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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에서는 대학살이 일어나고 있어도 현장노동자들은 잔업과 철야근무에 눈코 뜰 새가 없었다 광주에서는 대학살이 일어나고 있어도 현장노동자들은 잔업과 철야근무에 눈코 뜰 새가 없었다
▲ 광주에서는 대학살이 일어나고 있어도 현장노동자들은 잔업과 철야근무에 눈코 뜰 새가 없었다 광주에서는 대학살이 일어나고 있어도 현장노동자들은 잔업과 철야근무에 눈코 뜰 새가 없었다
ⓒ 5.18 기념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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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에서 공수부대원들이 피바다를 이루게 한 장본인 전두환은 '느긋한' 자세로 사태를 보고받고 있었다. 

불과 7개월여 전 부마항쟁 때 보안사령관으로서 사태를 '효과적'으로 진압했던 터였다. 전두환이 박정희에게서 보안사령관으로 임명된 것이 1979년 3월 5일이다.    

그해 10월 부마항쟁을 진압했고, 박정희 암살 뒤인 12월 12일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체포했다. 그리고 1980년 4월 14일 중앙정보부장서리에 임명되어 대한민국 2대 정보기관을 장악하면서 5ㆍ17 쿠데타를 주동했다. 걸림돌이던 위컴 주한미군사령관으로부터 한국군 일부를 임의로 이동해도 좋다는 승락까지 받았다. 그래서 더욱 거칠 것이 없었다.
  
전두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연행하고 수사상황을 발표하는 12.12 당시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 소장
▲ 전두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연행하고 수사상황을 발표하는 12.12 당시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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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군이 시외곽으로 철수하고 시내에 어느 정도 안정이 이루어지고 있던 5월 22일 전두환은 중앙정보부 전남지부장 정석환에게 전화를 걸어 공수부대장 최웅에게 격려금을 전달케 했다. 당시 화폐가치로 100만 원은 거액이었다.

그날 전두환은 당시 정보부 전남지부장 정석환에게 전화를 걸었다. 당시 특전사 11여단장  최웅은 21일 밤 시위 진압과정에서 사망자가 적지않게 발생해서 그런지, 소재파악이 되지 않고 있던 상황이었다.

전두환은 정석환에게 "최장군의 사기가 극도로 저하되어 있을 터이니 용기를 잃지 말고 분발하라고 전해달라"며 전두환 자신의 명의로 금일봉 1백만 원을 최웅에게 전해달라고 지시했다. (주석 8)
  
충정작전(진압군은 나이 어린 고등학생들까지 연행) 충정작전(진압군은 나이 어린 고등학생들까지 연행)
▲ 충정작전(진압군은 나이 어린 고등학생들까지 연행) 충정작전(진압군은 나이 어린 고등학생들까지 연행)
ⓒ 사진 출처 : (재)5.18기념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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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시민들을 집단 학살한 공수부대 책임자에게 거액의 격려금을 보낸 전두환의 의식구조는 상상하기 어렵다.

심리학에 변태심리학이 있다. 보통 사람의 정신현상과는 다른 비정상적 정신현상을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심리학의 한 분야를 말한다. 개인적인 변태심리학과 단체적인 변태심리학으로 대별되는데 개인적인 변태심리학에서는 변태, 지각의 변태ㆍ주의의 변태ㆍ상상의 변태ㆍ사상의 변태ㆍ감정의 변태ㆍ의지의 변태ㆍ인격의 변태 등이다. (주석 9)

이로 미루어 전두환과 광주학살 부대장과 대원들은 하나같이 개인적인 변태심리와 집단적인 변태심리를 동시에 갖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국민에게 집단 총질을 한 책임자에게 격려금을 줄 수 있었으며, 그들의 부대는 이후 더 잔혹한 학살을 자행했겠는가.
  
 광주시민들이 시민군들에게 주기 위해 밥을 짓고 있다.
 광주시민들이 시민군들에게 주기 위해 밥을 짓고 있다.
ⓒ 5.18기념재단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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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들의 의식은 전혀 달랐다.

병원마다 부상자가 넘치고, 언제 다시 계엄군이 쳐들어올지 모르는 불안감과 공포 속에서도 부족한 생필품을 나누고, 상부상조하는 공동체를 이루는 한편 시민군을 외곽지역에 배치하여 계엄군의 재진입에 대비했다.

광주시민들은 매점매석을 방지함으로써 그 시점에서 이미 시내에 반입되어 있는 생필품을 최대한도로 활용했다. 쌀집에서는 한꺼번에 두 되 이상의 쌀을 팔지 않았고 담배가게 주인은 한 사람에게 한 갑씩만 담배를 팔았다. 슈퍼마켓이나 식료품점도 마찬가지였다.

이 과정에서는 시민군과 학생들이 큰 역할을 했다. 그들은 시내의 치안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이유 없는 파괴행위를 금지시키고 경찰서와 은행, 관공서와 경찰간부의 관사 등 주요 시설물에 경비조를 배치했으며, 각종 차량에 번호를 붙여 임무를 분담시켰다.

당시 78번까지 등록된 시민군 차량이 시민들에게 교통편의를 제공하였는데, 1번부터 10번까지는 도청~백운동, 11번부터 20번까지는 도청~지원동, 21번부터 30번까지는 도청~서방, 31번부터 40번까지는 도청~동운동, 41번부터 50번까지는 도청~화정동을 오가며 시민들을 수송하였고, 소형차량은 연락과 환자수송을 맡았다.

물론 5월 21일 오후 광주공원에서 결성된 시민군은 공수부대가 재진입할 가능성에 대비하여 지원동, 학운동 등의 외곽지역 요소요소에 10개 조의 경계병을 배치했다. 시민들은 학생과 시민군에게 적극적인 지지와 지원을 보내주었다. 식품점과 슈퍼마켓, 약국 등에서는 음료수, 빵, 드링크를 무상으로 내놓았고 주부들은 동네별로 쌀을 모아 김밥을 만들었다. (주석 10)


주석
8> 정석환, 「비화, 5ㆍ18당시 정보부전남지부장 정석환비망록, 전두환은 공수부대장에게 진압격려금 내려보냈다.」, 『신동아』, 1996년 1월호, 여기서는 강준만, 앞의 책, 143쪽, 재인용.
9> 이윤재, 『정치지도자의 정신분석』, 11쪽, 태양문화사, 1978.
10> 정상용 외, 앞의 책, 241~242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5ㆍ18광주혈사’]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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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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