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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 진주라는 고장은 남다릅니다. 진주 남강 때문에 남다르다고 여기기도 할 테지만, 진주에는 교육대학교가 있고, 작은 도시인데도 헌책집이 무척 많았습니다. 요즈음에도 헌책집이 여럿 그대로 있어요. 작은 도시 가운데 헌책집이 그대로 살림을 잇는 고장은 드뭅니다. 

진주 '형설서점(즐겨찾기)'은 진주에 있는 그야말로 빛나는 책집이라고 여깁니다. 제가 진주라는 고장에 산다면 이틀이나 사흘마다 걸음을 하리라고 여기는 곳입니다.
 
 책꽂이
 책꽂이
ⓒ 최종규/숲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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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그마한 헌책집에 들어서기 앞서 언제나 숨을 고릅니다. 주머니를 들여다보며 살림돈이 얼마나 있는가를 살펴요. 오늘 어떤 책을 얼마나 만날는지 하나도 모릅니다만 '이 값을 넘어설 만큼 책을 쳐다보지 않기로 하자'고 다짐에 다짐을 거듭합니다.

자, 문을 엽니다. 책집지기 아재한테 꾸벅 절을 합니다. "어? 이게 누구야? 종규씨 아냐? 오랜만이네? 어쩐 일이야? 진주에 볼일이 있어서 왔나? 반갑네? 밥은 드셨소? 커피 한 잘 줄까?"

책집에 들어서자마자 책집지기가 진주말로 이모저모 물어보십니다. 저도 반가이 이모저모 이야기를 합니다. 오랜만에 찾아왔기에 책시렁부터 돌아보며 이 책 저 책 들여다볼라치면 "책은 늘 보실 텐데, 오랜만에 왔으면 이야기라도 좀 하고 책을 보시지?" 하는 핀잔도 한 마디 듣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이렇게 눈치라고는 없이 책만 바라보며 살아왔습니다.  

자그마한 헌책집이기에 더 많은 책을 건사할 수 없지만, 자그마한 헌책집이기에 더 알뜰히 책을 살펴서 건사하기 마련입니다. 커다란 책집은 더 많은 책을 더 넉넉히 둔다면, 조그마한 책집은 더 알찬 책을 더 살뜰히 두어요.

<집안에 감춰진 수수께끼>(M. 일리인/박미옥 옮김, 연구사, 1990)이며 <근원이 깊은 나무례 마을의 천년역사 1>(김상조, 경상남도사편찬위원회, 1986)이며 <모택동의 바둑 병법>(스코트 부어만/김수배 옮김, 기획출판 김데스크, 1975)이라는 책을 손에 쥡니다. 1975년 저때에 중국 모택동이 바둑을 어떻게 두느냐 하는 책까지 한국말로 옮긴 적이 있군요. 저때에 저런 책이 나올 수도 있었네요. 바둑책이었기 때문일까요.

국민학교(서울 남산국민학교, 초등학교의 전신) 교장이던 분이 미국을 한동안 돌아보고 나서 느낀 바가 있기에 <어린이를 위한 미국 여행기>(김기서, 학문사, 1957)라는 책을 썼다고 합니다. 한국에는 없지만 앞으로 한국에 이런저런 것이 생기기 바란다는 뜻으로 이 책을 썼다고 합니다. <여성, 최후의 식민지>(C.v.벨로프 외/강정숙 외 옮김, 한마당, 1987)를 손에 쥡니다.
 
 어른책 곁에는 그림책
 어른책 곁에는 그림책
ⓒ 최종규/숲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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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읽었는지 가물거리는, 가물거리니까 다시 살피자는 마음으로 <너무 순한 아이>(김경동, 심설당, 1987)를 손에 쥡니다. 이미 읽은 시집이지만 <길이 끝나는 곳에서 길은 다시 시작되고>(백창우, 신어림, 1996)를 집습니다. 노래가 된 시를, 노래가 될 시를 조용히 혀에 얹습니다. 다른 시집 <그 사이에 대해 생각할 때>(강미정, 문학의전당, 2008)하고 <취객의 꿈>(김영승, 청하, 1988)도 손에 쥡니다.
 
상차림도 없이 서서 / 싱크대 커다란 입을 들여다보며 / 밥을 먹는다, 물에 말은 한 그릇 밥 / 자정의 시간으로 날이 쏟기고 / 기다림을 쏟으며 식구들은 자고 (강미정, 지독한 냄새/21쪽)

밥하고 살림하는 아주머니란 자리에서 고스란히 옮긴 노랫가락입니다. 이 마음하고 삶을 읽을 줄 안다면, 아니 이 마음하고 삶을 우리가 나눌 수 있다면, 이 삶터는 사뭇 달라지리라 생각합니다.
 
 책집에서
 책집에서
ⓒ 최종규/숲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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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눈앞에 <만주어 음운론 연구>(성백인, 명지대학 출판부, 1981)란 책이 보입니다. 만주말을 살핀 책이 있군요. 만주라고 하는 땅은 한겨레가 살던 터전하고 맞물립니다. 북녘뿐 아니라 남녘 곳곳에도 만주말 자취가 어느 만큼 흐르지 않을까요? 반가이 맞이합니다.
 
문자 기록에만 의지해야 되는 언어사의 연구는 어느 나라 말의 연구에 있어서도 많은 어려움이 있는 것이지만 만주어의 연구는 유달리 극복하기 어려운 여건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만주어가 오늘날 사어가 되어버려서 만주어 문어를 잇는 현대어를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이다. 만약 그 정통을 잇는 현대 구어를 알고 있기만 한다면 불과 400년도 못 되는 옛날인 17세기 만주어의 연구가 이렇게 막막한 어려움을 겪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주어 음운론 연구, 2쪽)

낯익은 책 <어린이 동시짓기>(이준범, 명문당, 1978)를 바라봅니다. 이 책은 우리 아버지 책시렁에 있었기에 낯익습니다. 초등교사로 일한 우리 아버지도 이 책을 곁에 두고서 수업을 하셨는지 모릅니다. 요새는 이 책을 들출 사람이 없을 테지만 1980년대에 국민학교를 다닌 저로서는, 바로 이런 책에 나오듯 '말을 억지로 꾸미고 이쁘장하게 보이는 시늉질'을 하는 동시쓰기를 해야 했습니다. 지난날 참으로 이 책에 나온 그대로 억지스러운 거짓 동시를 잔뜩 써야만 했던 끔찍한 일이 확확 떠오릅니다.

조용히 새책집에서 자취를 감춘 <도사리와 말모이, 우리말의 모든 것>(장승욱, 하늘연못, 2010)을 만납니다. 고맙게 장만하기로 합니다. 묵은 교과서 여럿이 곁에 나란히 있습니다. 오랜 말결을 살피면서 새롭게 살릴 만한 말길을 엿보고자 이 묵은 교과서도 하나하나 고르기로 합니다.

<생물 상>(남태경, 장왕사, 1952), <국사지도>(편집부, 홍지사, 1965), <일반 과학 물상편 2>(신효선·이종서>(을유문화사, 1947), <사회교육문고 성인교육교재 16 겨레의 발자취 하 (우리 생활과 과학)>(문교부, 1962)까지 꾸러미로 챙깁니다.

그런데 이 묵은 교과서까지 챙기기로 하면서 슬몃 걱정스럽습니다. 이러다가 이달 살림돈을 모조리 책에 쏟아붓는 셈은 아닐는지?
   
 책집 한켠
 책집 한켠
ⓒ 최종규/숲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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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머니가 헐거워 장만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구경은 하자'는 쪽으로 마음을 굳힙니다. <새땅을 밟으며, 만화로 보는 농업·농민 문제>(이재웅, 도서출판 알, 1991)란 만화책을 봅니다. 대구에서 나온 '만화 학습 교재'라고 하며, 그무렵 우르과이라운드를 비롯한 농업정책을 나무라는 이야기가 가득합니다. <허웅아기>(편집부 구성·김윤식 그림, 조약돌, 1984)라는 만화책은 제주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투박하지만 멋스러운 그림결이 좋습니다.

묵은 잡지 <주간경향> 583호(1979.11.4.)에는 박정희 사진이 큼직하게 실립니다. 총에 맞아 죽고 나서 나온 잡지입니다. 죽은 대통령을 기리는 잡지에는 "농촌의 아들, 꾸밈없이 소박, 먹걸리 즐기고"라든지 "자상한 인간미 서민적 체취 물씬 풍기며 매사에 철두철미하고 언제나 솔선수범" 같은 말이 끝없이 흐릅니다.

퍽 낯부끄럽습니다. <남강다목적댐 공사지>(건설부, 1970)는 진주 남강에 세웠다는 댐하고 얽힌 자료를 그러모았습니다. 아직 댐이 서기 앞서, 한창 댐을 지을 무렵, 댐을 다 짓고 나서, 이런 얼거리로 남강 언저리 모습을 사진으로 빼곡하게 담았습니다. 건설부는 진주 남강 둘레에서 찍은 사진을 필름으로 잘 건사해 놓았을까요?
 
 옛 잡지
 옛 잡지
ⓒ 최종규/숲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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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손바닥책을 살핍니다. <바람>(김석중, 상성미술문화재단, 1982)을, <역옹패설>(이제현/남만성 옮김, 을유문화사, 1971)을, <취락지리학>(이영택, 대한교육연합회, 1972)을, <니일의 사상과 교육>(霜田靜志/김은산 옮김, 대한교육연합회, 1972)을 차근차근 고릅니다.
 
필자는 '聲也'라는 말을 발음한다는 말로풀이한다. 그래서 '낙옹비설'이라고 읽는 것이 옳다고 믿는다. 그러나 오랜 세월 동안, 또 많은 인사들이 '역옹패설'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렇다면 그것 또한 우연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역옹패설, 6쪽)

우리한테는 한국말이 있습니다만, 조선 무렵에 훈민정음이 나왔습니다만, 지난날 글님은 으레 중국 한문을 썼어요. <역옹패설>이란 책은 고려 무렵에 나왔다고 하니 훈민정음하고는 동떨어집니다만, 이 나라에 살림꽃이 제대로 섰다면 훈민정음이 태어난 뒤 이 한문책을 훈민정음으로 옮기는 일을 했겠지요.

가만 보면 우리는 다른 나라 책을 한국말로 옮기는 일에 앞서, 아직 우리 글씨가 없던 무렵 한문으로 쓴 책을 오늘날 우리 글씨로 알맞게 옮기는 일이 매우 서툴거나 늦습니다. 우리가 쓰는 말이 삶자리에서 삶말이 되도록, 너나없이 쉽게 읽고 쉽게 익혀서 쉽게 나누는 길로 이어가도록 종이책을 가꾸는 살림이 매우 모자랐어요.

손수 시를 옮겨적은 <無名詩集 1>(조성래 엮음, 1977)는 이 글꾸러미를 묶은 분이 무척 좋아하던 시를 또박또박 옮겨서 엮은 꼭 하나만 있는 책입니다. 이 <무명시집>을 묶은 분은 벗님하고 주고받은 글월도 <강변에서 1 (편지 모음집)>(김선아·하계남·최명자, 1975)하고 <강변에서 2 (편지 모음집)>(손정혜·고순남, 1975) 같은 이름을 붙여서 알뜰히 여미었습니다. 지난날 손글월 자취를 고이 엿봅니다.

겉그림이 조금 뜯겼으나 <고어독본>(정태진, 연학사, 1947)을 손에 쥐면서 후끈후끈합니다. 이 오랜 책을 살뜰히 읽은 분 손길을 느끼고, 여러 손길을 거치고 돌면서 오늘까지 잘 살아남아서 제 눈앞에 놓인 숨결을 마십니다.
 
 조선총독부 기관지 '조선'. 이 잡지는 친일부역 발자국을 아주 잘 보여준다.
 조선총독부 기관지 "조선". 이 잡지는 친일부역 발자국을 아주 잘 보여준다.
ⓒ 최종규/숲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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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잡지 <朝鮮>(朝鮮總督府 文書課長) 351호(1944.8.)를 고르기로 합니다. 잡지 <朝鮮>은 일본 제국주의가 이 땅을 짓밟은 다음 조선총독부를 세우자마자 바로 펴냈다고 합니다. 이 나라를 식민지로 삼으면서 선보인 홍보잡지인 셈입니다. 이 잡지에 실은 글이나 사진이란 바로 '친일부역'이지요.

한국으로서는 온통 친일부역으로 가득한 이 잡지는 기나긴 날을 어떻게 살아남았을까요? 제가 만난 이 잡지는 '동경 한국연구원 도서관 1976.8.4.'라는 도장이 찍혔습니다. 처음에는 한국에서 나왔다가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다시 한국으로 온 셈입니다.

쓸쓸한 뒷그늘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잡지인데, 갓 식민지가 되던 이 땅에서 이 잡지 첫 호가 나오고, 100호가 넘고 200호가 넘고 300호가 넘도록 나오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던 사람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어쩔 수 없으니 그저 친일부역으로 먹고살자고 여겼을까요, 이 잡지가 다달이 새로 나올 적마다 더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을까요?

지 <朝鮮>을 가만가만 넘기다가 불쑥 이런 생각이 듭니다. 해방이 되기 무섭게 나라 곳곳 도서관이며 시청이며 군청이며 면사무소이며 동사무소이며, 바로 이 <朝鮮>이란 잡지를 비롯한 친일부역 자료를 낱낱이 뒤져서 불쏘시개로 삼거나 불살랐을 수 있겠다고. 뒷그늘 자국을 누가 알까 두려워 꽁꽁 숨기려고 이런 잡지나 책을 없애려고 바빴으리라고.

 
 고른 책을 상자로 둘 묶는다.
 고른 책을 상자로 둘 묶는다.
ⓒ 최종규/숲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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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른 책을 다 들고서 움직일 수 없습니다. 이밖에도 많습니다. 숨을 가늘게 쉽니다. 책값을 셈하고 보니, 이달치 살림돈뿐 아니라 다음달치 살림돈까지 한몫에 나갑니다.

바보짓을 한 하루일는지, 참짓을 한 오늘일는지, 사라질 수 있는 책을 건사한 날인지, 새롭게 배우는 이야기를 만난 자리인지, 어느 한 가지로만 생각하기가 어렵습니다. 부디 이 온갖 책이 징검다리가 되어 새로운 삶길로 가는 씨앗이 되면 좋겠습니다. 제 곁에서도, 이 땅 곳곳에서도, 아름책집 한 곳에서 깨어난 책이 아름노래로 술술 퍼질 수 있기를 빕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글쓴이 누리집(blog.naver.com/hbooklove/)에 함께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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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말사전을 새로 쓴다. <사전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우리말 꾸러미 사전》《우리말 글쓰기 사전》《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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