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1980년 5월24일 당시 금남로 상공에 헬기가 날아다니고 있다.<5·18기념재단 제공>
 1980년 5월24일 당시 금남로 상공에 헬기가 날아다니고 있다.<5·18기념재단 제공>
ⓒ 광주드림

관련사진보기


5월 27일 새벽, 광주는 전쟁터였다.

탱크와 장갑차가 지각을 누비고 공중에는 군 헬기가 저공으로 순회하며 위협하고 있었다. 시민들이 그토록 기대했던 미군은 살인마들의 편에 섰다. 광주는 피로 물들였다. 여기저기서 비명 소리가 신새벽 하늘에 메아리쳤다.

"지금 계엄군이 공격해오고 있다"는 여린 여성의 호소에 잠이 깬 시민들이 도청으로 뛰어오다가 100여 명이 사살되고 더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었다. 길거리에는 시체가 나뒹굴었다. 생지옥이었다. 명이 끊어지지 않아 꿈틀대면 확인사살까지 저질렀다.
 
 1980년 5·18민중항쟁 당시 모습이 담긴 5·18 미공개 영상 중 일부. 계엄군의 무차별 진압으로 희생된 가족을 보내며 오열하는 시민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1980년 5·18민중항쟁 당시 모습이 담긴 5·18 미공개 영상 중 일부. 계엄군의 무차별 진압으로 희생된 가족을 보내며 오열하는 시민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 광주드림

관련사진보기

 
도청 및 YWCA, YMCA 등지에서 체포된 생존자들은 일단 상무대 전투병과 교육사령부 건공단으로 끌려가 계엄군들에게 10파운드 곡괭이자루로 초죽음이 되도록 두들겨 맞았다.

한편, 이날(27일) 계엄군은 시내전역의 가택을 샅샅이 수색하여 수백 명의 청년들을 끌고 갔으며, 여관이나 여인숙에서 잠을 자고 있거나 길거리를 통행하고 있던 젊은이는 무조건 시청, 아모레화장품, 관광호텔 등지로 끌려가 무자비한 고문과 구타 속에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다.

그중 끈질기게 살아남은 사람들도 27일 밤 8시경 모두 헌병대로 이송되었다. 이후, 계엄군은 골목골목마다 삼엄한 경비를 펼치고 시민들이 일체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심지어 창으로 내다보는 것조차 금했다. 창밖을 내다보다가 죽은 사람만도 수명에 이르렀다. 그리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검거선풍이 몰아닥쳤다. (주석 22)


통절한 양심으로 행동했던 많은 사람이 상하고 죽었다. 시민들을 살육한 계엄군의 작전명은 '상무충정작전', 국민과 국가에 충성하고 정의의 군대가 되라는 '충정(忠正)'의 의미가 흉물스런 벌레(蟲)들의 놀음으로 변한 것이다.
 
 5·18민중항쟁의 진상규명조사위원회 제때 출범이 물건너 간데다, 자유한국당이 추천 위원 수 확대를 주장하면서 진상규명의 실질적 활동이 위축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사진은 1980년 광주항쟁 당시 가족을 잃은 유족의 모습이 담긴 5·18미공개 영상의 한 장면.
 5·18민중항쟁의 진상규명조사위원회 제때 출범이 물건너 간데다, 자유한국당이 추천 위원 수 확대를 주장하면서 진상규명의 실질적 활동이 위축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사진은 1980년 광주항쟁 당시 가족을 잃은 유족의 모습이 담긴 5·18미공개 영상의 한 장면.
ⓒ 광주드림

관련사진보기

 
공수부대 특공조는 도청으로 오는 시민들에게 총기를 난사하고 시민이 있는 건물에는 수류탄을 마구 터뜨렸다. 유대인 학살에 동원된 나치군대와 다르지 않은, 야만의 극치였다. 나치 병사들이 유대인들을 고문하면서 바그너의 가곡을 들었다고 한다.

무수한 시민군들이 공수대원들과의 사격 대치중에 죽어갔다. 곧 총알이 떨어진 시민군들은 투항하면 살려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항복할 마음을 먹었다. 시청 정문 쪽으로 필사적으로 도망가던 시민군 1명이 공수대원의 사격에 의해 즉사당한 바로 그때 8명의 시민군이 항복하겠다고 두 손을 번쩍 들고 무장을 해제한 채 도청 앞 뜰로 걸어나왔으나, 달아나던 시민군을 살해했던 계엄군은 8명의 투항자들을 전원 사살하였다. 한 계엄군 병사는 한쪽 발을 시민군 포로의 등에 올려놓고 사격하면서 "어때, 영화구경하는 것 같지"라는 농담까지 던졌다. (주석 23)

광주에 파견된 계엄군은 "1인당 40여 발의 실탄을 사용했다. 발포하지 않은 계엄군을 감안하면 1인당 50여 발 이상 발포했고, 공수부대는 100여 발 이상의 실탄을 사용한 셈이다. 이는 5월 21일 이후 계엄군이 집단 발포하고 무차별적으로 사격했음을 간접적으로 증명한다." (주석 24)

5ㆍ18항쟁기 계엄군의 실탄 사용내역을 보면, 소화기 497,962발, 권총 2,754발, 기관총 10,759발, 수류탄 194발, 40M탄 60발, 90M 무반동총 8발, 기타(신호탄 등) 889발, 통계 512,626발이었다. 소화기 실탄 및 수류탄의 80%는 특전사에서 사용하고, 무반동총은 아군(계엄군)간 오인 교전 시 사용되었다. (주석 25)


주석
22> 윤재걸, 앞의 책, 137쪽.
23> 전남사회운동협의회 편,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풀빛, 1985, 강준만, 앞의 책, 156쪽.
24> 노영기, 앞의 책, 266쪽.
25> 앞의 책, 266~267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5ㆍ18광주혈사’]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이 기자의 최신기사 수구파 정부와 홍계훈 죄 물어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