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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0월 24일, 박근혜 정부 고용노동부는 팩스 한 장으로 전교조에 '법외노조' 통보를 했습니다. 문재인 정부에서도 법외노조 통보가 취소되지 않는 상황에서, 전교조 활동으로 인해 해직된 교사의 원직복직은 요원한 상황입니다. 법외노조 통보 6년을 맞아 해직교사들이 <오마이뉴스>에 릴레이 기고를 합니다. 세 번째 글은 박정희-박근혜 정권에서 '대를 이어' 탄압당한 손호만 선생님의 인터뷰입니다. 전교조 대구지부의 김석현·박소영 선생님이 그의 말을 정리해 옮겼습니다.[편집자말]
 
 손호만 선생님
 36년 만에 무죄 판결 받은 손호만 해직교사
ⓒ 전교조대구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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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6월 항쟁의 주역이었던 586세대는 군사 독재를 타도하고 직선제를 이루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들이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민주 사회를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영화 < 1987 >에서는 586세대의 투쟁과 희생, 그리고 승리의 서사가 흥미롭게 그려진다. 하지만 조국 사태로 드러났듯 586세대는 자신들이 만든 새로운 세상에서 또 하나의 기득권층으로 등장했다. 이들은 끊임없이 우리가 독재 시절과는 완전히 다른 자유롭고 민주적인 세상에서 살고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87년 이전과 이후에도 우리 사회에는 여러 모순이 존재하고, 사회를 바꾸려고 노력했던 사람들 또한 존재한다. 박정희 군사 독재 시절부터 민주화를 갈망하여 국가의 폭압에 맞섰고, 촛불 정부를 자임하는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현재까지도 이어지는 폭압에 맞서 싸우는 손호만 해직교사(61)가 이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은 586 세대들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그는 지난 10월 1일, '대구 미문화원 폭파사건'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아 36년 만에 억울한 누명을 벗었다. 20대 청년에게 가했던 국가의 폭력에 대해 재판부는 '고문으로 입은 신체적, 정신적 피해에 대해 위로와 사과를 드린다'며 30여 년이 지나 희끗희끗한 머리의 중년에게 사과했다. 박정희 독재정권 때부터 민주화운동을 했던 그는 1983년 폭파사건의 용의자로 구속돼 유죄를 선고받아 옥살이를 했고, 2010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에서 이 사건이 조사대상이 되자 2013년 재심을 청구했다. 

공교롭게도 같은 해에, 그가 몸담고 있던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 박근혜 정부로부터 법외노조 통보를 받았다. 그리고 2015년 전교조 대구지부장에 당선된 그는, 법외노조의 전임자라는 이유로 2016년에 해고된다. 그렇게 2019년 10월은 36년 만에 무죄판결을 받고 국가로부터 사과를 받은 동시에, 국가로부터 법외노조 통보를 받은 지 6년째가 되는 달이다. 전교조 법외노조 통보는 박근혜 정부 때 청와대의 국정농단 양승태 대법원의 재판거래에 의한 비정상적인 사법 적폐로 드러났지만, 문재인 정권이 들어선 지 3년이 다 되도록 법외노조는 그대로이고 그는 여전히 해고자 신세다. 그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독재'에 맞서다가 억울하게 감금... 20대 청년 손호만, '노동'을 만나다 

1983년 9월 22일 오후 9시 36분쯤, 대구 미국 문화원 폭파사건이 일어난다. 미문화원 정문 앞에 놓인 가방에서 폭발물이 터져 고등학생 1명이 숨지고 행인과 경찰관 등 4명이 중경상을 입은 사건이다. 언론은 광주 미문화원 방화사건,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과 더불어 대대적으로 보도했고, 군사독재정권에 맞서 학생운동을 해왔던 그가 용의자로 지목되었다.

하지만 정작 사건이 일어났던 당시 그는 추석을 맞아 강원도 원주 부모님 댁에 있어 영문도 몰랐다. 그러다가 명절이 지난 9월 25일 친구를 만나러 대구로 내려왔을 때, 친구 집 앞에 매복해 있던 경찰들에게 강제 연행됐다. 악명 높은 원대동 대공분실에서 고문기술자로 널리 알려진 이근안의 고문수사 하에, 그는 발가벗겨진 채로 모진 고문을 당하고 강제 거짓 진술서를 써야 했다.

사건 당시 대구에도 없던 그를 유력한 용의자로 만든 건, 1978년 박정희 정권을 비판하는 내용의 선언문을 발표한 이른바 '경북대학교 구국선언문' 사건이다. 대구의 대학생들 8천여 명이 시내로 가두 진출하여 경찰서까지 점거했던 그날의 유신반대 시위는 일본 아사히 신문에 보도되기도 했다.

시위 주동자였던 그에게 전국 수배령이 떨어지고 그는 13개월간 도망자 신세가 될 수밖에 없었다. 박정희가 죽고 나서야 사면 복권되어 학교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5년 전 그 시위를 주도했던 그는 요시찰 대상이었고, 경찰이 대구 미문화원 폭파사건을 빌미로 그를 불법연행한 것이다.
   
 당시 일본 아사히 신문에도 실렸던 경북대 구국선언사건
 당시 일본 아사히 신문에도 실렸던 경북대 구국선언사건 <경관, 60인 부상, 경북대 데모 고려대에서도 집회>
ⓒ 아사히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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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배 기간 동안 그는 서울 면목동 동일교회에 숨어 있었는데, 그곳에서 YH 무역 가발공장에서 일하던 18살 즈음의 여공들을 만나 야학 교사가 된다. '평범한 농민과 노동자가 역사의 주인이다'는 그의 말에 당시 YH노조 조합원이던 고 김경숙은 감명 받아 일부러 그를 찾아와 감사하다는 인사를 했다. 도피생활 중인지라 오래 머물지 못하고 그는 곧 다른 곳으로 떠나게 되었는데, 얼마 못 가 여공들이 회사폐업조치에 항의하여 신민당 당사에 모여 농성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때 경찰의 강제진압으로 김경숙이 추락하여 사망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김경숙과의 짧았던 만남은, 대학에 복학하고 나서도 학생운동의 의식에만 갇히지 않고 노동운동으로 눈을 뜨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학내 민주화투쟁, 청계피복노동자 복직투쟁을 거쳐 80년 5.18 광주를 겪으며 국가의 공권력이 노동자에게 폭력으로 작동함을 인식하게 된다. 또한 학생들만의 힘으로는 사회를 바꾸는 것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느끼고, 노동자 민중이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30대 건설노동자가 되어 대구 건설 일용노동조합 창립

1980년 5월 광주 민주화운동 이후, 대구에서도 민주화운동세력들을 모두 잡아들였다. 박정희가 죽고 3월에 사면 복권되어 복학했던 그는 다시 2개월 만인 5월에 대구 50사단에 연행됐다. 3개월 넘게 감금되어, 온갖 매질을 견디다가 군부대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군사재판을 받았다. 운동권 학생 76명과 함께 강제 징집되어 강원도 화천에서 녹화사업에 동원되었다. 

3년간 군 생활을 마치고 난 후에는 대학교에서 제적 당한 상황이라, 어렸을 때부터 함께 놀던 죽마고우 친구들을 만나 건설 철근 일을 배웠다. 가난했던 강원도 산골마을이라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구로공단에서 일을 배웠던 친구들이었다. 그러다 미문화원 폭파사건으로 수감되어 6개월 옥살이를 하고, 미국 레이건 대통령 방한에 맞춘 학원자율화조치로 사면되어 복학하지만, 학교에서 길을 못 찾은 그는 스스로 미등록 제적을 당하고 노동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든다. 87년 6월항쟁과 7-8-9 노동자 대투쟁을 거쳐 88년 일꾼의 집을 개설하며 노동현장에서 활발히 활동했다. 대구 노동교육협회를 만들며 한창 노동운동에 열심이었던 1993년, 결핵을 발견하여 활동을 중단하고 강원도 고향집에서 요양을 하게 된다.  

다시 죽마고우들을 만나게 된 그는, 본격적으로 철근 일을 배우고 95년에 대구로 돌아와 우방강촌마을, 만촌우방 2차아파트 등의 건설 현장에서 철근노동자로 일한다.

건설 노동자로서의 건강한 삶도 잠시, 97년 IMF 외환위기의 칼바람이 불어닥친다. 청구, 우방, 보성 등 지역의 건설사들이 동시 부도가 나면서 90% 현장이 올스톱 되었고, 졸지에 일을 잃은 건설 노동자들이 두류공원에 모인다. 그도 이 자리에 철근공들을 불러 모았고 이날 대구 건설 일용노동조합을 창립한다. 

24년만의 졸업과 동시에 교사 발령, 그리고 전교조

대구 건설 일용노동조합 철근분회 사무장을 맡은 그는 외환위기가 올 때 노조에서 아무도 이에 대해 설명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노동운동을 어떻게 해나가야 할지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사회과학 이론 공부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 그는 복학을 결심했다. 마침 김대중 정권이 들어선 후여서 과거 시국사건 관련자들의 복학이 가능했다. 2000년 42살에 복학하여 열심히 공부하고, 2001년 8월, 24년 만에 대학교(경북대학교 사범대 역사교육과)를 졸업했다. 77년 입학생이라 자동발령을 받아 2001년 9월부터 학교에서 근무할 수 있었다.
 
 손호만 선생님
 24년 만에 졸업한 손호만 선생님
ⓒ 손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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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경북기계공고, 대구달서공고 등 주로 공고에서 근무했는데, 노동인권교육을 좋아했다. 어렸을 적 친구들을 생각나게 하는 학생들의 처지에 절로 마음이 갔다. 학교에서 노동의 가치를 말하는 단체는 전교조뿐이었다. 이에 자연스럽게 전교조에 가입하여 분회장을 역임하며 청소년노동인권 활동을 했다. 대구는 전교조에 날을 세우는 보수교육감 지역이라, 전교조 활동이 더 험난했다. 그럼에도 그는 교육노동운동의 전망을 찾아 2013년 전교조 대구지부 참교육실장을 거쳐, 2015년 대구지부장 선거에 출마했다. 

박근혜 정권의 탄압 아래 그 누구도 보수교육감 지역의 전임자로 선뜻 나서기 어려운 상황에, 정년을 7년 남기고 지부장 선거에 나서게 된 것이다. 학생운동부터 건설노조 노동운동, 그리고 교육노동운동까지... 그의 삶을 지켜봐 온 사람들은 또다시 가시밭길로 가는 그에게 존경을 표하며 그의 당선에 마음을 모았다. 결국 해직을 감수하고 그는 대구지부장에 당선된다. 해고자 9명이 노동조합에 가입되어 있다는 이유로 '노동조합 아님'을 통보한 2013년 이후, 대구시교육청의 전교조 탄압은 한층 더 거세진 상황이었다.

50대가 되어 박근혜 정권의 탄압으로 '해고자'가 되다

2016년 1월 21일 서울고등법원의 법외노조 판결 이후 교육부가 탄압조치를 단행했다. 노조전임자 현장 복귀와 노조사무실 비품 환수, 단체협약 해지, 각종 위원회 위원 해촉이 그것이었는데, 대구시교육청은 전국에서 가장 앞장 서 탄압을 가해왔다. 그는 결국 2016년 4월 직권면직 되었고, 이렇게 해직된 교사가 전국에 34명이나 생겼다. 문재인 정권이 들어서고 '법외노조 철회, 성과급-교원평가 폐지, 교육적폐 청산'을 정부에 재차 요구한 지 2년 반이 지나면서 그의 쩌렁쩌렁한 목소리도 머리칼과 함께 쉬고 갈라졌다.

지부장 재임 기간 동안 반복된 삭발, 단식과 장기간의 천막 농성 투쟁으로 그는 현재 건강 상태가 여의치 않다. 전국의 34명 해직교사들 중 건강이 좋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하지만 그는 지치지 않는다. 아니 지칠 수 없다. 전국의 많은 노동자들이 저 높은 철탑에서, 캐노피에서, 옥상에서, 또는 단식으로 농성하며 더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총체적인 노동개악 국면에서 노동자들이 연대해 함께 투쟁하지 않고서는 혼자 힘으로 절대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게 그의 말이다. 
 
 손호만 선생님
 2018년 단식 농성으로 더 나빠진 건강 상태를 체크하고 있다.
ⓒ 전교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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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길 위의 교사인 60대 손호만, 끊이지 않는 국가의 폭력과 그의 투쟁

박정희-박근혜로 이어지는 정권 하에서 그는 늘 국가의 폭력에 대항해 수차례 투옥되면서도 끝내 맞서 싸웠다. 국가가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했지만, 왜 여전히 박근혜 정권 때의 잘못은 되돌리지 않고 문재인 정권은 뒤로 물러나 있을까? 

"2019년은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일제의 식민 통치에 항거하여 전국 각지에서 시작된 만세 시위는 약 3개월 동안 1500여 회, 200만 명이 넘는 조선인이 동참하여, 전 세계 어느 운동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큰 규모의 민족 운동으로 역사에 기록된다. 이 엄청난 기세에 일제는 식민지 통치방식을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수정했다. 집회, 언론, 출판, 사상의 자유가 상당 부분 허용되고 조선인 신문의 발행이 허가되었다.

그러나 통치 방식이 바뀌었다고 해서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 지배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현재도 마찬가지이다. 촛불로 정권이 바뀌었다고 해서 자본가 정권의 노동자 지배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방식의 변화일 뿐이다. 국가의 억압으로 민중 항쟁이 발생하자 이를 예방하기 위해 유화적인 방식으로 통치 전략을 바꿔야 했다. 그러나 독점 대자본 중심의 체제는 그대로 가져갔다. 비인간적인 고문이나 강제 연행이 없어지고 언론의 자유가 어느 정도 보장된 성과는 있었으나 그 본질은 바뀌지 않았다."


광화문 차벽에 가로막혔던 촛불 행렬이 청와대 효자동 주민센터 앞까지 나아가게 되고, 그를 고문하고 옥에 가둔 군사독재정권이 문민정부, 참여정부를 거쳐 촛불정권에까지 이르렀지만, 여전히 노동자는 고공에 오르고 단식을 하며 일터에서 생명과 안전을 위협받고 있다. 
 
 손호만 선생님
 청와대 앞에서 농성 중인 손호만 해직교사
ⓒ 전교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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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환갑인 그가 하루빨리 복직되어 교단에서 퇴직할 수 있으려면, 청와대가 법외노조를 취소하면 된다. 그러나 현 정권은 해결 의지가 없다. 애초에 박근혜 정권의 팩스 한 장으로 법외노조가 되었으니, 그대로 되돌려만 놓으면 된다.

2018년 적폐 청산을 위해 설치되었던 고용노동행정개혁위원회는 '즉시 직권 취소'와 '시행령 조기 삭제를 통한 취소'로 전교조 법외노조 문제를 조속히 해결할 것을 촉구했다. '노조아님 통보'를 정부 스스로 취소할 수 있으며, 직권으로 취소하라는 해법을 제시한 것이다. ILO를 위시한 많은 국제기구들도 한국의 노동 탄압을 우려하며 수차례 시정을 권고하였다. 이토록 명약관화한 일이건만, 정부는 대법원과 국회에 책임을 미루고 있다. 

바야흐로 대자본의 위기가 오고 있다. 이를 돌파하기 위한 국가 정책은 자본의 이윤을 지켜주기 위해, 노동자들의 고통을 더 추가하는 방식이다. 그가 노동자의 편에서 국가의 폭력에 대항하는 한, 국가는 언제나 그의 편이 아니었다. 노동자에게 조국은 없다. 노동자가 힘겹게 투쟁으로 쌓아 올린 연대만이 있을 뿐이다. 

그는 10월 21일부터 25일까지 또다시 청와대 앞 전교조 농성장에서 다른 해고자들과 함께 문재인 정부 규탄 집중투쟁을 전개했다. 2013년부터 줄곧 이어진 단식과 농성 투쟁, 이 지겹고도 힘겨운 고통의 고리를 이제는 끊어내야 한다. 문재인 정권이 초기에 말했던 '노동존중'이 거짓이 아니라면, 평생을 흔들림 없이 노동자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싸워왔던 그의 투쟁에 이제는 청와대가 답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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