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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를 봉쇄하고 있는 계엄군. 필자는 이 계엄군을 피해 우회해서 광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광주를 봉쇄하고 있는 계엄군. 필자는 이 계엄군을 피해 우회해서 광주로 돌아올 수 있었다.
ⓒ 5.18기념재단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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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군부가 가장 두려워 한 것은 광주항쟁이 타 지역으로 번지는 일이었다.

그래서 1차로 광주의 횃불이 전남지역으로 확산되지 않도록 차단하고 광주의 외곽을 봉쇄토록 지시했다. 이와 함께 공수부대원 1인당 420발의 실탄과 2발의 수류탄을 지급했다. 그러니까 광주 시내에서 철수할 때부터 실탄이 지급되었다. 외곽 봉쇄작전을 수행하는 계엄군에게 계엄사령부는 또 별도의 특수명령을 내렸다.

무기 휴대 폭도의 봉쇄선 이탈 절대 거부, 폭도 중 반항치 않는 자 체포, 반항자 사살, HPC 또는 차량을 이용한 강습 시도시는 사살, 현 봉쇄망을 주도로만 치중치 말고 지선도로도 장악, 폭도 탈출 적극 방지. (주석 22)

"광주 외곽을 봉쇄하라는 상부 지시의 핵심은, 광주를 고립시킨 뒤 계엄군이 재진입하겠다는 입장이 반영된 것이었다. 그리고 계엄군은 광주외곽에서 총기를 난사해 많은 사상자를 발생시켰다. 먼저, 광주 외곽으로 소식을 알리려고 시도하던 시민들이나 사상자들을 수습하던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주남마을사건'으로 알려진 사건이 대표적이다." (주석 23)
  
 80년 당시 시위에 참여하고 있는 광주지역 고등학생들.
 80년 당시 시위에 참여하고 있는 광주지역 고등학생들.
ⓒ 5.18기념재단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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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남마을 사건'은 5월 23일 광주에서 화순으로 가던 버스에 계엄군의 총격으로 수십 명이 사망하고, 주검마저 사라져버린 이 사건은 뒤에서 다루기로 하고, 먼저 송암동 버스 총격사건부터 알아본다.

21일 저녁 버스 두 대가 송암동 앞 도로상에 나타나자 인근 야산에서 불을 뿜어내는 집중사격이 가해졌다. 먼저 온 차량은 완전히 전복하고 말았다. 그 안에 몇 명의 청년들이 탔는지 알 수 없었지만 비명소리가 주택가까지 들렸다. 이어서 전복된 차량보다 조금 더 앞선 위치에서 또 한 대의 버스가 계엄군의 집중사격을 맞고 전복했다. 밤새 이런 상황은 계속 벌어졌고 우리는 총소리만 나면 으례히 돌아오는 차량이 총에 맞은 것으로 생각했다.

아침에 일어나 그 지점에 조심스럽게 나가 보았다. 도로 양쪽에 있는 논에 20대 청년들로 보이는 시체 9구가 있었다. 전복된 차량은 버스 두 대였으며 그 시체는 이 버스를 타고 광주에 들어오던 청년들인 것 같았다.

잠시후 계엄군의 차량 한 대가 이 9구의 시체를 모두 싣고 군용담요를 덮어 은폐한 뒤 산속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계엄군 차량이 도로에 나타나자 모두 몸을 피했는데 담요를 덮은 그 차가 지나간 후에 나와보니 논에 있던 시체 9구가 모두 없어졌다.

아마 그 9구의 시체는 헬기로 어디론가 실려간 것 같다. 송암동 뒷산에서는 계속 헬기가 이착륙하고 있었고 9구의 시체를 실은 차도 그 방향으로 향했다. 이밖에도 많은 수의 청년들이 밤중에 들어오다가 이 도로 위에서 계엄군의 총격에 희생되었다. 대부분의 시체는 밤새 이착륙을 계속하던 헬기가 실어간 것 같다. (주석 24)

 
충정작전(진압군은 나이 어린 고등학생들까지 연행) 충정작전(진압군은 나이 어린 고등학생들까지 연행)
▲ 충정작전(진압군은 나이 어린 고등학생들까지 연행) 충정작전(진압군은 나이 어린 고등학생들까지 연행)
ⓒ 사진 출처 : (재)5.18기념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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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이 시신들은 공군 수송기에 의해 김해로 옮겼을 것이라는 기록이 드러났다.

"경향신문이 입수한 「소요진압과 그 교훈」이라는 군의 3급비밀이라는 문건에는 5ㆍ18기간 공군수송기를 이용해 '시체'를 옮긴 기록이 나온다.(…) 주목할 점은 비고란이다. 둘째 줄 '김해~광주'를 운항한 수송기 기록 옆에 '시체'라고 적혀있다" (주석 25)

많은 사상자가 생기고 병원마다 부상자로 넘쳤다. 21일 오후 5시경 헌혈하고 나오던 여학생이 헬기에서 계엄군이 쏜 총탄에 맞아 즉사했다. 계엄군은 오후 4시경에 시외곽으로 철수했으나 공중에서 헬기는 여전히 시내를 배회하면서 총질을 계속한 것이다. 기막힌 사연을 들어보자.

기독병원에 피가 부족하다는 연락을 받고 시민들이 헌혈한 피를 각 병원을 돌아다니면서 수거하여 기독병원에 보급했다. 우리가 탄 차가 양림동을 지날 때 한 여학생이 차를 세웠다.

"헌혈하러 가는 길인데 저를 병원으로 데려다주세요"라고 말했다. "어른들이 헌혈을 많이 하고 있으니 학생은 그냥 집으로 가라"고 해도 한사코 헌혈을 하겠다고 하자 기독병원까지 태워다주었다.

우리는 차를 돌려 전남대부속병원으로 갔다. 병실이 부족해 치료를 받지 못하고 복도에 방치되어 있는 환자를 급히 기독병원으로 옮겼다.

기독병원에 도착해 보니 한 쪽에서 사람들이 울부짖고 있어 그쪽으로 가봤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인가!"

조금 전 헌혈하겠다고 조르던 그 여학생(박금희)이 머리에 총을 맞아 죽어 있는 것이 아닌가. 그곳에 있던 사람들 말에 의하면 그 학생이 헌혈을 하고 집으로 가려고 병원 마당을 지나갈 때 헬기에서 쏜 총에 맞아 즉사했다고 했다. (구술 : 이광영) (주석 26)


주석
22> 20사단, 『충정작전상보(1980. 5. 21~5, 29)』, 1980.
23> 노영기, 앞의 책, 227쪽.
24> 5ㆍ18광주민중항쟁유족회 편, 「송암동 양민학살」, 『광주민중항쟁비망록』, 139쪽, 남풍, 1989.
25> 『경향신문』, 2019년 4월 8일자.
26> 『5월광주항쟁사료전집』, 73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5ㆍ18광주혈사’]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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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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