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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청에 모인 시민들
 도청에 모인 시민들
ⓒ 5.18기념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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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2일 광주는 해방구였다.

한국인에게 '해방'의 의미는 남다르다. 하지만 압제에서 풀리는 자유는 쉽게 오지 않았다. 35년 일제강점에서 풀리는 8ㆍ15해방, 12년 이승만 독재에서 풀리는 4ㆍ19혁명, 18년 박정희 전제에서 풀려난 10ㆍ26해방이 그랬다.
 
광주 시민들은 또 한 번의 해방을 맞게 되었다. 어느 외적 못지 않게 '인간 사냥'을 저지르던 전두환의 충견들을 시 외곽으로 축출하고 5월 22일 새날을 맞았다. 해방과 새날에는 수많은 시민의 피와 생명과 살점을 제물로 바친 대가였다.

계엄군이 물러가고 도청이 시민군의 손에 들어왔다는 소식은 밤사이 광주시 전역에 전해졌다. 흥분과 감격에 젖어 이른 아침부터 도청으로 몰려든 시민들은 처참하게 일그러진 시체들을 보며 계엄군의 잔학상에 치를 떨었고 앞으로의 상황변화를 예의주시하며 도청 앞에서 궐기대회를 가졌다.
 
시민들은 자체 치안확보와 질서확립을 위해 스스로 거리를 청소하고 경계근무를 섰다. 해방기간 광주에서는 큰 안전사고 없이 생활물자를 나누어 쓰고 시민군들에게 적극 협조하는 공동체 생활을 꾸려나갔다.
 
지난밤 지역방어 전투에 참가한 시민군은 무질서하게 돌아다니는 차량을 등록시켜 임무를 부여했으며, 무장시민군을 재편성하여 각 지역으로 신속하게 배치하는 등 자체 조직과 병력을 통제해 계엄군의 반격에 대비한다. (주석 1)

  
차량시위를 하는 광주의 시위대 용기있는 광주시민들의 행동은 실로 대단했다.
▲ 차량시위를 하는 광주의 시위대 용기있는 광주시민들의 행동은 실로 대단했다.
ⓒ 5.18 기념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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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ㆍ18역사 현장'을 취재했던 언론인의 기록이다.
 
무장한 시민군은 계엄군이 철수한 후 텅 비어 있는 도청을 무혈접수했다.
이로써 광주는 교도소와 외곽의 군부대를 제외한 전 지역이 시민군의 장악 하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도청에 들어간 시민군은 처음에 김원갑이 지휘하고 있었다. 그는 계엄군이 철수하자 광주공원의 시민회관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무장시위대를 차량에 태워 도청에 들어왔었다.

밤을 도청에서 세운 김원갑은 아침 7시쯤 시민군 5백여 명을 지휘하면서 시내 요소요소에 바리케이트를 치는 한편 돌고개쪽, 교도소쪽, 백운동쪽, 운남동쪽, 지원동쪽, 광천동쪽 그리고 고속도로 진입로 등 7개소에 임시 초소를 세우고 육백여 명을 배치하여 계엄군의 동태를 감시하는 한편 시내 주요 건물에도 시민군을 배치하였다. (주석 2)


시민들은 알고 있었다.

8ㆍ15가 남북분단과 미군정으로, 4ㆍ19가 박정희의 쿠데타로, 10ㆍ26이 전두환의 쿠데타로 무너지고 다시 참혹한 반동기를 겪어야 했다는 사실을.
 
그래서 신속히 대책에 나섰다. 다시 탈환한 도청에서 유지급 인사들이 모여 향후 대책을 논의했다. 민주화운동가ㆍ종교인ㆍ변호사ㆍ지역 유지 등이 모여 5ㆍ18수습대책위원회(위원장 최한용)를 구성하고 계엄사에 요구할 협상조건을 토론한데 이어 무기회수 문제를 논의했다.

이 과정에서 일부 수습위원들의 구성에 불만을 느낀 홍남순ㆍ김성용ㆍ송기숙 등 재야인사들은 남동성당에서 별도의 모임을 갖고 수습대책을 논의했다.
 
도청수습대책위원회는 회수한 무기 중 일부를 가지고 상무대 전남북계엄분소를 찾아가 7개항의 요구조건을 내걸고 계엄군측과 협상을 벌였다. 그리고 오후 5시경 협상결과를 도청광장에서 시민들에게 보고했다.

수습위원회가 마련한 7개 요구사항은 다음과 같다.

 △ 사태 수습 전에 군투입 말라
 △ 연행자를 석방하라
 △ 군의 과잉진압을 인정하라
 △ 사태수습 후의 보복 금지
 △ 책임면제
 △ 사망자에 대한 보상
 △ 이상의 요구가 관철되면 무장해제
 
그러나 무조건 무장해제하고 항복하라는 계엄사의 요구와, 시민대표의 7개 조항의 요구가 엇갈린 가운데 협상은 결렬되고 말았다. 협상의 내용을 전해들은 시민들은 협상대표를 향해 야유를 보내기도 했다. 요구조건을 두고 협상대표 끼리와 시민들 사이에도 의견이 갈렸다.
 
수습대책위원회의 활동과는 상관없이 5월 22일 광주시내는 혼란상이 가시지 않았고 외곽에서는 총격전이 벌어졌다.

22일 아침 일찍 도청에 들어간 시민군과 일반 시민들은 질서가 잡히지 않아 우왕좌왕했다.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일의 순서와 윤곽이 잡혀가기 시작했다. 도청 구내에서는 계엄군들이 버리고 간 총기와 방독면, 수류탄, 무전기, 작전지도 등이 뒤섞인 채 책상 위나 바닥에서 나뒹굴고 있었다. 시민군은 곧 그것들을 정리하고 분류하여 자신들이 사용했다. 학생들은 일의 매듭을 풀어나가는 데 신속했다. (주석 3)


주석
1> 『광주5월항쟁전집』, 76쪽.
2> 김영택, 앞의 책, 279쪽.
3> 황석영 외, 앞의 책, 279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5ㆍ18광주혈사’]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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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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