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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9일, 문재인 정부가 임기 반환점을 돌았습니다. 공정 사회를 향한 국민들의 열망 속에 탄생한 '촛불 정부'가 남은 임기 동안 어떤 개혁을 완수해야 할지 여러 의견을 소개합니다. '반환점 돈 문재인 정부에 바란다' 기획은 모든 시민기자가 참여할 수 있습니다.[편집자말]
얼마 전 한 10대 성소수자의 고민을 들을 일이 있었다. 대학 입학을 앞두고 그 사람은 부모님께 커밍아웃을 하고 싶어 했다. 성소수자 커뮤니티에서 지내다보면 여러 고민을 듣게 되지만 이런 경우가 가장 난감하다. 뚜렷한 답을 주기도 섣부른 독려를 건네기도 어렵다. 자칫 상대방을 위험에 처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커밍아웃을 했는데 그 사람의 부모님이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가족 안에서의 위치가 불안정해지거나 최악의 경우 폭언 혹은 폭력, 전환치료에 대한 요구를 마주할 수도 있다. 집을 떠나 대학을 다닌다고 한들 커밍아웃을 빌미로 경제적 지원이 끊길 수도 있다. 한마디로 지금의 삶과 미래가 한순간에 무너질 수도 있다는 뜻이다.

고민을 함께 듣던 지인과 나는 '최악의 경우를 생각해라'는 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야 극단적인 순간에 나를 보호할 대비책을 세우고 심리적 상처를 덜 받게 된다. 그리고 다소 냉정하지만 이 과정은 '지금 내가 커밍아웃을 해도 괜찮은지' 조건을 따져보는 일이기도 하다. 가령 나는 취직을 하고 부모님으로부터 경제적으로 완전하게 독립한 이후에 커밍아웃을 시도했다. 나는 가족들을 정말 사랑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때가 내가 부모님으로부터 가장 '안전'할 수 있는 시기였다. 나는 내가 현실적인 판단을 내렸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믿었다.

불평등은 곧 삶의 문제
 
문재인 대통령이 14일 오후 청와대에서 열린 주한 신임 대사 신임장 제정식에 참석해 있다.
▲ 문 대통령 "굳은 표정" 문재인 대통령이 14일 오후 청와대에서 열린 주한 신임 대사 신임장 제정식에 참석해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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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어느 순간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현실적인 판단에서 그 '현실'이란 대체 무엇인가. 도대체 이 사회에서 성소수자란 무엇이기에 존재를 드러내는 것만으로 가장 친밀했던 사람을 위협적으로 느껴야할까. 그저 자기 자신의 모습대로 사는 것에서도 남들보다 더 열심히 더 많은 자원을 확보해야 할까.

이런 상황은 비단 커밍아웃에서만 그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내가 아는 커플은 함께 사는 집을 구하는데 동년배 친구들보다 훨씬 많은 애를 먹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은 동성커플이고 서로를 얼마나 깊게 사랑한다 해도 부부관계를 인정받는 게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성애 커플이 결혼을 하고 신혼부부가 되어 전세자금대출 지원을 신청하거나 공공임대주택을 알아보는 동안 내 친구는 그런 일을 할 수 없었다. 할 수 있는 일이란 은행을 돌며 자신이 받을 수 있는 대출이 얼마정도인지를 알아보는 것 뿐이었다.

즉, 불평등은 결국 삶의 문제로 연결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같은 기회와 미래도 누군가는 더 많은 노력과 희생을 통해 얻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성소수자의 경우 자력구제로도 해결할 수 없는 불안정성이 생의 주기 곳곳에 존재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청소년 성소수자들이 학교에서 소외되거나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는 상황은 교육의 불평등 문제로 이어지고, 특히나 한국에서 이는 노동과 사회참여에서의 어려움로 연결될 가능성이 높다.

또한 겨우 독립의 여건을 마련한다고 해도 성소수자에게 비친화적이거나 혐오가 만연한 직장문화는 또 다시 성소수자 개인의 가능성을 가로 막거나 아예 일을 얻지 못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즉, 끊임없이 대비하고, 숨기고, 노력하고, 그래서 포기하는 것이 많은 삶을 계속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이게 박해와 차별 아니면 무엇인가

사실 이 글의 목적은 한국 사회에서 성소수자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려주는 것이 아니다. 애초에 나는 문재인 정부가 출범 이후 반환점을 도는 시점에서 지금까지의 행보를 성소수자의 입장에서 판단하기 위해 글을 적기 시작했다. 하지만 불가능했다. 그러기엔 이 정부가 일은 커녕 입바른 소리라도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대선후보 시절부터 문재인 대통령은 그 전 대선에서는 공약으로 내걸었던 차별금지법 제정 추진을 쏙 빼버리고 대신 보수 개신교계 인사를 만났다. 정부 출범 이후에도 100대 국정과제에서는 역시나 사회적 논란을 이유로 차별금지법 제정이 빠져있었다. 심지어 지난해(2018년) 국무회의에서 통과된 제3차 국가인권정책 기본계획의 '사회적 약자' 분류에는 그 전 정부에서도 포함되어 있던 '성소수자' 항목이 아예 사라지기도 했다.

또한 같은 해 정부는 유엔인권이사회가 전달한 권고 중 성소수자와 관련한 권고는 그 무엇도 채택하지 않았다. 이 권고들에는 육군 내 동성애자 병사 색출 사건으로 문제가 되었던 군형법 92조의6 폐지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 지난 9월 제 5·6차 유엔아동권리협약 이행 본심의에서 교육부는 성교육에 성소수자에 대한 내용을 포함시킬 계획이 없다고 답하기도 했다. 간단히 요약한 것만으로도 이 정도다.

한편으로 최근 청와대에서 열린 주한 외교사절단 초청 만찬 행사에 커밍아웃한 동성애자인 필립 터너 뉴질랜드 대사가 자신의 남편과 함께 참석하고 대통령과 접견을 한 일이 있었다. 그리고 이를 의식한 듯 종교 지도자들과의 오찬에서 '성소수자 인권법'에 대한 문제제기가 나오자 문재인 대통령은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동성혼에 대해서는 국민적 합의가 우선돼야 한다. 다만 성소수자의 인권 문제에 있어서는 사회적으로 박해받거나 차별받아서는 안 될 것."
 
문재인 대통령이 10월 18일 오후 청와대 녹지원에서 열린 주한외교단 초청 리셉션에서 필립 터너 주한뉴질랜드 대사(왼쪽에서 두 번째) 내외와 인사하고 있다. 필립 터너 대사는 동성부부다.
▲ 문 대통령과 주한뉴질랜드 대사 문재인 대통령이 10월 18일 오후 청와대 녹지원에서 열린 주한외교단 초청 리셉션에서 필립 터너 주한뉴질랜드 대사(왼쪽에서 두 번째) 내외와 인사하고 있다. 필립 터너 대사는 동성부부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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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가장 필요한 일은 현실을 인정하는 것

의아한 말이다. 혼인을 포함하여 다양한 분야에서 평등한 권리를 가지지 못하고, 제도에서 노골적으로 배제되며, 특정 사회적 집단에 대한 혐오와 멸시가 아무렇지 않게 방치되는 것이야말로 '박해'와 '차별' 아닌가? 이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결론은 두 가지다. 자가당착임을 알면서도 기만을 했거나 혹은 상황 파악을 제대로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대통령을 비롯하여 정부가 국민을 기만했다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따라서 국민들 중 한 사람이자 성소수자로서 나는 문재인 정부를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앞서 언급했듯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요구를 하고 싶다. 정부는 지금이라도 한국에서 성소수자들이 어떤 차별과 혐오를 겪고 있으며 이로 인해 어떤 결과가 발생하는지 제대로 알 필요가 있다. 아니 알고자하는 태도라도 보여야만 한다. 그 이후에야 정부는 성소수자의 인권이 '합의'의 대상이 아니라 '원칙'의 문제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또한 흘러간 시간은 돌아오지 않는다는 당연한 사실도 다시 한 번 유념해주길 바란다. 이 말은 성소수자 개인들이 불평등 속에서 감내한 희생과 포기했던 가능성들이 복구되지 않은 채, 그들 각자의 삶이 그저 지나가버릴 수 있음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성소수자의 인권은 원칙적이며 또한 시급한 문제이기도 하다. 더 이상의 '나중에'는 없어야 한다.

태그:#성소수자, #인권, #문재인, #문재인 정부, #평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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