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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억'. 김환기 작가 작품이 기록한 한국 미술품 최고 경매 가격입니다. '868만원'. 한국의 미술 작가들이 1년 동안 작품 활동을 통해 얻는 평균 수입입니다. 극과 극의 양면이 공존하는 한국 미술계를 '미술톡(talk)'으로 들여다봅니다.[편집자말]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에 위치한 김선태 작가의 작업실. 작업실 한쪽 벽면에 한국화 전통 재료인 석채가 가득 들어차 있다.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에 위치한 김선태 작가의 작업실. 작업실 한쪽 벽면에 한국화 전통 재료인 석채가 가득 들어차 있다.
ⓒ 김성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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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도로변의 한 외딴 사무실. 'OOO 부동산'이라 쓰인 대형 간판 아래 '부동산 안 합니다'란 메모가 붙은 문을 열고 들어가자 형형색색의 유리병들이 한쪽 벽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병 속엔 갖가지 색깔의 가루가 담겨 있다.
  
"석채(색이 있는 천연의 광석을 빻아서 만든 돌가루)예요. 전통 재료죠. 한 천개 정도 됩니다. 모으는 데 10년 넘게 걸렸을 거예요. 보고 있으면 '아 그래도 지금까지 내가 포기하지 않고 버텨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석채가 무지 비싸거든요. 15g에 2만 원에서 3만 원이 기본이니까... 돈이 있어서 한꺼번에 사들인 게 아니라 틈틈이 차근차근 모아온 거니까요.

음... 블랙부터 조금씩 사기 시작했어요. 무채색이 더 싸거든요(웃음). 같은 검정이지만 라스코 블랙, 로만 블랙, 와인 블랙, 본 블랙, 램프 블랙... 다 느낌이 다릅니다. 색들이 참 예쁘죠?"


한국화를 그리는 김선태 작가를 지난 14일 그의 작업실에서 만났다. 유리병을 꺼내며 하나하나 설명해주던 그가 소매를 걷어붙이고 석채로 색을 만드는 과정을 직접 보여줬다. "우린 전통 재료보다 튜브로 나오는 서양 유화물감에 더 익숙하잖아요." 유리병 속에서 석채 한 스푼을 그릇에 털어낸 그가 아교(동물의 가죽·힘줄·창자·뼈 등을 고아 그 액체를 고형화한 물질)와 물을 적당히 섞은 뒤 손으로 문질렀다.
  
 김선태 작가가 석채로 색을 만드는 과정을 직접 보여줬다. 석채 한 스푼을 그릇에 덜어낸 뒤 아교와 물을 적당히 섞은 뒤 손으로 문질렀다.
 김선태 작가가 석채로 색을 만드는 과정을 직접 보여줬다. 석채 한 스푼을 그릇에 덜어낸 뒤 아교와 물을 적당히 섞은 뒤 손으로 문질렀다.
ⓒ 김성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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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유화물감과는 물성(물질이 갖고 있는 성질)이 달라요. 뭐랄까... 더 원초적이죠. 예를 들면 이 작품의 붉은 색을 보세요. 빛을 받으면 활활 타오르는 것처럼 일어나요. 유화물감으로는 내기 어려운 느낌입니다."
 
 김선태 작가의 작품 'unstable landscape 2014-14'
 김선태 작가의 작품 "unstable landscape 2014-14"
ⓒ 김선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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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실 곳곳엔 이처럼 석채를 이용한 작품들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전날인 13일까지 서울시 중구의 갤러리 미루에서 열린 전시('3체문제 - 김선태, 윤규섭, 이인현')가 종료된 후 갓 돌아온 작품도 있었다.
  
 김선태 작가의 작품 '대화 2015'
 김선태 작가의 작품 "대화 2015"
ⓒ 김선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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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담'을 그리는 한국화가
 
 김선태 작가의 작품 'Confusion 2013'.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의 트라우마를 겪은 작가가 건담을 소환해 파도를 막아서는 모습을 그렸다. 파도의 도상은 호쿠사이(1760~1849)의 유명한 그림('가나가와 해변의 높은 파도 아래')을 차용했다.
 김선태 작가의 작품 "Confusion 2013".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의 트라우마를 겪은 작가가 건담을 소환해 파도를 막아서는 모습을 그렸다. 파도의 도상은 호쿠사이(1760~1849)의 유명한 그림("가나가와 해변의 높은 파도 아래")을 차용했다.
ⓒ 김선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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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갤러리 미루에서 열린 전시가 13일 마감됐다. '건담'을 모티브로 한 작품들이 많았다.
"도쿄에서 활동하고 있던 2011년에 동일본 대지진이 났어요. 도로 신호등까지 다 정전이 됐고 하루에도 수십 번씩 세상이 마구 흔들리는데, 그게 며칠을 가는 거예요. 알 수 없는 거대한 힘에 일본 사회 전체가 불안에 떨었죠. 그때 아내가 임신 중이었는데, 아내부터 급하게 한국으로 보낸 뒤 저도 일본 생활을 정리하고 뒤따라 귀국했어요. 난생처음 겪는 일이었죠. 전쟁 같았고...

근데 한국에 돌아와 시간이 지나도 그때의 기억이 트라우마처럼 잊히지가 않는 거예요. 무방비로 후쿠시마 원전이 터졌고, 무려 2만 명의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안전하고 완벽하다고 믿고 있었던 일본의 민낯이 드러난 거였죠. 그들도 똑같이 부실했고, 무책임했고, 비리로 얼룩져 있었습니다. 제 무의식 속에 아마 그런 커다란 불행을 막고 싶었던 마음이 있었던 것 같아요. 건담이 파도를 막아서는 거죠.

이 그림을 보면... 건담들이 바주카를 쏘기도 하고 칼을 들고 저항하기도 하고. 하지만 그래 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죠. 파도의 도상(미술 작품에 나타나 있는 인물 또는 그 형상)은 너무도 유명한 일본 작가 호쿠사이(1760~1849)의 그림('가나가와 해변의 높은 파도 아래')입니다."
 
 김선태 작가의 'The Guardians 2013 No.6'. 건담이 후쿠시마 원전을 들어올리고 있다.
 김선태 작가의 "The Guardians 2013 No.6". 건담이 후쿠시마 원전을 들어올리고 있다.
ⓒ 김선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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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실 가운데 놓인 그의 책상에도 크고 작은 건담 피겨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 원래 건담을 좋아했나.
"2007년에 도쿄로 유학을 갔는데 거기 머물던 집 앞에 프라모델(조립식 모형) 가게가 있었어요. 일본에 친구가 있거나 딱히 취미가 있는 것도 아니니까 혼자 있는 시간에 하나하나 사서 조립하게 됐죠. 사실 일본에 간 뒤로 제가 방황을 조금 했어요. 유학을 떠나기 전 한국에선 IMF 이후 생겨나기 시작한 남대문과 시청 쪽의 노숙자들을 대상으로 주로 작업을 했었는데, 일본은 상황이 너무 다른 거예요.

신주쿠역 동쪽 출구에서 서쪽 출구로 이어지는 지하도가 일본 노숙자들이 상주하는 곳인데, 거기 노숙자들은 너무 밝고 즐거워 보이는 겁니다. 당황스러웠죠. 물론 그들도 다 사연이 있겠지만, 제 눈엔 그랬어요. 소파도 갖다 놓고 주변을 꽃으로 장식하거나 초를 켜놓고 얘기를 하면서 기린 맥주를 마시고 있었으니까... 느낌이 전혀 안 와서 한동안 그림을 못 그렸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이른 아침에 지하철을 타는데 일본 샐러리맨들 얼굴이 확 들어왔어요. 일본 지하철은 정말 조용한데, 사람들 얼굴이 하나하나 너무 쩔어 있는 거예요. 양복도 차려입고 번듯한 직장도 있겠지만 여유라곤 없는 고독한 얼굴들이었습니다. 역 주변 노숙자들에게서 봤던 행복한 얼굴과 대조되면서, 일본 지하철이 조용한 건 질서정연한 에티켓 때문이 아니라 그 무기력함 때문이란 생각이 들더라고요. 문득 건담 생각이 났죠. 무거운 슈트를 입고 언제든 출동해야 하는, 욕조에 앉아서도 편안히 쉬지 못하는 건담..."

한국화의 위기?
 
 김선태 작가의 작품 'comfortable place 2010 No.1'.
 김선태 작가의 작품 "comfortable place 2010 No.1".
ⓒ 김선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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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화'의 소재로 일본의 대표 로봇 '건담'이 쓰인다는 점에서 '한국화란 무엇인가'란 질문도 생긴다.
"한국화란 무엇인가. 정말 어려운 질문입니다. 한국에선 '한국화'와 '동양화'가 똑같은 말이었거든요. 대학에서 배울 때부터 그랬기 때문에 한 번도 이에 대해 질문을 갖거나 고민해본 적이 없었죠. 근데 일본 유학을 갔더니 중국인이나 일본인 친구들이 굉장히 의아해 하더라고요. 그러면서 그들이 묻는 거죠. 그럼 한국화가 뭔데? 나름 한국화로 석사까지 딴 상태였는데 그 질문에 곧장 답을 못했어요. 너무 부끄러웠죠. 그때부터 많은 걸 다시 생각하게 됐습니다.

기본적으로 한국화란 '한국의 전통을 베이스로 하는 회화'입니다. 여기서 '한국의 전통'이라면 한국 미술의 역사일 수도 있고 그림 자체일 수도 있고 재료나 문화일 수도 있죠. 서양화와 가장 구별되는 점은 물성이라고 생각하는데, 보다시피 제가 쓰는 재료들은 서양화가들 것과는 좀 다르잖아요."

그의 작업실엔 석채뿐만 아니라 자개, 옻, 한지, 장지, 닥종이, 아교 같은 전통 재료들로 가득했다. 인터뷰를 시작하기 전 그는 닥종이 위에 은박을 붙이고 그 위에 유황을 묻힌 대나무 촉대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유황에 닿은 은박은 금세 산화되어 시간에 따라 색이 변해갔다.

"순은이에요. 은이 반응해 산화돼가는 과정이 마치 인간 삶 같다는 생각을 해요. 변질되고 타락하고... 이런 효과와 물성은 서양화엔 없죠. 전통 재료들만이 가질 수 있는 느낌이 있거든요. 사실 변색 작용을 지금처럼 컨트롤할 수 있게 되기까진 정말 많은 시간이 걸렸어요. 아직도 완성은 아닙니다. 전통의 무게라는 게 있잖아요. 계속 하는 거죠. 그런 점에서 자부심 같은 건 있어요. 저 수많은 석채들 모았다고 누가 알아주는 사람은 하나도 없거든요? 하지만 적어도 '전통 재료에 나만큼 투자한 사람이 있을까?' 하는 자신감 같은 건 마음속에 있죠."
  
 김선태 작가는 닥종이 위에 은박을 붙이고 그 위에 유황을 묻힌 대나무 촉대로 그림을 그린다. 그가 직접 시범을 보였다. 유황에 닿은 은박은 금세 산화되어 시간에 따라 색이 변해갔다.
 김선태 작가는 닥종이 위에 은박을 붙이고 그 위에 유황을 묻힌 대나무 촉대로 그림을 그린다. 그가 직접 시범을 보였다. 유황에 닿은 은박은 금세 산화되어 시간에 따라 색이 변해갔다.
ⓒ 김성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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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화의 침체를 우려하는 시각도 있다.
"전반적으로 활력이 많이 떨어진 게 사실입니다. '한국화'하면 대부분 모란이 그려진 풍경화라든가 사군자나 산수화 같은 이미지를 아직도 떠올리는데, 그 뒤를 이을 만한 대표적인 이미지가 없다시피 하니까요. 제가 96학번인데 학교 다닐 때도 한국화는 늘 위기라고만 했어요. 미술 시장 파이는 그대로인데 서양화 일변도로 늘어나다보니 한국화나 동양화를 지원하는 학생들이나 인재는 줄어들어 갔죠. 인원이 줄으니 세대교체도 더디고 긴장감도 떨어집니다. 악순환이죠.

하지만 지금 전 좀 다르게 봐요. 자본주의와 정보 사회의 한복판에서 한국화를 팔 수 있는 시장은 세계적으로 오히려 더 커지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한국화의 이미지나 전통은 새로운 거니까요. 제 작품도 국내보다 프랑스나 미국, 일본에서 팔리는 경우가 많아요. SNS나 블로그만 보고 먼 나라에서 이곳 작업실까지 찾아와 작품을 사가는 모습을 접하면 작가로서 정말 큰 힘이 됩니다. 버틸 수 있는 에너지가 되기도 하고요.

결국 중요한 건 본인 실력이고, 이미지와 그에 대한 작가의 철학입니다. 노력과 능력에 따라 확장된 마켓을 자신의 마켓으로 만들 수 있다는 거죠. 그런 생각을 하면서 수십 년 전부터 모두가 떠들어댔던 '한국화의 위기'라는 말을 다시 곱씹게 됐어요. 그 말 때문에 저도 뭔가 새로운 걸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에 갇혀 사진이나 영상과 섞거나 이것저것 하기에만 바빴었거든요. 하지만 더 본질적인 것, 더 기본적인 것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것도 아직 할 게 너무 많으니까. 재료에 대해 투자를 많이 한 이유이기도 하고요."

"버티지 못하면 끝이니까"
  
 한국화가 김선태 작가가 지난 14일 경기도 용인의 작업실에서 <오마이뉴스>와 인터뷰하고 있다.
 한국화가 김선태 작가가 지난 14일 경기도 용인의 작업실에서 <오마이뉴스>와 인터뷰하고 있다.
ⓒ 김성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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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한국화의 가장 큰 문제는 뭘까.
"돈의 논리로만 움직이는 우리의 교육 시스템이라고 봐요. 근 10년 동안 동양화과, 한국화과가 많이 폐지됐습니다. 국립대나 대형 사립대들은 버틸지 몰라도 나머지는 어렵거든요. 취업률이란 잣대만으로 더 가혹하게 학과를 평가하고 순위를 매겨 구조조정을 하니 당장 성과가 보이지 않고 취직할 데도 없는 한국화과가 먹잇감이 되는 거죠. 한국화과를 졸업한 많은 학생들도 더 이상 계속해서 한국화를 그리려 하지 않습니다. 요즘은 졸업 후 당장 돈이 되는 타투이스트 쪽으로 진로를 선택하는 학생들을 자주 봐요.

하지만 그래도 괜찮을까요? 타투도 좋고 서양화도 좋고 현대 미술도 좋고, 영상, 디자인, 미디어, 복합 예술 같은 새로운 경향도 다 좋지만 계속 유지해야 하는 것도 저는 있다고 봐요. 누군가는 이어가야죠. 한국화의 역사를 얘기할 때 보통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명맥이 많이 끊겼다고들 하는데, 지금도 이 상황이 지속된다면 또 한 번 전통이 단절될지 모릅니다.

물론 그런 사태를 막으려면 내용적으로 한국화가 시대성을 갖고 새로운 걸 제시할 수 있어야겠죠. 그건 저에게도 마찬가지로 숙제입니다. 그렇다고 저 같은 한국화 작가들이 지금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건 아니거든요. 시간을 좀 주시고 지켜봐 주셨으면 좋겠어요."

- 어떻게 한국화를 하게 됐나.
"그냥 좋아서 했죠, 뭘(웃음). 제 고향이 전남 보길도인데, 어릴 때만 해도 섬에 빵집이나 중국집이 하나도 없었어요. 그런 걸 먹으려면 '앞섬', 그러니까 노화도까지 가야 했죠. 근데 앞섬 식당에 가면 벽에 꼭 한국화가 붙어 있었지, 서양화는 하나도 없었거든요(웃음). 자연스럽게 관심이 갔던 것 같아요. 어쩌다 보니 지금까지 하고 있네요. 잘 버텨왔다고 생각해요."

그는 버텨왔다고 거듭 말하며 말을 흐렸다. 그는 매일 아침 5시에 나와 그림을 그린다고 했다. 손이 떨리기 전까지 많이 그려놔야 한다고도 했다.

"버텼다는 건... 일단 경제적인 면이 쉽지 않았죠. 재료는 비싼데 처음부터 작품이 팔리는 건 아니니까 참 바쁘게 살았어요. 책에 들어가는 그림 일러스트나 방송 삽화는 물론 결혼식 사진 촬영이나 영상 편집 같은 일도 닥치는 대로 했죠. 그러면서 작업은 또 해야 하고. 잠을 거의 안 잤어요. 학위를 딴 이후엔 보따리장수처럼 시간 강사 일을 하러 다녔고요. 네다섯 군데 강의를 다녔죠. 아직도 기억이 나는데 처음 어느 대학에서 강의했을 때 받은 첫 월급이 28만 원이었습니다. 그냥 모든 걸 다 동원해서 지금까지 버틴 거예요. 왜 버티냐고요? 버티지 못하면 끝이니까. 지금까지 한 노력과 투자가 다 물거품이 되는 거니까. 그림이 좋으니까. 제가 해온 걸, 한국화를 계속해야 하니까...

그렇게 버텨온 작가들에게 또 하나 힘든 게, 사회적인 시선이에요. 한 번은 친구 결혼식에 가서 밥을 먹는데, 한 친구가 저한테 뭐 하고 사냐고 물어요. 그림 그리고 학교 강의 나간다고 했죠. 그랬더니 친구가 '백수네' 이러는 거예요. 순간 너무 화가 나서 숟가락 딱 내려놓고, '야 이 XX야 화가가 그림 그리면서 사는데 왜 백수야? 화가들도 다 밥 먹고 살아'라고 한 적이 있어요.

한국 사회에서 기본적으로 화가를 대하는 분위기가 그렇죠. 같은 화가라도 유명한 화가와 그렇지 못한 화가를 대하는 태도도 너무 다르고요. 어떤 화가든 최소한의 자존감에 상처를 입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어요. 그게 무너져서 그림을 놔버리는 걸 너무 많이 봤으니까."
 
 
김선태 작가의 더 많은 작품 이야기는 관련기사 <일본 샐러리맨에 겹쳐진 한국 노숙자의 얼굴>편에 실렸다.
 
 김선태 작가의 작품 '금빛나무가 있는 풍경 2018'
 김선태 작가의 작품 "금빛나무가 있는 풍경 2018"
ⓒ 김성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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