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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순항쟁 71주년을 맞아 여수 신기동 갤러리노마드 전시장에서 “되찾은 기억, 되찾은 노래” 그림과 함께하는 뮤직토크의 모습
 여순항쟁 71주년을 맞아 여수 신기동 갤러리노마드 전시장에서 “되찾은 기억, 되찾은 노래” 그림과 함께하는 뮤직토크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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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항쟁은 불의와 부당함에 저항한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이다."

여순항쟁 71주년을 맞아 여순항쟁 연구가 주철희 박사의 말이다. 그의 말의 요지는 반란의 역사가 아니라 옳지 못한 명령을 거부했던 항쟁의 역사로 여순사건을 재평가해야 한다는 얘기다.

여순항쟁 71주년을 맞은 지난 19일 오후 3시 전남 여수 신기동 갤러리노마드 전시장에서 "되찾은 기억, 되찾은 노래" 그림과 함께하는 뮤직토크가 열렸다. 이곳에선 30일까지 박금만 작가의 특별기획전이 전시중이다. 여순항쟁 유가족이 그린 작품이어서 더 주목을 끈다.

여순항쟁 71주년... '되찾은 기억, 되찾은 노래' 
 
 여순항쟁 71주년을 맞아 여수 신기동 갤러리노마드 전시장에서 “되찾은 기억, 되찾은 노래” 그림과 함께하는 뮤직토크후 한컷
 여순항쟁 71주년을 맞아 여수 신기동 갤러리노마드 전시장에서 “되찾은 기억, 되찾은 노래” 그림과 함께하는 뮤직토크후 한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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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이어 <여수넷통뉴스>와 <여수뉴스탐임즈>가 공동 주최한 이번 행사에 많은 사람들이 북적였다. 이날 초대가수인 해상화밴드는 여수야화와 여수블루스를 불렀다. 행사 말미에 상록수밴드는 꽃물이 든다. 여수는 항쟁이다. 부용산, 잠들지 않는 남도를 부르며 여순항쟁 그날의 함성을 노래하며 과거로(Back to the past) 빠져 들었다.

1부 사회를 맡은 곽준호 기자는 "우리들안에 인식 체계의 변화가 있을때만이 우리시대의 역사를 제대로 보고 그 역사를 여순항쟁으로 정명할 수 있다"면서 "역사에서 사용하지 않는 모호한 용어인 '여순사건'을 이제 '여순항쟁'으로 정명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여수넷통뉴스> 엄길수 이사장은 "역사의 진실을 시민들과 함께 이해하고 알려야겠다는 사회적인 책무를 가지고 이번 행사를 준비했다"면서 "더이상 시민들은 방관자적 태도에서 벗어나 진실과 정면으로 마주해아 한다"라고 일갈했다.

<여수뉴스타임즈> 김경만 대표는 "여수에 사는 사람이면 두 집 걸러 참혹한 아픔을 겪지 않은 집이 없었다"며 "여수에 산다는 것 하나만으로 굉장히 죄를 짓고 있는 것 같다. 이런 기회를 통해 오늘을 잊지 말고 여수의 역사를 전달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라고 덧붙였다.
 
 박금만 화가의 애기섬은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경찰은 여수지역 국민보도연맹 가입자 120여 명을 애기섬으로 끌고가 총살한 뒤 수장했다. 여수사람을 오동도에서 멀리 보이는 남해군 애기섬에 수장했던 이유는 이곳의 해류가 일본 쪽으로 흘러가서 시신이 여수 쪽으로 떠밀려오지 않기 때문이다
 박금만 화가의 애기섬은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경찰은 여수지역 국민보도연맹 가입자 120여 명을 애기섬으로 끌고가 총살한 뒤 수장했다. 여수사람을 오동도에서 멀리 보이는 남해군 애기섬에 수장했던 이유는 이곳의 해류가 일본 쪽으로 흘러가서 시신이 여수 쪽으로 떠밀려오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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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직토크가 시작됐다. 2부 사회를 맡은 방송인 김유화 전의원은 첫 질문으로 주철희 박사에게 여순사건은 지금까지 어떤 변화가 있었냐고 물었다. 이에 주박사는 "여순항쟁 70주년 이후 전국적으로 많은 변화가 있었다"면서 "작년 교육부 초청 대한민국 역사 선생님을 대상으로 여순항쟁과 한국현대사를 강의했다. 또 전라남도, 경상남도, 제주도 각 교육청에서 연수프로그램을 강연하고 있다"라며 교육청의 달라진 시각을 들려줬다.

그러면서 "순천대 학술대회에 참여했던 동국대 강정구 교수님이 1년 만에 정말 많은 변화가 있었다"면서 "지금껏 (여순)사건이란 단어에 얽매여 살았는데 유족들마저도 항쟁이라 한다. 정말 놀라운 변화가 일고 있다"라고 말했다. 김유화 의원은 이어 처음 '반란'에서 '사건'으로 이제는 왜 여순항쟁인가? 라고 물었다.
"우리가 그들(14연대 군인)은 왜 명령을 거부했는지 한 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습니다. 지금껏 국가주의와 반공이데올로기, 군사주의에 의해 움직였죠. 하지만 14연대 군인들은 명확히 자신의 입장을 밝혔습니다. 제주출병에 대해 애국인민들을 무참히 학살할 수 없다. 이건 국군의 사명이 아니다. 그래서 우린 출병을 거부하겠다는 내용이 담겼습니다.

당시 여수를 비롯한 전남동부지역은 정치, 경제, 사회적 문제들이 아주 어려웠습니다. 누군가 불씨만 붙여주면 활화산이 될 수밖에 없는 분위기였는데 14연대 군인들이 봉기의 불씨가 됐죠. 우리 지역은 인민위원회가 중심이 되었는데 이들은 일제강점기에 민족해방운동을 했던 사회주의자를 중심으로 항쟁이 일어났어요. 시민들이 9일간 민족적 과제를 실현한 곳이 여수가 유일합니다. 친일파 척결, 토지무상몰수 무상분배, 통일국가수립은 우리 지역밖에 실현되지 않았어요. 그래서 제가 항쟁이라 부르는 이유입니다."

여순반란사건을 그린 한형모 감독의 <성벽을 뚫고>라는 영화는 1948년 우리나라 최초의 외국 영화제 격인 칸 영화제에 출품된 작품으로 알려졌다. 주박사는 "이 영화는 국가주의와 반공주의를 기반으로 역사를 왜곡한 형태로 만들어졌다"면서 "당시 시나 연극 등 모든 작품이 그랬지만 유일하게 노래만이 당시의 아픔을 달랬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칼 마이던스는 당시 이 지역에서 얼마나 처참한 피해를 입었는지를 사진으로 남겼다. 최근 칼 마이던스 아들이 살아 있다는 것이 확인되어 초청할 계획이다"라고 덧붙였다.

이어 주박사는 "이번 행사를 '항쟁의 길을 걷다'는 제목으로 기획하고 싶었는데 수정되었다"며 "10월 26일 군인들이 왜 이렇게 가열차게 항쟁을 했고, 왜 여수시민들은 토벌군에 맞서 싸웠는가? 그 역사속 항쟁의 길을 걷는데 함께 했으면 좋겠다"라고 덧붙였다.

문재인 정부도 관심없는 '여순항쟁 특별법 제정'
 
 여순항쟁 유가족 박금만 화가의 작품중 가장 기억에 남는다는 여순항쟁 당시 여수군 인민대회의 모습
 여순항쟁 유가족 박금만 화가의 작품중 가장 기억에 남는다는 여순항쟁 당시 여수군 인민대회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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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항쟁 특별법 제정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냐는 물음에 문재인 정부에 대한 섭섭함을 토로했다. 이어 지역민의 인식 전환을 촉구했다. 문재인 정부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얘기다.

"저는 솔직히 특별법이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반대한다는 얘기가 아니고 특별법은 쉽지 않다고 봅니다. 왜냐면 제주4.3이 특별법이 만들어 진 것은 김대중 대통령이 4.3특별법을 만들라고 직접 지시해 만들어진 거예요. 그런데 여당도 청와대도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특별법이 쉽지않다고 보는 이유입니다.
특히 우리 지역의 모든 관심은 특별법에 매몰되어 특별법만 되면 모든 것이 될 것처럼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을 우리들이 여순항쟁이라는 역사를 제대로 기억하고 기록하면 여순항쟁은 역사에 올곧게 남습니다. 그게 바로 동학입니다. 동학은 특별법이 만들어져 동학혁명이 된 것이 아닙니다. 인식의 체계를 바꿔야 합니다." 
 홍성담 화백은 당시 원통하게 가신 분들을 우리가 진혼하고 위로하고 여태 트라우마에 젖어 살던 모든 시민들 위로하는 것에서부터 우리 현대사가 바로 선다고 믿고 있다며 여순항쟁을 정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홍성담 화백은 당시 원통하게 가신 분들을 우리가 진혼하고 위로하고 여태 트라우마에 젖어 살던 모든 시민들 위로하는 것에서부터 우리 현대사가 바로 선다고 믿고 있다며 여순항쟁을 정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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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에 참가한 홍성담 화백은 여순항쟁 정명이유를 한마디로 요약하며 지역민들이 아픈과거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야 함을 강조했다.
"장모님께서 여순항쟁이 끝나고 경찰서에 잡혀가 전기고문도 당했다는 얘길 자세히 들었습니다. 광주항쟁도 여순항쟁처럼 역사 속에 매몰시키기 위해 북한군이 와서 폭동을 일으켰다고 말장난이 계속되었죠. 여순항쟁을 반드시 우리 현대사에서 정명해서 제자리에 갖다놓지 못하면 태극기부대나 우익정치꾼들에게 빨갱이로 손가락질 하면서 언제 어디서 테러를 당하고 법적으로 어떤 조치를 당할지 모릅니다. 원통하게 가신 분들을 우리가 진혼하고 위로하고 여태 트라우마에 젖어 살던 모든 시민들 위로하는 것에서부터 우리 현대사가 바로 선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어 박금만 화가가 출연했다. 주철희 박사는 박근만 화가에 대해 여순항쟁을 피해자적 관점으로 보지 않고 왜 여순항쟁이 발발했는가? 왜 지역 사람들은 해방정국에서 시민군으로 싸웠는가? 항쟁적, 저항적 관점에서 그림을 그린 작가라고 소개했다. 지금까지 피해자적 관점에서 그린 그림들과 다르다는 의미를 부여했다. 여순항쟁 유족인 박화가는 가슴 아픈 그림들을 그리게 된 사연을 이렇게 털어놨다.

"15년 전 당숙 어르신이 돌아가시면서 내가 승진도 못하고 힘들었다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그걸 아버지께 말씀드렸더니 깜짝 놀라면서 그걸 누구에게 들었냐며 굉장히 충격에 빠졌습니다. 당시까지 여순반란은 금기어 같은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이후 할아버지 흔적을 찾아 15년 동안 우리 가족은 너무 무서워서 증언도 못했는데 경찰에서 자료를 찾아 그 순간부터 작업을 결심했습니다."
 박금만 화가는 즉결심판으로 좌익.우익을 분류하는 피해자에게 갑옷을 입혔다. 칼마이던스의 기록을 보면 아무 소리도 못내고 끔찍한 침묵이 흘렀는데 좌익으로 분류되면 처형당하는 상황에서 당사자들은 다 초월적인 절대자를 기다렸을 것 같아 총에 맞아도 뚫어지지 않는 갑옷을 입혀 그분들을 안아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박금만 화가는 즉결심판으로 좌익.우익을 분류하는 피해자에게 갑옷을 입혔다. 칼마이던스의 기록을 보면 아무 소리도 못내고 끔찍한 침묵이 흘렀는데 좌익으로 분류되면 처형당하는 상황에서 당사자들은 다 초월적인 절대자를 기다렸을 것 같아 총에 맞아도 뚫어지지 않는 갑옷을 입혀 그분들을 안아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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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자가 힘들지 않았냐는 물음에 "최초 한 달간은 작업을 할 수 없었다"면서 "여순작업을 하시는 분들이 사진으로 접하는데 사진 속에 수많은 시신들 때문이었다"라고 말했다. 이어 "할아버지도 좌익 활동으로 총살당해 사진을 볼 때마다 할아버지를 직접 뵈는 느낌이 들어 힘들었다"라고 회상했다. 그러면서 "유가족중 학살이니 떠벌리지 말라고 말하는데 작가적 양심에서 자료를 찾다보니 여수시민 1000명이 진압군과 싸웠는데 이것이 어떻게 항쟁이 아닐 수 있나? 그래서 이 작품들은 의미가 크다"라고 평가했다.

이날 아이들과 행사장을 찾은 서영석(39세)씨는 "제가 여수출신이 아니어서 여순항쟁에 대해 자세히 몰랐다"면서 "전시회를 보니 지금껏 여순사건은 잘못된 편견이나 역사왜곡으로 반란의 역사로 기록되었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우리가 민주주의를 누리고 있는 것은 선배들의 피와 눈물, 투쟁때문"이라며 "아이들에게 여수에서 민주주의 꽃이 피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함께 왔다"라고 덧붙였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여수넷통뉴스>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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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하고 싶은 일을 남에게 말해도 좋다. 단 그것을 행동으로 보여라!" 어릴적 몰래 본 형님의 일기장, 늘 그맘 변치않고 살렵니다. <3월 뉴스게릴라상> <아버지 우수상> <2012 총선.대선 특별취재팀> <찜!e시민기자> <2월 22일상> <세월호 보도 - 6.4지방선거 보도 특별상> 거북선 보도 <특종상> 명예의 전당 으뜸상 ☞「납북어부의 아들」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