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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으로 유례없는 무소불위 권한을 가진 대한민국 검찰, 어떻게 견제할 수 있을 것인가? 개선해야 할 수사 관행의 문제는 무엇인지, 검찰을 민주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인지 살펴본다. - 참여사회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무소불위 권한을 가진 대한민국 검찰, 어떻게 견제할 수 있을 것인가?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무소불위 권한을 가진 대한민국 검찰, 어떻게 견제할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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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검찰'이라는 운명

우리나라의 검찰은 현대 정치사의 맹점을 정확히 꿰뚫는다. 국가의 모든 권력이 대통령이라는 하나의 점에 수렴되어 그가 세상을 휘어잡을 때는 충성을 하다가도 대통령의 권력이 약간이라도 느슨해지면 스스로 권력을 확장해 칼을 휘두른다.

권위주의적 군사정부나 그 연장이라 할 정부에서 검찰은 누구보다 앞장서서 권력의 도구가 되었다. 그러다 권위주의적 정권이 물러난 뒤 정부가 검찰권력 위에 법과 국민을 두려고 하자 여지없이 돌아서 독립과 중립이라는 방벽을 내세워 완강히 저항하고 반발했다.

오늘날 검찰이 이른바 '괴물'이 되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게 만든 건 그래서 한국 정치다. 국민의 정부 초기 김대중 대통령은 검찰청을 방문해 "검찰이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는 경고 메시지를 남겼다. 그러나 검찰이 바로 서지 못한 이유는 검찰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검찰의 형사사법 권력을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하려고 했던 정치의 패악 때문이었다.

검찰의 역사 : 민주화 이전 

통치수단으로서 경찰이 전횡을 일삼던 일제강점기나 자유당 정권기에서조차 '반공검사' 오제도(1917~2001) 같은 인물이 법외적 폭력을 휘두를 수 있었던 것은 식민통치의 수족이던 검찰이 해방 이후 이념대립을 빌미로 집권한 독재권력에 빌붙었기 때문이다. 이는 "7인의 범죄자를 검거하기 위해 100명을 잡아들인다"(<동아일보> 1929. 12. 6)는 당시 기사 제목에서도 알 수 있다.

검찰은 경찰 권력을 견제하고 통제한다는 명분으로, 혹은 법치의 지엄함을 빌미로 한편으로는 경찰권력에 편승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스스로 폭력의 주체가 되어 국민 위에 군림했다.

1954년 형사소송법 제정 당시 검찰 출신 국회의원 엄상섭의 발언(주석1)에서 알 수 있듯이 경찰파쇼를 억제하기 위해 검찰에 부여한 기소독점, 기소편의주의, 경찰수사 지휘권, 검사신문조서의 증거능력 인정 등의 장치들은 고스란히 '검찰파쇼'의 토대가 되어 언제든 독재정권이 동원할 수 있는 검찰이라는 권력을 낳았다.

검찰이 안정적으로 정치권력의 통치 밑으로 들어간 것은 군사정권 때였다. 군대와 중앙정보부 그리고 공화당이라는 사유화된 정당을 통치의 핵으로 삼았던 군사정권은 다른 여러 공무원들처럼 검찰과 법원조차 관료의 틀 속에 묶어서 합법성의 외관을 갖추고자 했다.

사법연수원을 설치하여 국가가 획일적이고 일방적인 교육체제로 모든 검찰과 법관을 찍어냈으며, 유신체제에서 구속적부심사(주석2) 제도 폐지, 재정신청 제도 최소한 축소 등 언제든 긴급구속이 가능하도록 형사소송법을 개정했다. 무소불위로 치닫는 정치권력의 한편에서 검찰권력도 극대화된다. 이후 신직수(1927~2001), 김기춘(1939~) 등으로 이어지는 소위 '정치검찰'의 계보는 이렇게 틀을 잡아갔다. 

그에 이어 등장한 군사정부는 애초부터 검찰을 관료조직으로 만들고자 했다. 법이 지배하는 국가가 아니라 법을 통한 지배가 관철되는 억압적 사회질서를 구축하고자 했던 군사정권은, 출범 직후부터 중앙수사국 설치 등 대통령의 하명수사가 가능한 대검체제를 강화하였고 영장신청권을 검사에게만 부여했다.  

검찰의 역사 : 민주화 이후 

1987년 6월항쟁으로 촉발된 민주화는 안타깝게도 이러한 검찰권력에 별다른 충격을 주지 못했다. 우선 그 자체가 신군부와 자유주의 정치세력의 타협에 의해 이뤄진 체제라는 점에서 그렇다. 이 과정에서 검찰 출신 정치인들이 적지 않게 양산되었고 또 이들이 향후 등장하는 새로운 정부에서 요직을 차지하게 되면서 검찰 권력은 더 세졌다. 과거 군사정권의 통치술 행사 과정에서 군대나 안기부 등이 갖고 있던 몫이 현저히 줄어들고 그 자리를 검찰이  대체했다.

권력의 정점이었던 안기부 수장 자리에 배명인, 서동권 같은 검찰 출신이 임용되는가 하면, 범죄와의 전쟁(1990~1992)에서는 검찰의 수사 실적이 특별히 부각되었다. 3당 합당 이후 대통령에 대한 탈당 요구와 보안사 민간인 사찰 사건 등 당시 노태우 정권이 겪던 정치적 위기상황을 극복하는 데 검찰이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

1992년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은 검찰 권력이 민주화와 전혀 무관한 공백 영역에 자리하는 동시에 여전히 통치술의 한 영역을 구성하고 있었음을 보여줬다. 물론 전두환·노태우의 처벌 과정에서 '실패한 쿠데타'론을 제기한 것도, 이들을 수사하고 처벌로 이끈 것도 모두 검찰이라는 점에서 검찰권력의 양면성을 말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 모든 과정에서 일관되게 진행된 것은 '검찰권력의 강화'였다. 
 
검찰개혁의 시간
 검찰개혁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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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권력은 '실패한 쿠데타'론으로 두 전직 대통령을 보호할 수 있는 동시에, 법과 정의를 내세우며 이들을 처벌하고 현직 대통령의 아들까지 법정에 세울 수 있었다. 정치권력을 넘어서는 또 다른 권력을 향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실제 이런 양상은 국민의 정부 시절에 와서 극대화된다. 1999년 검찰이 대전 조폐공사의 파업을 유도하였다는 발언이 터져 나오고, 모 재벌 회장의 구명운동 과정에서 검찰총장을 비롯한 고위층에 고가의 옷을 로비한 사건이 발생하면서 검찰은 최대 위기에 몰렸다. 이를 타개하기 위한 방편으로 최초의 특별검사가 임명되는 한편 범국가적인 사법개혁추진위원회가 구성되기에 이른다.

하지만, 국회에서 열린 청문회도 검찰의 수사도 이 사건의 실체를 제대로 규명하지 못했다. '알아낸 것은 앙드레 김의 본명뿐'이라는 농담만 남긴 채 사건은 마무리되고 말았다. 검찰개혁을 향한 국민의 요구가 어느 때보다 높았지만 레임덕을 걱정한 정치권력은 검찰개혁보다 그들의 안위를 위해 검찰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더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 결과는 김대중 대통령의 두 아들에 대한 구속이었다. 당시 검찰총장은 취임사에서 '진정한 무사는 곁불을 쬐지 않는다'고 했다.

노무현 정부에서 제기된 사법개혁 논의 역시 검찰권력을 순치하는 데에는 그리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검사와의 대화'는 오히려 검찰권력의 위상만 확인시켰으며, 검찰권력의 핵심인 중수부 폐지 시도는 "내가 먼저 내 목을 치겠다"는 검찰총장의 반발만 야기했다.

이어 발생한 송두율 교수 구속 시도(2003)에 대한 당시 천정배 법무부 장관의 수사지휘권 발동 사태는 검찰총장의 사퇴로 이어졌지만, 동시에 "아버지와도 같은 '검찰총장'"이라는 검찰의 강고한 가부장적 조직주의를 재확인하는 계기가 됐다. 거의 전국가적·전사회적으로 진행되었던 사법개혁의 논의조차 검찰에 관해서는 무력하기 그지없어서 공판중심주의라는 원론도 제도화하지 못했다.  
  
명실상부 검찰공화국의 탄생

이명박, 박근혜 정부의 통치 시기는 명실상부한 검찰공화국 시대였다. 이미 노무현 정부에서부터 전략적 유연성 문제라든가 이라크파병, 대통령탄핵, 행정수도이전사건 등 정치적 의제들이 하나같이 사법적 판단으로 처리되면서 정치의 사법화 내지는 사법에 의한 정치의 식민화 현상이 나타났지만, 이 두 정부는 그러한 사법 만능의 틀을 검찰권력을 통해 재편하였다는 점에서 명실상부한 검찰공화국의 체제를 만들어냈다. 

이 시기,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된 '법질서 정치'(law and order politics)의 통치술은 정치적 반대나 주장은 물론 시민사회의 집단적 요구나 민원조차도 업무방해죄나 교통방해죄, 명예훼손죄 등의 형사 문제로 만들어 검찰의 손에 맡겼다. 전직 대통령에 대한 먼지떨이식 수사는 '법질서 정치'의 첨병으로 나선 검찰이 자신의 권력을 시민사회에 재확인시키는 작업과 다름없었다.

이런 검찰공화국은 정치권력과의 야합뿐 아니라 검찰제도 그 자체의 문제에서 비롯된 측면도 있다. 영장신청권을 비롯한 수사(지휘)권에서부터 기소권, 행형지휘권은 물론이고 지자체의 송무사건에 대한 지휘권까지도 독점하고 있는 검찰은 막강한 권력에도 어떤 견제나 감시도 받지 않는다.

외청인 검찰청을 감사하고 견제하여야 할 법무부는 애초 검찰의 식민지가 되어 있고, 국정원 등과 같은 권력기관을 비롯하여 외부 주요기관에 파견한 검사들은 검찰의 정보원이자 인적 네트워크의 관리자가 되어 우호적인 외부환경을 조성한다.

그뿐만 아니라 검사 출신 의원들의 영향력이 절대 적지 않은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는 중요한 고비마다 그들의 든든한 방호막이 되어 주기도 한다. 정치권력이 법의 이름으로 검찰을 동원하기 위해 만들어준 그 많은 권력이 이제는 괴물이 되어버린 검찰의 고유한 권력이 되어  뼈와 근육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민주적 검찰개혁 

최근 터져 나온 검찰개혁 요구는 이러한 검찰공화국을 직격한다. 공수처 설치나 검경수사권 조정 문제는 검찰이 독점하던 권력을 쪼개고 분산하는 것이기에 중요하며, 인권수사준칙이나 특수부 폐지 등은 검찰 조직과 관행에 대한 일대 수술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이런 논의가 야기하는 정치권과 검찰권력 간의 갈등과 결별의 조짐들, 그리고 그 시끄러움에서 문득문득 각성하게 되는 시민들의 검찰개혁 의지, 이것이야말로 불가역적 개혁의 물꼬를 여는 중대사건이다.

검찰개혁이라는 명분으로, 검찰의 권력을 정치기관인 법무부로 이전하는 눈가림의 개혁이 아니라 시민들이 검찰권력에 대한 감시자이자 견제자로 스스로 자리매김하게 되는, 가장 두드러진 인식의 변화가 시작된 것이다. 이런 시작으로부터 우리는 민주적 검찰개혁이라는 창대한 결과를 기대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윤석열 검찰총장이 17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에서 법사위 국정감사를 앞두고 법사위원들을 기다리고 있다.
 윤석열 검찰총장이 17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에서 법사위 국정감사를 앞두고 법사위원들을 기다리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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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1. 1954년 1월 9일 국회 형사소송법안 공청회에서 엄상섭 의원은 "기소권만을 가지고도 강력한 기관이거늘 또 수사의 권한까지 푸라스하게 되니 이것은 결국 검찰 파쇼를 가지고 온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경찰이 중앙집권제로 되어 있는데, 경찰에다가 수사권을 전적으로 맡기면 경찰 파쇼라는 것이 나오지 않나, 검찰 파쇼보다 경찰 파쇼의 경향이 더 시지 않을까? … 오직 우리나라에 있어서 범죄수사의 주도권은 검찰이 가지는 것이 좋다는 정도로 생각을 했든 것입니다. 그러나 장래에 있어서는 우리나라도 조만간 수사권하고 기소권하고는 분리시키는 이러한 방향으로 나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발언한 바 있다.

주석 2. 피의자에 대한 구속의 적부를 법원이 심사하여, 그 구속이 위법·부당하다고 판단되는 경우 구속된 피의자를 석방하는 제도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한상희님은 건국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입니다. 이 글은 <월간 참여사회> 2019년 11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태그:#검찰개혁, #검찰공화국, #정치검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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