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드레이어 감독의 <잔 다르크의 수난> 영화 포스터

▲ 칼 드레이어 감독의 <잔 다르크의 수난> 영화 포스터 ⓒ 스카이시네마

 
"그 무엇보다도 너는 네 마음을 지켜라. 그 마음이 바로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 잠언 4:23
 
프랑스 오를레앙 출신의, 스무살도 채 되지 않은 한 처녀가 법정에 서 있다. 그런데 이 법정은 프랑스가 아닌 잉글랜드에 있고, 심문관들은 종교와 권력을 겸비한 사제들이다. 제도권력을 쥔 잉글랜드의 노회한 사제들은 백년전쟁으로 기세가 거의 기울어진 프랑스를 기적적으로 되살려 '프랑스 전쟁영웅'으로 떠오른 잔 다르크를 전쟁터에서 잡아와서 이교도 심판이라는 명목 아래 심문을 시작한다.

이 심문은 어떤 대답을 듣던 간에 처형을 피할 수 없는 과정을 밟는다. 중요한 것은 이 심문을 주고 받는 과정에서 한 처녀와 노회한 사제들이 극명하게 구분된다는 점이다. 이는 순수하지만 누구보다 최고의 정신력을 지녔으나 육체적으로 포로가 되어 힘이 없어져 버린 처녀와 권력과 결탁한 힘을 지녔으되 자신들이 믿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지가 극히 의심스러운, 타락한 정신성을 지닌 사제들에 대한 구분이다.
 
칼 드레이어 감독의 영화 <잔 다르크의 수난>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초근접 촬영을 통한 인물들의 생생한 묘사이다. 마리아 팔코네티가 역할을 맡은 잔 다르크는 이렇다 할 화장 없이 짧은 머리와 남장을 한 모습으로 나왔음에도 그 순수성과 감성의 인간적이고 진솔한 면을 놓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심문관들에 대응하는 잔 다르크는 고고한 정신성을 우월적으로 드러냄으로써 그저 연약한 인물이 아님을 보여준다. 이에 대비되는 사제 심문관들은 나이를 먹었으되 지혜로움보다는 역겨움과 타락이 그대로 드러나는 표정과 주름의 인물 묘사를 통해 육신의 나이는 성숙하되 영혼의 나이는 성숙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즉 이 영화는 크게 두가지 측면의 이야기를 대립적으로 다룬다. 한 가지는 순수와 타락의 대립이다. 물리력은 제거되었으나 정신성은 고고한 존재와 종교와 권력의 막강한 물리력을 지녔으나 한없이 삐뚤어진 마음의 대립이 그것이다.

둘째는 은총과 세속의 대립이다. 은총과 세속의 구분은 종교적인 의미로 볼 수 있기도 하지만 다른 말로 하자면 정신성과 물질성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삶의 우선을 정신성에 둔다면 그 존재는 물질적 획득이나 세속적인 성취 여부에 상관없이 온전하고 행복한 마음에 가까이 살 수 있는 존재이다.

내 마음의 중심을 잡고 그 중심의 의식을 키우는 존재는 바깥의 변화와 고난에 흔들리지 않는 온전성을 지니기 마련이다. 그러나 삶의 우선을 물질성에 둔다면 그는 물질적 획득이나 세속적인 성취 여부가 자신의 완전함이나 행복의 기준이 될 수밖에 없다.

이는 이것들이 성취되지 못할 때 불행한 마음에 가까운 것은 물론이고 더 나아가서 물질적 획득이나 세속적인 성취가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행복한지에 대해서는 별개의 문제이다. 오히려 그는 성취한 그것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온전한 마음이나 행복감을 신경쓸 여유없이 아등바등 살게 될지도 모른다. 이 영화에서 심문관 사제들은 막강한 권력을 지녔으되 그 고귀한 정신성으로 인해서가 아니라 언제고 없어질 수 있는 한줌의 물리력으로 자신들의 존재를 증명할 뿐이다.
 
영화는 위의 대립적 장치들을 이야기의 마지막까지 가져간다. 잔 다르크는 글자조차 배우지 못한 문맹의 소녀이지만 지식과 학력, 나이가 월등한 수십명의 사제들을 상대로 질문과 대답을 이어간다. 잔 다르크의 우월한 대화는 오히려 몇몇 사제들의 마음을 흔들 정도다. 만약 이들이 믿는 하나님이 협소한 지역신이 아니라 우주의 하나님이라면, 그는 학식있고 고위 사제의 지위에 있는 노인들보다 어리고 무식하고 못 배웠지만 누구보다 고결한 영혼의 잔 다르크를 천국으로 부를 것이다.  
 
칼 드레이어 감독의 <잔 다르크의 수난> 마리아 팔코네티가 연기한 잔 다르크

▲ 칼 드레이어 감독의 <잔 다르크의 수난> 마리아 팔코네티가 연기한 잔 다르크 ⓒ 스카이시네마


영화는 전반부에 잔 다르크와 심문관들의 재판과정을, 후반부에는 처형장에서의 장면과 그 반응에 대한 군중들의 반응을 다루고 있다. 사제권력과 그 졸개들은 이교도 재판이란 명분 하에 잔 다르크를 처형하지만 군중들은 그녀가 고귀한 영혼의 존재임을 직감한다.

그녀가 성 미카엘 천사로부터 프랑스를 구하라는 하나님의 전언을 받았는지의 여부는 매우 개인적이고 내면적이고 정신적인 면이 있어서 쉽게 증명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그녀의 의지와 백년전쟁의 한 가운데에 뛰어들어 프랑스의 정체성을 살려낸 그 정신성의 위대함은 의심할 여지없이 입증되었다. 우리가 안중근 의사와 유관순 열사를 존경하는 것처럼 프랑스인에게 잔 다르크는 구국의 영웅이다.
 
잔 다르크가 세상을 떠나고 백년전쟁은 20여년이나 지속이 되었지만 기세등등했던 잉글랜드는 결국 프랑스에서 철수하고 전쟁은 끝났다. 또 그녀가 사망한 후 25년 뒤에 가톨릭에서는 재심을 통해 그녀에게 붙은 이교도란 딱지를 떼고 무죄를 판결했다. 1909년에 잔 다르크는 가톨릭의 복자의 지위에 오르고 1920년에는 성인으로 추대된다.
 
칼 드레이어 감독의 <잔 다르크의 수난>은 1928년에 제작된 흑백 무성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작품성의 진가를 잃지 않는 걸작이다. 이는 작품의 진정성이 영화적으로 잘 발휘된 결과이기도 하겠지만 본질적으로는 고전이 주는 가치의 힘이기도 할 것이다. 그 가치는 세월이 변함에도 늘 주는 교훈의 요소이기도 하다.

역사는 하나로 흐르지만 인간의 태어남과 죽음은 쉴 새 없이 일어난다. 아마도 중세 당시의 인간들이 아직도 살아 있다면 온갖 시행착오와 교훈의 누적으로 인해 세상은 지금보다는 조금 더 진화되지 않았을까. 그러나 100살도 채 못 사는 인간들의 역사는 항구적인 연속성보다는 단절과 시행착오와 퇴행과 반복이 연이어 나타나는 역사에 가깝다.
 
우리는 발전하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고 의식이 진화하고 있으면서도 과거에 발생했으되 미처 배우지 못하는 사이 다시 비슷한 사건들이 다시 발생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과거 중세의 시절에 있었던 마녀재판의 역사를 보면서 우리는 그 시대의 후진성을 느꼈을지 모르나 100년 후의 미래세대들은 지금 시대에 발생한 사건들을 똑같은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일찍이 막스 베버가 얘기했듯이 혁명이나 근본적인 변화가 언제 올지 아무도 모른다. 다만 인간적으로나 일로써나 자신이 매일 할 수 있는 일을 자신의 양심에 따라 혹은 그에 가깝게 따르기만 한다면 될 일이다. 그럴 수만 있다면 현재의 진행과 결과의 성과에 상관없이 후대에 적어도 부끄럽지 않은 조상으로 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매우 더디게 진화하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오늘의 일에 충실할 수 있다면 결국 우리는 우리가 가고자 하는 길을 갈 수 있을 것이다. 잔 다르크가 마녀에서 성녀로 결국엔 인정받은 것처럼.  
 
칼 드레이어 감독의 <잔 다르크의 수난> 성녀와 사제의 대립적 구도

▲ 칼 드레이어 감독의 <잔 다르크의 수난> 성녀와 사제의 대립적 구도 ⓒ 스카이시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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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탐구에 관심이 있습니다. 한국문명의 현실과 미래에 관심이 있습니다. 지구촌 민주주의에 관심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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