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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5학년 때 러시아에서 세 달 간 산 적이 있다. 우리 가족은 충실한 가톨릭 신자였으며, 그곳에서도 어김없이 러시아 성당에 나갔다. 성당 신부님은 영어가 되시는 폴란드 분이셨는데, 나에게 이렇게 물으셨다.

"어디에서 왔니?"
"한국이요."
"남쪽이야, 북쪽이야?"


어려운 질문이 아니었는데도 나는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그러다가 급히 남쪽이라고 대답했고, 신부님은 고개를 끄덕이시며 미소를 지어보이셨다. 'Korea(코리아)'라는 단어 속에는 북한이 자리 잡고 있었고, 우리나라가 분단국가라는 사실이 담겨 있었다. 신부님의 고개 끄덕임과 미소가 담고 있는 의미가 무엇일까, 나는 잠시 생각해보았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성당에서 실시하는 북한 이탈 주민 1박 2일 가정 체험을 하게 되었다. 우리 집에 오신 분은 일흔을 넘긴 할머니셨다. 북한에서 탈출해 라오스로, 라오스에서 베트남의 메콩 강을 건너 태국까지, 그리고 태국의 난민 수용소에서 6개월 간 생활하다 우리나라에 오게 되었다고 하셨다. 메콩 강을 건너다가 악어에게 물려 팔과 다리를 잃거나, 목숨을 잃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할머니는 우리 집에 오시기 전에 엄마에게 부탁해서 마트에 들르셨다. 그리고 남의 집에 갈 때 빈손으로 갈 수 없다며 만원어치 사과를 쥐어주셨다. 1박 2일 동안 식사를 할 때, 이가 없으신 할머니를 배려해 엄마는 주로 물렁한 음식을 만들어 드렸다.

그 날 저녁 엄마가 해드린 명란 계란찜 앞에서 할머니는 눈물을 흘리셨다. 북한에 두고 온 아들이 생각나서였다. 끝끝내 할머니는 제대로 식사를 하지 못하셨다.
저녁을 드시고 나서 할머니께 어렸을 때 배운 가야금 연주를 해드렸다. 할머니는 한국에서 가야금 연주를 들을 수 있어서 좋다며, 아리랑, 도라지 같은 노래는 같이 따라 부르셨다. 어이없게도 그 순간, '우리가 한 민족은 한 민족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잠자리에 들기 전 할머니는 하루 일과는 수첩에 꼼꼼히 적으셨다. 엄마가 뭘 적으시냐고 묻자 할머니는 "일 없습니다."라고 하셨다. '일 없다'며 보여주신 수첩에는 내가 가야금 연주를 해드린 것, 또 저녁 식사는 뭘 먹었는지, 이 밖에도 많은 일들이 적혀 있었다.

말끝마다 "일 없습니다." "일 없습니다." 하시는 할머니의 대답이 재미있어 우리도 따라 하며 웃었다. 다음 날 헤어질 때 할머니는 줄 게 이것밖에 없다며 내 손에 2000원을 쥐어주셨다. 나는 2000원에 담긴 할머니의 마음을 감사히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듬해 엄마는 또 가정 체험을 신청하셨고, 이번에는 40대 후반의 아주머니가 오셨다. 북한에서 결혼 해 아이를 낳고 잘 살고 있던 어느 날, 낯선 사람이 중국에서 일을 하면 돈을 많이 벌어 돌아올 수 있다는 말에 가족을 떠나 중국으로 갔지만, 그 길로 인신매매를 당하고 말았다.

장애를 가진 중국 남성에게 팔려가 강제로 결혼을 하게 되었고, 아이까지 낳게 되었다. 도망치다 잡혀오는 바람에 감시도 심해졌고, 북한으로 돌아가면 사형을 당할 거라는 협박을 받으며 하루하루를 살았다고 한다. 그러다 간신히 도망쳐 우리나라로 오게 된 것이다.

북한에는 먹고 살기 힘들어 스스로 중국으로 팔려가는 여성들이 많다고 한다. 그러나 신문이나 뉴스에서 남한의 삶이 힘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을 들을 때면 마음이 무겁다. 죽음을 각오하고 탈출을 한 사람들이 생명을 끊기까지, 그들은 어떠한 삶을 살았을까.

장님 코끼리 만지기라는 말이 있다. 코끼리의 꼬리를 만져본 장님은 코끼리가 굵은 밧줄이라고 했고, 다리를 만져본 장님은 코끼리를 기둥이라고 했다. 또 몸통을 만져본 장님은 코끼리를 단단한 벽이라고 말했고, 이빨은 만져본 장님은 코끼리가 창이라고 우겼다.

북한은 내게 코끼리였다. 코끼리의 전체 모습을 알지 못한 채 내가 아는 것이 코끼리의 전부인 양 목소리를 높였다. 심지어 다른 말을 하는 사람에게 내 말이 맞다며 우기기도 했다. 북한이 한 민족이라는 '연대'를 갖기보다 그들의 말에 분노하며 북한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키워 나갔다. 북한은 가난하다, 북한 사람들은 성격이 나쁘다··· 하지만 이것은 내 시야에서만 그들을 바라보다 생긴 어리석은 판단이었다. 우리 집에 오신 할머니와 아줌마를 통해 북한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우리집은 매일 저녁 9시만 되면 가족들이 한 자리에 모여 기도를 드린다. 우리 지역 성당에서 약속한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이다. 독일이 분단되었을 때, 동독의 라이프치히 기도회에서는 매일 특정 시간이 되면 독일의 통일을 위한 기도를 드리자는 약속을 했다. 그 약속은 독일 통일의 불씨가 되었다.

우리 성당 역시 독일의 통일 기도를 따라 남북의 통일을 바라는 마음으로 기도를 시작했다. 벌써 2년이 넘은 것 같다. 우리는 매일 저녁 9시가 되면 일을 하다가도, 밥을 먹다가도 잠시 멈추어 한반도에 평화가 찾아오기를 기도드린다. 우리의 기도에는 통일의 염원이 담겨 있다. 종교를 떠나 통일을 바라고 기도하는 사람이 많아진다면, 그러한 우리의 염원이 통일을 가져올 것이다. 이것 역시 작은 노력이라고 말 할 수 있다.

너무 오랫동안 굶어 뼈만 남은 아이가 길바닥에서 무언가를 주워 먹고 있다. 초등 3학년 수업시간에 낸 문제에서는 그와 나 자신을 비교해보고, 내 삶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설명해 보라고 한다. 열 살짜리 아이는 이렇게 답했다.

"남의 아픔을 보고 내가 얼마나 행복한지 아는 것은 별로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누군가의 아픔을 공감하는 마음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열 살짜리 아이에게서 배운다. 남의 기쁨에 함께 기뻐하고, 남의 슬픔에 함께 슬퍼하는 것은 중요하다. 가장 가까운 우리 형제인 북한을, 우리는 그동안 얼마나 두꺼운 색안경을 낀 채 바라보았을까. 편견이란 것은 북한을 나쁘게만 보게 만들었다.

지금 당장 통일이 한 번에 이루어질 수는 없다. 통일로 가는 길은 멀고도 어렵다. 우리는 북한을 제대로 알아야 하며, 서로를 알고 소통해 나갈 때 비로소 통일에 한 발짝 가까워지기 시작할 것이다.

송민(파주 교하고등학교 2학년)

태그:#통일글짓기, #송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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