'고 안내하는 대신 이러한 제도가 있고 활용이 가능하다고 알려야 한다는 것이다. 

허민숙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은 "수사기관은 왜 수사해야 하는지 당위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면서 "디지털 폭력이라고 하면 흔히 신체 폭력보다 덜 괴롭히는 거로 생각하는데, 호주 연구에 따르면 파트너에 의해 살해된 희생자의 절반가량이 신체 폭력을 안 당했다. 완전히 장악하면 신체적 폭력을 쓸 필요가 없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김성이 연구원은 "학대적 관계에서 제일 위험한 순간은 피해자가 그 관계를 떠나려 할 때라고 알려졌지만, ICT의 도입은 가해자와 피해자를 쉽게 연결시켜서 피해자를 더욱 위험해지게 만들 뿐 아니라 가해자를 떠나려는 여성을 주저하게 만든다"면서 "ICT의 발달은 또한 모바일폰, 각종 디지털 장비(카메라, 녹화·녹음기, 웹캠 등), 컴퓨터를 가진 사람이면 누구나 폭력과 포르노 그래픽 한 개인적 이미지의 생산자와 배포자가 될 수 있게 만들었다"고 밝혔다. 

김 연구원은 해외 사례를 인용해 가해자들의 공격 방식을 4가지로 범주화했다. ▲소유권-기반 접근(디지털 컨트롤 접근, 물리적으로 기기 파괴, 소유 계정을 이용한 피해자 위치 추적·모니터링) ▲계정·기기에 대한 접근(피해자에게 비밀번호를 밝히라고 강요, 스파이웨어 설치, 피해자의 앱 사용 모니터링, 비밀번호를 몰래 바꿔서 사용 중지, 피해자인 척하고 피해자의 계정을 이용해 괴롭히기) ▲해로운 메시지나 게시물 올리기(익명의 계정에서 피해자에게 전화·문서·메시지 보내기, 피해자를 모욕주거나 해롭게 하는 내용 업로드) ▲개인정보 노출하기(피해자에 대한 사적인 정보 포스팅, 보복성 포르노 게시, 피해자가 성매매한다는 가짜 광고 작성) 등이 그것이다. 

김 연구원의 이날 발표에 따르면 ICT는 '양날의 칼'로서 여성 대상 폭력을 촉진하는 데도 쓰일 수 있지만, 여성에 대한 폭력을 멈추게 하는 데도 쓰일 수 있다. 지난 2006년부터 시작된 'Take Back the Tech'(기술을 되찾다) 캠페인은 모든 여성이 ICT 기술에 대한 통제권을 갖고 여성에 대한 폭력에 반대하는 활동에 전략적으로 ICT 플랫폼을 이용하자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2개의 심(SIM)카드 사용, 채팅 내용 보관하기, 유튜브에 여성에 대한 부당한 사회문화적 폭력을 가시적으로 드러내기, 좀처럼 듣기 어려운 피해 여성의 목소리와 이미지를 시민의 공간에 데려오는 참여적 비디오 생산, 글로벌 네트워크와 기구 동원하기 등의 실천 사례가 있다. 

최선혜 소장은 "모든 것이 통제되는 감옥에 있는 것처럼 피해자의 일상을 극도로 통제하는 방식으로 가정폭력 문제를 해결하려는 경향이 있다"면서 "예전엔 가정폭력 가해자가 신문에 실종 광고를 냈는데 요즘은 컴퓨터에 프로그램을 까는 등 엄청난 정보기술을 이용해 감시한다. 가해자가 협박했을 때 '벗어날 수가 없구나'라고 느끼며 다시 귀가하거나 폭력 상황에 머무는 심각한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 의식 전환을 통해 적극적으로 피해자 권리를 보호하는 방향으로 법과 제도가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혜진 더라이트하우스 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는 "21년 전에 만들어진 가정폭력처벌법은 '가정 회복' 취지에서 입법됐고, 가해자 '처벌'과 피해자 '보호'에 방점을 찍진 않았던 것 같다"면서 "일반 폭행 사건이 일어나면 폭행죄·상해죄로 처벌하면 되는데 해당 법으로 형사 절차가 시작되면 가정 내에 일어난 일이라면서 오히려 행위자를 처벌하지 않고 면죄부를 주는 상황이 발생한다. 이는 가해자로 하여금 다음에 또 해도 감형이 충분히 된다는 학습효과를 줘서 근절이 안 되고, 점점 빈도와 강도가 심해지다가 결국엔 중대 범죄로 이어진다"고 설명했다.  

서혜진 변호사에 따르면 가해자는 상담 조건부 기소유예를 받을 수 있고 피해자가 고소 취하를 하고 '처벌 불원' 의사표시를 하면 가정보호사건으로 전환된다. 이로 인해 가정폭력 사건은 일반 형사사건보다 처벌이 매우 경미하게 되는 경우가 빈발한다. 특히 현행법에선 검사가 임의로 판단해 가정보호사건으로 처리할 수 있는 규정이 있는데, 이러한 규정들을 포함해 현행법을 시대에 맞게 개정할 필요성을 제안했다. 서 변호사는 "시간이 지나면서 피해자가 처벌 불원 의사를 수사기관에 밝히는 경우가 매우 많은데 수사기관은 이것이 피해자의 진정한 의사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추지현 교수는 "피해자가 죽어서 가해자가 살인자가 된 경우에나 법이 적용된다"면서 "전자장치 부착 같은 경우엔 과도한 인권침해 논란이 있지만 구금 대신 이행하는 더 약한 수단이다. 피해자한테 스마트워치를 줄 게 아니라 가해자를 어떻게 관리·관찰할 것인지, 처벌과 제재의 확실성 담보, 국가의 예방기능 강화, 피해자 보호 지원 쪽으로 법무부가 정책을 수립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태그:#가정폭력, #정보통신기술, #여성인권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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