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가정을 해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지만 만약 초반부터 일본과의 전력 차이를 느끼며 완패를 당했다면 이렇게 미련이 남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은 1회 김하성(키움 히어로즈)과 김현수(LG 트윈스)의 홈런으로 3점을 선취했고 마운드에는 리그 평균자책점 1위(2.29) 양현종(KIA타이거즈)이 있었다. 17일에 있었던 프리미어12 결승전 역전패의 아쉬움이 여전히 야구팬들의 뇌리에 여전히 크게 남아 있는 이유다.

하지만 한국은 이번 프리미어12를 통해 얻은 것도 적지 않다. 특히 때로는 2,3번으로, 때로는 테이블 세터로 활약한 '영웅 듀오' 이정후(키움)와 김하성은 이번 대회 19안타1홈런10타점12득점을 합작하며 단숨에 한국야구의 미래로 떠올랐다. 이번 대회 대표팀의 주장을 맡은 김현수 역시 타율 .348(23타수8안타)1홈런 6타점 5득점으로 변함없이 '국제용'의 위용을 과시했다.

마운드에서는 한국의 좌완 원투펀치 양현종과 김광현(SK와이번스)이 각각 일본전과 대만전에서 무너지며 아쉬움을 남겼지만 불펜 투수들의 호투로 올림픽 본선 티켓을 따냈다. 특히 한국 마운드의 고질적인 약점으로 꼽히던 우완 에이스 후보를 발굴한 것은 이번 대회의 큰 소득이었다. 이번 대회는 불펜 투수로 활약했지만 향후 선발 투수로도 활약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인 두산 베어스의 우완 영건 이영하가 그 주인공이다.

윤석민 이후 끊어진 한국 야구의 우완 에이스 계보

한국 야구 대표팀의 오랜 고민은 바로 우완 에이스의 부재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통해 류현진과 김광현이라는 강력한 좌완 원투펀치가 탄생한 한국은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 양현종까지 가세하면서 언제나 좌완 투수들이 대표팀 마운드의 중심 역할을 맡아 왔다(2015년 프리미어12에서는 차우찬이라는 또 다른 좌완 투수가 맹활약했다). 

대표팀의 마지막(?) 우완 에이스는 지금은 비운의 투수가 된 KIA의 윤석민이다. 윤석민은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대체 선수로 합류해 5경기에서 2승 1세이브 평균자책점 2.35로 호투하며 한국의 퍼펙트 금메달에 크게 기여, 류현진, 김광현과 함께 한국 마운드의 3대장으로 떠올랐다. 2009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에서는 4강 베네수엘라전에서 6.1이닝 2실점을 기록하는 등 2승1.23의 호성적으로 한국의 '우완 에이스'로 명성을 떨쳤다.

광저우 아시안게임까지 한국의 우완 에이스로 활약하던 윤석민은 2013년 WBC에서 1패4.15로 부진한 후 해외진출 등으로 대표팀에서 자취를 감췄다. 류중일 감독(LG)이 지휘했던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에서는 전략적으로 우완 선발 요원을 거의 선발하지 않았다. 실제로 인천 아시안게임에서 선발 등판했던 우완 정통파 투수는 아마추어 선수였던 홍콩전의 홍성무(NC 다이노스)가 유일했다.

2015년 초대 프리미어12 대표팀을 이끌게 된 김인식 감독은 우완 선발투수의 필요성을 깨달았다. 하지만 2015 시즌 3점대 평균자책점과 두 자리 승수를 동시에 기록한 우완 정통파 투수는 윤성환(삼성 라이온즈)한 명 뿐이었다. 그나마 윤성환도 한국시리즈를 앞두고 원정도박 의혹에 연루되면서 대표팀 엔트리에서 제외됐다. 결국 한국은 일본과의 4강에서 지바 롯데 마린스에서 활약하던 이대은(kt)을 일본의 '괴물' 오타니 쇼헤이(LA에인절스)와 맞대결시켰다.

2017년 WBC에서도 우완 투수가 부족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한국은 우완 선발 요원으로 다시 한 번 이대은을 선발했지만 본선 1라운드 3경기에 등판한 투수는 좌완 양현종과 장원준(두산), 그리고 잠수함 투수 우규민(삼성)이었다. 당시 대표팀에서 제 몫을 해준 우완 투수는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하던 오승환(삼성, 3.1이닝 무실점)이 유일했고 선발 요원으로 뽑았던 이대은은 단 한 경기에도 등판하지 못했다.

좌완 원투펀치 이을 한국야구의 차세대 우완 에이스 1순위 후보

전임 선동열 감독의 갑작스런 사퇴로 우여곡절 끝에 대표팀 사령탑이 된 김경문 감독 역시 제2회 프리미어12를 앞두고 우완투수에 대한 고민이 깊었다. 다행히 올해는 지난 몇 년간 KBO리그를 강타했던 타고투저 현상이 많이 약해지면서 3점대 이하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한 10승 우완 투수가 4명(이영하, 문승원, 최원태, 배재성)이나 됐다. 하지만 김경문 감독의 최종 선택을 받은 투수는 이영하 한 명 뿐이었다.

2016년 두산의 1차 지명을 받은 이영하는 프로 입단과 동시에 팔꿈치 인대접합수술을 받으며 루키 시즌을 통째로 날렸지만 2017년 복귀해 꾸준한 성장으로 두산의 우완 에이스로 자리 잡았다. 작년 시즌 선발과 불펜을 오가며 처음으로 두 자리 승수를 챙겼던 이영하는 풀타임 선발 투수로 활약한 올해 다승 공동 2위에 해당하는 17승을 따내며 두산의 토종 에이스로 급부상했다.

이영하는 정규리그에서 163.1이닝을 투구했을 만큼 준수한 이닝 소화력을 자랑하는 선발 투수지만 김경문 감독의 '이영하 활용법'에 대한 구상은 조금 달랐다. 한국 선발진이 여전히 좌완 투수 위주로 구성된 만큼 구위가 좋고 멀티 이닝을 소화할 수 있는 이영하에게 경기 중반을 책임지는 허리 역할을 맡긴 것이다. 성인 대표팀을 처음 경험하는 23세의 어린 투수가 감당하기엔 결코 쉽지 않은 보직이었다.

하지만 이영하는 이번 대회 대표팀 투수들 중 가장 많은 5경기에 등판해 8.1이닝 동안 단 1점만 내주는 호투로 한국 마운드의 허리 역할을 완벽히 해냈다. 조별리그 1위를 확정한 지난 8일 쿠바전 승리투수가 된 이영하는 이번 대회 1승 1.08의 성적으로 무실점을 기록한 차우찬, 하재훈(SK) 다음으로 좋은 성적을 기록했다. 특히 일본과의 결승에서는 4회 양현종을 구원해 2.2이닝을 1피안타1사사구 무실점으로 막아냈다.

한국 야구의 독보적인 에이스 류현진은 이제 국제대회에 부르기엔 너무 '거물'이 됐고 지난 10년 동안 한국 야구를 이끌었던 좌완 원투펀치 김광현과 양현종도 어느덧 30대의 베테랑 투수가 됐다. 비록 이번 대회에서는 불펜으로 활약했지만 이영하는 선발에 훨씬 익숙한 투수다. 이번 대회 한국 불펜의 '믿을맨'으로 활약한 이영하가 조만간 한국 야구의 에이스로 활약할 날도 그리 멀지 않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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